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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를 잘 키워보려고 했을 뿐인데 (7)화 (7/129)

파르르 떨리는 레이넌의 손에 들린 것을 지켜보던 나는 눈을 깜빡였다.

짧은 그의 질문이 끝나고 이를 아득 무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는데. 착각일까.

그보다 이미 뭔지 말해 준 것을 굳이 여기까지 가지고 와서 다시 묻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황당한 마음이 일었지만, 입꼬리를 애써 열심히 끌어 올렸다. 고용주를 대하는 최고의 공손함을 담아 최대한 상냥한 말투로 대답했다.

“에드윈 님이 쓰신 카드입니다.”

“왜 글이 없지?”

“그럴 리가요. 이름만큼은 직접 쓰셨는데요?”

글이 없다니. 그럴 리가 없었다. 조금 삐뚤긴 했지만, 에드윈이 혼자 써 낸 제 이름에 그도, 나도 얼마나 뿌듯했던가.

그새 카드가 바뀌기라도 한 건 아닐까. 걱정스러운 마음이 일었다.

그 순간, 그의 얼굴이 작게 일그러졌다.

역시 카드가 바뀐 모양이다. 확인하려고 카드를 받아 들려던 그때, 레이넌이 물었다.

“그러니까 왜 카드에 글은 이름뿐이지?”

“……에드윈 님은 아직 글을 모르시니까요?”

제대로 된 카드가 그에게 전달된 모양이었다. 그런데 왜 레이넌은 황당하다는 듯이 당연한 사실을 묻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이건 뭐지?”

레이넌은 에드윈이 카드에 그려 놓은 그림을 가리키며 물었다.

“참 잘 그렸죠?”

알록달록한 색감이 눈에 확 들어왔다.

이 나이대 아이들이라고 하면 사람은 고로 막대기가 아니던가.

우리 에드윈은 제법 그럴싸한 모양새로 사람을 그려 냈다. 심지어 손가락도 열 개 모두 그리는 섬세함까지 갖추고 있었다.

새삼 에드윈의 그림에 감탄하고 있자 레이넌의 얼굴 근육이 묘하게 움찔거렸다.

“그래서 이게 무슨 의미지?”

“오늘 날씨가 좋아서 기분이 매우 좋았고, 공작님은 오늘 하루 어떠셨냐는 내용입니다?”

도대체 왜 뻔히 보이는 걸 굳이 묻는 것인지. 너무 당연한 이야기를 하게 된 탓일까. 나도 모르게 말끝을 올리게 되었다.

아, 혹시 함정인가. 에드윈과 함께 있으며 겨우 진정된 심장이 다시금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레이넌의 얼굴이 조금씩 구겨졌다.

뭐가 잘못된 거지? 레이넌의 얼굴을 한참을 들여다봐도 뭐가 문젠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내 시선을 느끼지 못한 듯 한참을 카드만 들여다보던 그가 허탈하게 말했다.

“이게?”

“네.”

설마 진짜 몰라서 묻는 건 아니겠지?

해도 있고, 웃는 얼굴의 아이도 있고, 어두컴컴한 남자도 있는데?

답답한 마음은 레이넌도 같았던 모양이었다. 목까지 정갈하게 채웠던 셔츠의 단추를 그가 거칠게 풀어냈다.

“이게 그런 뜻이라고? 네 눈에도 그렇게 보이나?”

“그럼요. 아주 잘 그리지 않았나요?”

내 말에 그는 다시금 에드윈의 그림을 빤히 바라보았다.

역시. 아무리 무심하더라도 이런 재능을 발견하면 감탄하기 마련이지.

“에드윈 님이 공작님을 떠올리며 그린 그림이라……. 아! 혹시 다른 그림도 한번 보시겠어요?”

뿌듯하게 말을 이어 가다 떠오른 것은 에드윈의 그림을 모아 놓은 상자였다.

레이넌이 보고 있는 그림이 제일 잘 그린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다른 것도 잘 그렸으니까.

에드윈에 대한 관심이 조금이라도 자라난 것 같아 들뜬 나는 겁도 없이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레이넌은 그 자세 그대로 나를 따라왔고, 얌전히 소파에 앉았다. 곧 뭔가 말을 하려던 그의 앞에 에드윈의 그림 상자를 꺼내 놓자 레이넌은 곧 입을 다물었다.

