“무슨 소리야, 다짜고짜 찾아와서는?”
에린에게 뒤지지 않는 날카로운 목소리에는 짜증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그런 마빈의 반응에도 에린은 딱히 기분 나쁜 내색을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그녀는 마빈을 제대로 된 한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화가 난 얼굴을 감추지 않는 마빈을 보며 비웃음을 흘린 에린은 제 할 말만 했다.
“공작님이랑 르네 사이에 무슨 일 있지?”
그녀의 말에 마빈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다는 듯 에린을 잠시 바라보던 그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말했다.
“있기는 뭐가 있어.”
“뭐야? 너 지금 딴생각하는 거야, 아니면 정말 모르는 거야?”
“도대체 어디서 무슨 소리를 듣고 와서 이러는 거야?”
진심으로 짜증을 내며 펄쩍 뛰는 마빈을 보던 에린은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의 태도가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걸 느낀 탓이었다.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마빈이 모르는 무슨 일이 있을 수 있나.
에린은 복잡한 심경이었다. 하지만 분명 르네가 말하지 않았던가.
그 말도 안 되는 헛소리가 맞았다고.
“그러면 왜 그런 말을 했지?”
에린은 초조한 얼굴로 손톱을 씹었다. 어느새 마빈은 잊힌 채였다.
분명 며칠도 못 버티고 내쳐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다른 사람이라면 절대 믿지 않을 이야기였다. 레이넌을 귀찮게 해서 그의 눈에 들라니.
다시 생각해도 허술해서 웃음이 새어 나올 지경이었다. 하지만 눈치 없는 르네는 에린의 말을 그대로 믿었다.
처음부터 너무 쉬운 여자였다. 물론 그래서 르네를 고른 것이었지만.
“그래서 이렇게 짜증이 날 줄은 몰랐는데.”
에드윈의 보모에는 관심도 없다면서 넙죽 그 자리를 차지하고 레이넌에게 잘 보일 방법을 묻다니. 르네는 늘 그런 식이었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순수하게 웃는 그 얼굴을 엉망으로 만들고 싶었다.
조금의 의심도 없이 레이넌의 곁을 얼쩡거리기 시작한 르네는 시녀들 사이에서 화제였다. 무식할 정도로 용감한 그녀의 행동에 금방 다가올 어두운 미래를 입을 모아 걱정했다.
염려는 무슨. 다들 속으로 언제쯤 르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까 기다리고 있으면서.
에린의 얼굴에는 냉소가 떠올랐다.
그녀 역시 르네가 금세 레이넌에게 혼쭐이 나고 로에리안저에서 내쳐지리라 믿었다.
그걸 위해 에린은 르네를 부추겼고, 그녀는 어떤 의심도 없이 제 말을 믿지 않았던가.
그런데 왜……?
아직도 르네의 행방에 대한 어떤 불미스러운 이야기는 없었다.
해맑은 얼굴로 고맙다고 말하던 르네의 얼굴이 떠오르자 에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불안한 마음을 애써 누르고 에드윈에게 눈도장이나 찍으려고 찾아갔던 건데, 일이 이렇게 흘러갈 줄이야.
“뭐야, 도대체?”
사람을 불러 놓고 몰아세우더니 이제는 없는 사람처럼 무시하는 에린을 지켜보던 마빈은 이미 참기 힘들 정도로 화가 차오른 상태였다.
저나 자신이나 다르지 않은 입장이거늘 늘 제가 고용주라도 된 것처럼 행동했던 에린이었다.
무엇보다 딴생각을 품고 있는 건 바로 그녀가 아닌가.
저렇게 뻔히 보이는데 저는 잘 숨기고 있다고 굳게 믿는 꼴이 우습지도 않았다.
에린이 바라는 대로 일이 진행되든, 그렇지 않든 끝은 결국 정해져 있다는 걸 그녀는 몰랐다.
“잘 지켜봐. 알았어?”
그녀는 끝까지 마빈을 무시하는 태도로 명령과 같은 말을 남기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의 방을 떠났다.
남겨진 마빈은 치밀어 오르는 화에 숨을 가쁘게 내쉬었다. 언젠가 다가올 에린의 불행한 결말을 기다리며 참기엔 그녀는 너무도 제멋대로였고 표독스러웠다.
그렇다고 제 손으로 일을 망칠 수도 없는 노릇이라 마빈이 할 수 있는 건 그녀가 앉았던 침대를 걷어차는 정도의 화풀이뿐이었다.
***
“이게 나팔꽃이야?”
