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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를 잘 키워보려고 했을 뿐인데 (9)화 (9/129)

레이넌의 집무실을 나서고도 한동안은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안 귀찮았다는 거지? 그 말은 곧 앞으로도 나는 괜찮을 거고?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고.”

나를 위로하려고 했던 말일까. 보통이라면 그렇겠지?

아니,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레이넌이 위로라니. 나를?

힘없는 웃음소리가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아무래도 정신적으로 많이 몰린 모양이었다.

그럴 만했다. 단둘이 그의 집무실에 남았으니 오죽할까.

그보다 귀찮지 않다고도 말했는데 그럼 세실과 에드윈의 말은 어떻게 되는 거지?

머릿속이 혼동으로 뒤덮였다. 하지만 그렇게 오래가지는 않았다.

어차피 생각해 봤자 나는 답을 찾을 수 없었다. 레이넌의 속에 들어갔다 나오지 않는 이상은.

정작 당사자인 레이넌이 그렇다고 하니 일단 믿을 수밖에.

온전히 믿어도 될까, 하는 얕은 걱정이 생겨났지만 애써 마음 깊숙한 곳으로 밀어 넣었다.

안 좋은 쪽은 아닌 것 같으니 일단 기뻐하자. 나머지는 나중에 다시 생각하기로.

순식간에 피로가 몰려들었다. 그를 마주하기만 해도 기운이 모두 빠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그런 데다가 그간 전전긍긍했던 일이 순식간에 해결이 되니 더욱더 몸이 무거워지는 느낌이었다.

“아, 얼마나 이러고 있었지?”

최대한 빨리 레이넌에게서 멀어지자는 생각으로 굉장히 바삐 걷고 있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한자리에 멈춘 채였다.

레이넌이 한 말에 대한 의미를 생각하다 보니 걸음을 멈춘 것도 알지 못했다.

에드윈이 돌아오기 전에 돌아가서 이런저런 준비를 할 생각에 마음이 바빠졌다. 급하게 걷던 걸음은 에드윈의 침실을 얼마 남겨 두지 않고서 다시 한번 멈추었다.

갑자기 나타난 손이 나를 붙든 탓이었다.

“에린?”

“왜 그렇게 놀라?”

“아니, 갑자기 나타나서 붙잡으니까 당연히 놀라지. 여기서 뭐 해?”

“응? 아니, 지나가다가 네가 보여서.”

“여길 지나가?”

나는 에린의 말에 주변을 둘러봤다. 그녀가 딱히 지나다닐 만한 장소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에린이 담당하는 곳은 여기서 꽤 거리가 멀었다. 게다가 그녀 혼자 이 근처를 돌아다니는 건 꽤 어색한 모양새임이 분명했다.

“너는 왜 혼자야?”

“응? 그럼 누구랑 같이 있어야 해?”

“에드윈 님은?”

“아……. 뭐, 잠깐…….”

나 혼자인 것이 뻔히 보이는데도 에린은 한동안 주변을 둘러봤다. 에드윈이 금방이라도 나타날 것처럼.

“그렇지 않아도 잘됐다. 안 그래도 만나러 가려고 했는데.”

“나를? 왜?”

“전에 말한 공작님 이야기 말이야.”

“아, 말했잖아. 보통은 모르는 이야기라니까? 누가 뭐라고 그래?”

레이넌의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에린은 듣지도 않고 다급하게 내 말을 끊었다.

“아니, 그런 건 아닌데…….”

“공작님이 원래 감정 표현을 잘 안 하시잖아.”

“음. 그렇긴 하지.”

“무엇보다 로만 님이 증인이라잖아. 솔직히 로만 님이 그렇게 그 자리에 올랐다는데 다른 이야기를 들을 필요가 있어?”

“아, 로만 님이 그러셨다고 했지?”

역시나 로만은 그렇게 레이넌의 측근이 된 걸까. 로만이라면 레이넌의 차가운 시선 같은 건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시도 때도 없이 그의 앞에 나타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생각에 잠겨 있는 그때, 팔에 통증이 느껴졌다. 에린이 내 팔을 매우 세게 붙든 탓이었다.

“에린?”

“로만 님께 물어볼 생각은 아니지?”

“아니야. 미쳤어?”

“잘 생각했어. 로만 님을 누가 몰라. 작은 흠도 최악의 약점으로 만들고, 돈이라면 공작님도 팔 거라는 사람이 로만 님인데.”

