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이게…….”
“에드윈 님이 직접 딴 사과입니다.”
“직접 기른 사과라고?”
“직접 딴, 사과입니다.”
직접 기르는 쪽이 취향이었나. 생각지도 못한 레이넌의 말에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그러고 보니 나쁘지 않았다. 왜 그런 생각을 못 했지?
생각에 잠긴 나를 끄집어내는 레이넌의 목소리에는 얼떨떨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땄다고.”
“네.”
확신에 찬 내 대답을 들은 그는 잠시 손에 들린 사과를 빤히 바라봤다.
에드윈이 나무에 올라가서도 한참을 고민하다가 딴 사과였다. 그만큼 탐스럽고 예쁘게 익어서 그도, 나도 매우 뿌듯했다.
역시 사람 눈은 비슷하다는 말이 맞는 것 같았다. 레이넌의 곁에 서 있던 로만조차 홀린 듯 사과를 바라보고 있었으니.
내 눈에 예쁘면 다른 사람의 눈에도 예뻐 보이는 법이지.
흐뭇한 얼굴로 레이넌을 바라보고 있을 때 그와 눈이 마주쳤다.
“나무에 올라갔다고?”
아……. 머리와 눈이 바삐 움직였다. 우리가 의도한 것과 다른 분위기를 느낀 탓이었다.
걱정……되는 거겠지? 그래. 아무리 무관심하다고 해도 애가 나무에 올라갔다면 놀라지 않을 부모는 없었다.
그런 마음을 못 알아차린 나를 자책하며 다른 때보다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낮은 나무라 그렇게 위험하지 않았습니다.”
내 말에도 그는 좀처럼 표정을 풀지 못했다.
“물론 떨어지면 제가 받을 준비도 하고 있었고요.”
제법 다부진 자세를 직접 보여도 줬지만, 그는 눈썹만 슬쩍 올릴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에드윈 님께서는 훨씬 높은 나무도 잘 타시니까요. 운동 신경이 워낙 좋아서 그렇게 걱정하실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 순간 로만과 눈이 마주쳤다. 잠시 나를 바라보던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시선을 피했다.
로만이 먼저 눈을 피하다니. 들어 본 적 없는 상황이었다. 아무것도 읽을 수 없는 무미건조한 그의 시선과 마주치면 대부분 상대방이 먼저 눈을 피하게 된다고 했으니까.
그랬는데……. 그랬던 로만이…….
눈을 마주치지 못할 정도로 내가 지금 몹쓸 짓을 한 상황인가요? 나 괜찮은 거 맞아?
로만은 끝끝내 내가 있는 쪽으로 눈길은커녕 얼굴도 돌리지 않았다.
피하는 거야. 저건 무조건 일부러 시선을 피하는 거야.
알 수 없는 오기가 생긴 나는 더욱 끈질기게 그를 바라봤다. 이 정도로 집요할 줄은 몰랐던지 슬쩍 고개를 돌렸던 로만은 어색하게 다시 눈을 공중 어딘가로 띄웠다.
뭔데!
답답한 마음에 나도 모르게 한 발 앞으로 나가려 할 때였다. 잠시 잊고 있었던 목소리가 내 발을 제자리에 묶어 두었다.
“운동 신경이 좋다니. 검술을 배울 때가 됐군.”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에 화들짝 놀랐다. 검술이라니?
“오늘부터 시작하지.”
“알겠습니다.”
공손하게 대답한 로만은 내 옆에 있던 에드윈에게 다가왔다.
“에드윈 님, 제가 모시겠습니다.”
처음 보는 친절한 로만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에드윈은 붙들고 있던 내 손을 더 힘주어 잡았다.
나 역시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당황스러웠다.
투명할 정도로 맑고 푸른 눈이 나를 간절히 바라보고 있었다. 잠깐 속마음을 에드윈에게 그대로 보였다는 걸 깨달은 나는 두 손으로 그의 손을 감싸며 말했다.
“저는 검술 수업이 어떤 건지 몰라요. 그러니까 에드윈 님이 다녀와서 알려 주세요.”
“르네도…… 몰라?”
“네. 한 번도 검술은 배워 보지 않아서요.”
“그렇구나. 알았어.”
불안했던 에드윈의 눈에는 순식간에 의지가 차올랐다. 로만은 조금 전보다 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보더니 에드윈을 데리고 나갔다.