방에 장식된 보라색 꽃을 보고는 에드윈이 물었다. 꽃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는 나로서는 난감한 질문이었다.
다행히 무슨 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게 나팔꽃이 아니라는 것만큼은 알았다.
“아니요. 무슨 꽃인지 알아볼까요?”
정원사인 체이스가 지금쯤 어디에 있을지 떠올려 보며 말했다. 에드윈은 조금은 실망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에드윈 님, 왜 그러세요?”
“아니, 책에서 나팔꽃을 봤거든. 저 꽃도 보라색이라서 나팔꽃인 줄 알았어.”
“나팔꽃은 조금 더 꽃잎이 크고 활짝 피어 있답니다.”
“정말 나팔처럼 생겼어?”
“네. 이렇게 생겼답니다.”
근처에 있던 종이를 가져와 내가 아는 나팔꽃을 그렸다. 여기의 나팔꽃이 내 세계의 나팔꽃과 같을지 모르겠지만 비슷하겠지.
잠시 눈을 찡그리며 그림을 살펴보던 에드윈은 손뼉을 찰싹 치며 말했다.
“정말 나팔처럼 생겼네! 그럼 이렇게 불면 나팔처럼 뿌뿌 소리도 날까?”
“글쎄요? 한 번도 안 불어 봐서…….”
나팔처럼 소리가 나냐니.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참느라 이를 악물어야 했다.
“아, 그럼 함께 심어 볼까요? 나팔꽃은 엄청 빨리 자랄 텐데요.”
“그래? 응. 심어 볼래.”
“그럼 체이스에게 물어보고 올게요.”
나는 마빈에게 에드윈을 맡기고 체이스를 찾아 나섰다. 그를 찾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체이스는 대부분 정원 아니면 온실에 있었으니까.
멀리서 그의 모습이 보이자 걸음이 빨라졌다. 사람들은 거칠고 무뚝뚝한 그를 피하곤 했지만 체이스는 위협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꽃과 나무를 정성껏 돌보는 모습을 나는 이미 여러 번 봤다. 외모와 말투에 가려서 사람들이 모를 뿐이지 그는 오히려 섬세한 사람이었다.
“체이스.”
나의 부름에 체이스는 손을 툭툭 털며 다가왔다.
“무슨 일이지?”
“에드윈 님이 나팔꽃을 심고 싶어 하시는데 어디에 심으면 좋을까 해서.”
“에드윈 님이?”
“응. 나팔꽃이 궁금하신가 봐.”
체이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주변을 둘러봤다. 곧 적당한 자리를 찾았는지 그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준비해 놓을 테니까 내일 모시고 와.”
나를 향해 말하지는 않았지만 긍정의 대답임은 분명했다.
나팔꽃 하나만으로도 에드윈이 얼마나 기뻐할지 눈에 선했다. 새로운 경험에 환하게 웃을 에드윈의 얼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나도 절로 웃음이 나왔다.
***
체이스의 말을 전달하자 에드윈은 눈에 띄게 기뻐했다. 평소보다 쉽게 잠들지 못한 것도, 다음 날 일찍 일어난 것도 기대감 때문일 터였다.
다른 날에는 기쁘게 향했던 수업들도 오늘따라 발이 떨어지지 않는지 자꾸 뒤돌아보곤 했다.
반면에 돌아오는 걸음은 어찌나 가벼운지.
꽃을 심는 일이 이렇게나 기쁘고 설레는 일이었던가. 내가 어렸을 적을 떠올려 봤지만, 딱히 기억이 나지 않았다.
에드윈의 순수함에 새삼 세상에 찌든 내 모습이 대비되어 조금은 슬퍼졌다.
그래도 역시나 잔뜩 들뜬 얼굴로 체이스의 설명을 듣는 에드윈을 보는 것만으로도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체이스 역시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옅은 미소까지 띠며 친절하게 에드윈에게 설명했다.
에드윈이 모든 걸 직접 하고 싶은 마음을 아는지 말로 설명할 뿐 손길을 더하지는 않았다.
어른 두 명과 아이 하나가 쪼그려 앉은 이 모양새는 지나가는 사람이 보면 꽤 우스꽝스러울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 시간에 여기를 지나가는 사람은 거의 없으니…….
“뭐 하는 거지?”
없어야 하는데? 어느덧 귀에 익은 목소리가 내려앉자 나도 모르게 뻣뻣하게 벌떡 일어났다.
꽤 오래 쪼그려 앉아 있었던 모양인지 다리에 쥐가 났지만, 정신력은 위대했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목소리의 주인을 마주 볼 수 있었으니까.