역시 악명 높기로 따지면 로에리안가에서 그를 따라올 사람이 없었다. 괜히 그의 알 수 없는 표정과 눈빛 때문에 마음고생 한 것이 억울해지기 시작했다.

로만을 떠올리는 그 잠깐 사이에 에린은 초조한 듯 내 팔을 흔들었다. 대답을 요구하는 것처럼.

순간 팔을 통해 느껴지는 통증에 얼굴을 구겼다. 하지만 에린은 내 얼굴을 유심히 보고 있으면서도 내 감정은 전혀 읽지 못했다.

오늘따라 유독 초조해 보이는 에린의 모습에 의아함이 들었지만 일단 그녀가 원하는 답을 내어줬다.

“그건 그렇지. 그보다 에린, 팔이 아픈데?”

“아, 미안.”

에린은 화들짝 놀라며 손을 뗐다. 저도 모르게 나를 세게 붙든 것이 미안했던지 살살 문질러 주며 말했다.

“에린, 내가 너 잘못될 만한 이야기를 로만 님께 할까 봐 그래?”

나를 달래려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오히려 내가 그녀를 달래야 할 것 같았다.

에린은 꼭 누군가에게 쫓기는 것처럼 다급해 보였으니까. 뭐가 그리 겁이 나서 내 이야기를 제대로 듣지도 않고 저렇게 말을 끊임없이 풀어내는지 알 수가 없었다.

“에린, 나는 그저 그 정보가 맞는 것 같아서, 그래서 고맙다는 말을 하려던 것뿐이야.”

“……응?”

내 말에 에린은 그대로 굳었다. 황당하다는 얼굴로 되묻는 그녀를 보자 도리어 내가 당황스러울 따름이었다.

“왜 그래?”

“아, 아니. 무슨 일 있었어?”

“그런 건 아닌데……. 그보다 그 정보 어디에서 얻은 거야? 진짜 맞는 말이긴 한 건지 조금 의심했거든.”

미안한 얼굴로 웃으며 말하자 에린은 어색하게 따라 웃었다.

“그래. 쉽게 믿기 힘든 이야기이긴 하지…….”

“혹시 다른 건 없어?”

“응? 아……. 한번 알아볼게.”

조금씩 평소의 표정을 되찾은 에린은 나를 빤히 바라봤다. 그러면 꼭 뭔가를 알아낼 수 있을 것처럼.

에드윈이나 레이넌에 관해서는 쉽게 이야기를 하지 못할 나를 알기에 궁금한 걸 물을지 말지 고민하는 것 같이 보이기도 했다.

“에린?”

“응? 아, 아무튼 잘됐다. 그래서 공작님 눈에 든 것 같아?”

금세 밝은 목소리로 말하는 에린에게 놀란 내가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쉿. 누가 들으면 오해해. 그리고 공작님 눈에 들려는 건 아니었다니까…….”

“우리 사이에 뭘.”

“정말 아니라니까.”

“알았어. 그래도 뭔가 있으면 꼭 알려 줘야 해.”

알았다니. 전혀 알지 못했잖아.

무슨 말을 하든 에린은 내가 레이넌을 노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분명했다.

에린은 분명 레이넌을 만난 적이 없겠지.

그의 눈빛을 받고 서 있는 것도 큰 용기가 필요한데, 노린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를 직접 보면 나를 조금 더 이해할 텐데. 아쉬움이 커졌다.

“그보다 르네…….”

“아, 미안해. 에드윈 님 오시기 전에 준비해 놔야 할 게 있어서. 다음에 다시 이야기해.”

에린의 이야기가 길어진 탓에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 갑자기 초조한 마음이 든 나는 얼른 에린에게 인사를 하고 에드윈의 침실로 들어왔다.

그가 바로 씻을 수 있게 준비를 마치고 간식을 챙기고 있을 때 에드윈이 때맞춰 돌아왔다.

“다녀오셨어요?”

“응.”

“일단 좀 씻으실까요?”

“응. 얼른 씻고 올게.”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얼굴을 하고서도 에드윈은 착하게 그를 담당하는 시종인 마빈과 함께 종종걸음으로 욕실에 향했다.

다른 때보다 짧은 시간이 지난 후 에드윈은 뽀얀 얼굴로 나타났다. 붉게 물든 볼은 첫 수업의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탓인지 더운 공기 속에 있었던 영향인지 알 수 없었다.

준비해 놓은 간식을 보고는 신이 나서 달려가려는 에드윈을 붙들었다. 내가 뭘 할지 알아챈 에드윈은 아차 하는 얼굴로 얌전히 의자에 앉았다.