내 손으로 이 작은 아이를 사교육 시장으로 내모는 것 같아 양심에 찔리긴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일단 에드윈이 다녀와서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계속해도 될지, 아니면 어떻게든 그만두게 해야 할지 가늠이 될 터였다.
아마 계속하게 되겠지. 아무리 그래도 레이넌이 일부러 에드윈에게 나쁜 일을 할까.
챙기지 않을 뿐이지 나쁜 의도가 있는 것처럼은 느껴지지 않았기에 큰 걱정은 생기지 않았다.
“그럼 저도 나가 보겠습니다.”
“잠깐.”
재빨리 그들을 따르려던 나만 레이넌의 집무실에 남아야 했다.
다들 나만 남겨 두고 가지 말아요.
나는 울고 싶은 마음을 애써 숨겼다. 역시나 올라가지 않는 입꼬리를 슬며시 끌어 올렸다.
파르르 떨리는 볼의 근육을 제발 레이넌이 알아채지 못하길 바랐다.
“귀찮게 하는 일은 없도록 하라고 하지 않았나.”
나른하게 흘러나온 목소리에 나도 마음이 편안하게 풀리려고 했다. 하지만 곧 얼음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귀, 귀찮으셨나요?”
“아니.”
순식간에 바닥으로 떨어진 심장이 제자리를 찾았지만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잠시 눈을 굴리며 그의 말을 되짚던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 정도는 안 귀찮으시단 말씀이시죠?”
“종종 이렇게 에드윈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주는 편이 좋겠군.”
세상에. 에린, 네 말이 맞았나 봐. 정말 고급 정보였잖아?
아니, 그럼 로만의 의미심장한 표정은 뭐였지? 그냥 괴롭히는 건가?
꽤 그럴싸한 가정이었다. 왜 굳이 나를 상대로 심술을 부리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로만의 악명으로 미루어 보아 이유가 없어도 그는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이 와중에도 레이넌의 표정에선 온기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아서 과연 말 그대로 받아들여도 되나 작은 고민이 일기도 했다.
하지만 레이넌이 과연 웃을 수 있는 사람일까. 거기서부터 의문이 생기기 때문에 잊기로 했다.
한동안 찝찝하게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던 불안감을 떨쳐 낼 좋은 기회였으니까.
“대신.”
설렘이 마음속에 퍼져 가던 그때, 꽤 단호한 레이넌의 목소리가 들렸다.
“대신?”
“앞으로 선물은 하지 말도록.”
“그럼 카…….”
“카드 선물도 그만두는 편이 좋겠어.”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다는 듯 레이넌은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잘랐다.
에드윈이 꽤 좋아했는데. 걱정하면서도 들떠서 준비하던 에드윈의 표정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힘이 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작지만 시무룩한 기색이 역력히 묻어나는 대답을 들은 레이넌의 얼굴이 꿈틀거렸다.
실수했다는 생각이 들어 대답을 바로잡으려고 했지만, 나보다 레이넌이 빨랐다.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고.”
“네?”
“아니, 됐어. 이만 나가 봐.”
다른 때보다 목소리가 부드러운 것 같은데, 착각인 걸까? 혹은 잘못 들은 것일지도 몰랐다.
제대로 들은 것이 맞는지 확인하고 싶었지만, 레이넌은 재빨리 손을 내저으며 축객령을 내렸다.
눈만 깜빡이던 나는 금세 살벌해진 그의 눈빛을 마주하고서야 재빨리 집무실을 벗어났다.
역시. 안락하고 밝은 미래는 쉽게 다가오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조금이라도 긴장을 늦추면 내 미래는 다시 어두워지기 십상이었다.
뒤늦게 소름이 돋은 팔뚝을 문지르며 재빨리 에드윈의 침실로 걸음을 옮겼다.
***
레이넌의 집무실 문이 닫히자마자 에드윈은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문을 한참 바라봤다. 정확하게는 그 문 너머에 있을 르네를 보고 싶은 것이었다.
“걱정되십니까?”
“응. 르네가 조금…….”
에드윈은 적절한 단어를 찾는지 입 안으로 말을 굴렸다. 바삐 움직이는 그의 눈을 바라보던 로만이 대신 답을 내어주었다.
“눈치가 없죠?”
“응. 눈치가 없지.”
아휴, 하는 한숨과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모습까지.
제 딴엔 진지하게 걱정하고 있었지만 그 모습이 한없이 귀여워 보인다는 걸 에드윈이 알 리가 없었다.