“에드윈 님이 나팔꽃을 심어 보고 싶다고 하셔서 지금 심고 있습니다.”
“나팔꽃?”
그의 시선이 스윽 아래로 향했다. 어느덧 함께 일어서 있던 에드윈의 손, 그리고 내 손에 머문 그의 눈은 다시 내 얼굴로 돌아왔다.
보지 않아도 에드윈과 내 손의 상태는 알 수 있었다. 흙이 잔뜩 묻어 있을 터. 조금 전까지 땅을 도닥이고 있었으니까.
공작 아들의 손이 흙투성이라니. 역시나 조금 혼날 만한 일이려나.
문득 기가 죽었다가 불과 얼마 전에 보았던 에드윈의 모습이 떠올랐다. 막 그의 보모가 되었을 무렵의 에드윈이.
아니, 그때까지는 흙바닥에서 뒹굴고 놀고 손도 안 씻고 간식 막 집어 먹었는데. 그때는 아무도 뭐라고 안 해 놓고서 이제 와서…….
그때였다. 레이넌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잘 노는군.”
뭐지? 비웃는 건가. 알아서 잘하라고 경고하는 건가.
“오늘 수업은 모두 마쳤나?”
“네. 글도, 검술도 모두 열심히 배우고 돌아왔습니다.”
“그래. 다들 칭찬하더군.”
칭찬했구나. 역시나 잘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에드윈이 수업에 가서는 어떤지 알 수 없었던 나는 마음 한구석에 자리한 불안을 지워 버리기로 했다.
워낙 야무진 아이니까 잘하겠거니 믿는 것만 해도 충분할 것 같았다.
“그보다 르네.”
“네?”
갑자기 불린 이름에 놀라 대답하자 레이넌이 손짓했다. 가까이 오라는 듯이.
그의 얼굴에는 조금 전보다 짙은 미소가 피어나 있었다.
발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던 건 아마 그것 때문인 듯했다. 레이넌에게 다가가는 대신 나는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하지만 나를 도와줄 사람은 없었다.
“르네.”
재촉하듯 다시 들려온 이름에 천천히 발을 뗐다. 발목에 모래주머니가 달려 있는 것 같았다.
무겁기 그지없는 한 걸음 한 걸음을 그는 아무 말 없이 기다려 줬다.
레이넌의 앞에 서자 그는 슬쩍 눈썹을 올렸다.
그가 말한 대로 왔는데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라 뭐가 문제인지 생각하려던 그때였다. 레이넌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긴 다리 덕분일까. 훌쩍 가까워진 거리에 나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그의 입에서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온 순간, 레이넌은 천천히 상체를 숙였다.
“왜…….”
느릿하게 흘러나오는 말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햇빛을 등진 탓에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마치 시야가 전부 가려진 것 같았다. 그 때문에 다른 감각이 더욱 예민해진 것 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얼굴에 와 닿는 그의 숨은 생각보다 뜨거웠다. 해를 직접 받는 것처럼.
숨과 함께 닿은 목소리는 생각보다 부드러웠고, 또 어딘가를 간질이는 느낌이 들었다.
“에드윈에 대해 이야기하러 오지 않지?”
그렇게 정신이 다른 데 팔려 있던 탓일까. 그의 말을 듣고도 한동안은 무슨 뜻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눈만 깜빡이다 한순간에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터졌다.
“네?”
“말했을 텐데. 에드윈에 대해 종종 이야기하러 오라고.”
종종이라고 하셨던가요? 그보다 아직 그렇게 오래 지나지 않은 일인데요?
그 이야기를 들은 것이 언제였는지를 떠올리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야말로 불과 며칠 전의 일이었으니까.
“지금 바로 듣지.”
레이넌은 그렇게 말하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따라와. 에드윈은 계속하고.”
그 말만을 남기고 레이넌은 등 돌려 걷기 시작했다.
조금 전 거리를 좁혀 왔을 때와는 달리 아주 천천히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 나를 재촉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드윈 님은 내가 모실 테니 걱정하지 말고 다녀와.”
높낮이 없는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이토록 얄미울 수가 있다니. 잠시 로만을 노려봤지만 곧 눈을 아래로 내렸다.
나에겐 레이넌만큼이나 무서운 사람이긴 했으니까.
어느샌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레이넌을 발견한 나는 얼른 뛰었다.
그대로 집무실로 향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그의 걸음이 향한 곳은 뜻밖의 장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