물기가 여전히 가득한 머리카락을 말리는 동안 에드윈은 편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어색해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자연스럽게 몸을 기대어 왔다.

보들보들한 머리카락의 감촉이 꼭 그의 성격 같았다. 나 역시 기분 좋게 그의 머리카락을 말리고 있으면 에드윈은 가끔 고개를 젖혀 나를 바라봤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자연스럽게 바뀌는 그의 얼굴에 나 역시 미소가 퍼졌다.

“르네.”

“네, 에드윈 님.”

“나는 르네가 정말 좋아.”

에드윈이 눈을 사르르 접으며 말했다. 수줍은 얼굴을 하고서도 또렷하게 제 마음을, 그것도 내가 좋다는 말을 하는 그를 안아 주고 싶었다.

신분 차이라는 게 이렇게 서글픈 것일 줄이야.

“어머. 저도 에드윈 님이 정말 좋은데. 마음이 통했네요.”

대신 활짝 웃으며 내 마음을 전하자 에드윈은 뭔가 더 할 말이 있는 듯 입을 달싹였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건 말이 아니라 한숨이었다. 잠시 나를 빤히 바라보던 그는 조금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오래오래 같이 있으면 좋겠는데……. 그래도 르네는 지금 이대로가 좋아.”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이었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에드윈의 말이 담은 뜻을 짐작해 보고 있을 때, 에드윈은 언제 그랬냐는 듯 활짝 웃었다.

“그냥 르네가 좋다는 말이야.”

머리를 말리느라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하고서도 에드윈은 참 예쁘게도 웃었다. 나는 수건을 내려놓고 그의 머리카락을 정돈했다.

“이제 다 됐어요.”

내 말에 에드윈은 재빨리 의자에서 내려와 간식 앞으로 갔다.

“첫 수업은 어떠셨어요?”

케이크를 한입 베어 문 그는 조금 시무룩한 얼굴로 대답했다.

“음……. 아직 목검은 안 된대. 다른 것부터 해야 한댔어.”

“그럼 나중에는 목검을 들 수 있겠네요?”

“그렇지.”

“그럼 그날 에드윈 님께는 자랑할 일이 생기는 거잖아요?”

“……그런가?”

“그러니 오늘은 첫 수업이 어땠는지 자랑해 주세요. 저는 정말 검술 수업이 어떤지 모르거든요.”

“힘들긴 한데 재밌었어.”

시무룩한 얼굴은 금세 사라지고 에드윈은 다시 환하게 웃었다. 가끔 나이답지 않은 모습을 하는 것 같다가도 이럴 땐 영락없는 아이였다.

“공부도 그렇고……. 어렵긴 해도 배우는 건 좋아.”

……그렇구나. 공부를 좋아하는구나.

나로선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지만 어쨌든 기특한 말이었다. 배우는 데 재미를 느낀다니.

갑자기 늘어난 수업이 나 때문인 것 같아 조금 미안한 마음이 있었는데 걱정하지는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에드윈은 오늘 대단한 것을 많이 봤다며, 해야 했던 건 지루했지만 그래도 즐거웠다고 한참을 기쁜 얼굴로 조잘거렸다.

할 이야기는 많은데 간식도 먹어야 하니 그의 입은 말 그대로 쉴 새가 없었다.

나는 그에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가끔은 과장 섞인 반응도 해 주었다.

에드윈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초조함과 불안함은 자취를 감췄다. 에드윈과 함께 하는 시간은 그야말로 평화로움 그 자체였다.

***

다른 때였다면 뒷정리를 하느라 바빴을 마빈은 르네가 에드윈에게 정신을 팔린 틈을 타 아주 조용히 침실을 빠져나왔다.

에드윈의 침실을 중심으로 오른쪽은 마빈의 방, 왼쪽은 르네의 방이었다.

마빈은 곧장 제 방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마자 그를 기다리고 있던 누군가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그를 맞았다.

“왜 이제 와?”

문을 미처 닫기도 전에 들려온 큰소리에 그는 놀라 문을 닫았다. 바깥에서 별다른 소리가 들려오지 않자 그는 한숨을 내쉬며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너야말로 이런 시간에 갑자기 찾아오면 어떻게 해?”

“그러니까 네가 일을 똑바로 했어야지.”

팔짱을 끼고 침대에 앉아 있던 에린은 잔뜩 신경질이 난 목소리로 그를 탓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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