레이넌과 둘이 남은 르네를 걱정하면 할수록 볼이 점점 빵빵하게 부풀어 올랐다.
탱글탱글한 볼을 꼬집어 보고 싶다는 충동을 참아 내는 건 로만에게 꽤 힘든 일이었다. 레이넌의 살벌한 눈초리를 받는 것보다 더.
“그보다 르네가 꽤 마음에 드신 모양입니다.”
로만의 말이 들리자 에드윈은 겨우 문에서 시선을 뗐다.
언제 심각한 얼굴을 했냐는 듯 에드윈은 어느 때보다 환한 미소를 보이며 대답했다.
“응. 세상에서 제일 좋아.”
“그 정도라고요?”
에드윈에게 되묻는 로만은 조금 난감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왜?”
“이 정도로 누군가에게 마음을 주신 건 저도 처음 보는 일이라.”
그의 말에 담긴 의미를 아는지 모르는지 에드윈은 방긋 웃었다.
“아버지가 르네를 내보낼까?”
“글쎄요.”
원래 모호한 말로 확답을 피하는 편인 로만이었지만, 이번만큼은 진심이었다.
처음에 르네가 불쑥불쑥 나타나기 시작했을 때는 혀를 찼고, 그런데도 레이넌이 르네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놀랐다.
레이넌이 딱 싫어하는 짓만 골라 하고 있었다, 르네는. 정돈되지 않은 말과 내용 없는 말은 물론 불쑥 나타나 레이넌의 시간을 뺏는 일까지.
아직 어린 에드윈도 아는데 정작 르네는 알지 못했다. 제가 지금 사자의 입에 머리를 들이밀고 있다는 사실을.
그런데 레이넌은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인상을 찌푸리긴 하지만, 결국은 르네를 받아 주고 있었다.
혹시 르네가 마음에 든 걸까.
아주 잠깐 떠오른 생각에 로만은 곧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물론 로만의 눈에도 깡충깡충 열심히 뛰며 제 존재를 뽐내는 르네가 가상하긴 하지만 과연 레이넌도 그렇게 생각할까.
역시 아니었다. 괜한 생각이었다.
끈질기게 쫓아오던 애절한 눈길을 떠올린 탓에 잠시 판단력이 흐려진 모양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상대는 레이넌이었다.
생각을 정리한 로만이 입을 열었다.
“얼마나 갈까 싶긴 합니다, 저도.”
“르네한테 말해 줄까?”
“에드윈 님이요?”
“아니, 로만이.”
“제가요?”
“응.”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에드윈의 모습에 로만이 입을 벌렸다.
“공작님도 저를 써먹을 땐 보수를 그만큼 주십니다.”
“아버지 몰래 글 가르쳐 준 거 비밀로 해 줄게.”
“알겠습니다.”
르네에게 글을 배우지 않았어도 에드윈은 어느 정도 글을 읽을 줄 알았다. 간간이 로만이 시간을 내어 그를 가르친 덕이었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깜찍하게 르네까지 속인 에드윈은 해맑은 얼굴로 로만에게 말했다.
레이넌이 과연 그 사실을 모를까 싶었지만 로만은 아직은 어린 미래의 주인이 건넨 협박의 탈을 쓴 제안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에드윈이 이렇게까지 마음에 들어 하니 르네가 최대한 그의 곁에 머무는 편이 좋았다.
“그럼 이제 가 보실까요?”
“르네한테는 어떤 걸 얘기해 줘야 하지?”
“어차피 지금 에드윈 님이 하시는 건 뭐든 르네가 들어도 됩니다.”
“그렇겠지? 얼른 어른이 되고 싶다. 조금 더 자랑할 게 많아질 텐데.”
순식간에 또래 아이처럼 순진한 얼굴로 돌아온 에드윈과 세상에서 가장 비열한 얼굴을 한 로만이 걸음을 옮겼다. 그런 와중에도 정다운 대화가 도란도란 이어졌다.
물론 그들의 대화를 듣지 못하고 둘의 모습만 멀리서 바라보던 사용인들의 눈에는 당연히 그렇게 좋은 사이로 보일 리 없었다.
그간 워낙 에드윈에 대해 이런저런 소문이 은밀히 돌았으니까.
에드윈과 로만이 사이좋게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에드윈에 대한 새로운 소문이 하나 더 추가되었다는 건 그들도 알지 못했다.
로만의 표정으로 미루어 보아 레이넌과 에드윈의 관계가 아주 틀어진 것이 분명하다는 소문이 바로 그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