“이건 에드윈 님이 제일 좋아하는 케이크를 그린 거고요.”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레이넌의 얼굴은 조금씩 굳어 갔다.

새삼 진지하게 에드윈의 그림을 보는 그의 모습에 신이 나 열심히 그림을 설명하고 있자니 얼굴에 따끔한 시선이 닿는 게 느껴졌다.

그림은 이제 지겨운가? 그렇다면…….

“이건 종이접기 한 걸 모아 둔 상자인데요.”

함께 챙겨 온 상자의 뚜껑을 연 순간 그의 눈은 더없이 날카로워졌다.

“그만.”

“네.”

아무래도 그의 관심사엔 종이접기가 없는 모양이었다.

레이넌이 딱 잘라 말하자 나는 얼른 대답하고는 열심히 웃었다. 레이넌은 아무 말 없이 한참을 나와 카드를 번갈아 보기만 했다.

입꼬리가 파르르 떨릴 때쯤에야 그는 시선을 거두고 몸을 일으켰다. 겨우 한숨 돌리려던 나는 재빨리 그를 따라 일어섰다.

레이넌이 다시금 예의 서늘한 눈길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몸을 곧게 세우고 다시 입꼬리를 끌어 올리자 그가 입을 열었다.

“그보다 글을 모른다니? 왜 아직 글을 배우지 않았지?”

이번엔 내가 이를 아득 물었다.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아무도 신경을 안 썼잖아요.

“글쎄요. 아무도 안 가르쳤던 모양입니다. 그래도 저랑 얼마 전부터 배우기 시작하셨답니다. 배우는 속도가 무척 빠르세요. 역시 영특하시다니까요.”

속마음을 그대로 보일 수는 없는 노릇이라 상냥하고도 사무적으로 대답했다. 물론 그중에 과장되었거나 틀린 말은 없었다.

꽤 자연스러운 미소와 부드러운 목소리였다고 생각했는데. 레이넌은 뭐가 그리 못마땅한지 한숨을 내쉬며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섰다.

갑자기 짙어진 그의 체향에 숨을 멈췄다. 어느새 바로 코앞에 그의 얼굴이 있었다.

“가정 교사를 붙여야겠군. 그리고…….”

“……네.”

다른 때는 대답 같은 거 안 해도 잘만 이야기하더니 대답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 같은 그의 모습에 끝내 참았던 숨을 내뱉었다.

숨과 함께 흘러나온 대답이 만족스러운 듯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는 쿠키 같은 거 만들지 말도록.”

레이넌은 꽤 엄한 목소리로 당부를 남기고 곧장 자리를 떠났다.

“르네?”

내내 뒤에서 조용히 서 있던 에드윈은 레이넌이 떠나자마자 내 곁으로 쪼르르 다가왔다.

“나 잘못한 거야?”

“아니요? 왜 못 알아보셨을까요? 저는 바로 알아봤는데?”

울음기가 섞인 에드윈에 질문에 나는 화들짝 놀라며 부정했다.

“쿠키는…….”

“제가 말씀드렸던 그 종이꽃과 같은 게 아닐까요?”

“종이꽃?”

“네. 제가 분명히 봤거든요. 다른 손에 들린 쿠키를 반이나 드셨더라고요. 부끄러우신 게 분명해요.”

카드만 들어 올린 탓에 늦게 알아챘지만 어쨌건 다른 손에는 쿠키가 들려 있었다.

정확하게는 반이라기보다는 딱 한 입 먹은 것처럼 보였지만.

“그러게 내가 쿠키 색깔이 이상하다고 했잖아.”

“조, 조금 탄 것뿐이에요. 먹을 수 있어요.”

“모양이 뭔지 못 알아보겠잖아.”

“정성이 중요한 거죠. 어쨌건 드셨고, 심지어 다시 들고 가셨잖아요?”

카드도, 쿠키도 무사히 전달됐고, 쿠키는 직접 먹기까지 했으니 에드윈이 걱정할 만큼 나쁜 상황은 분명 아니었다.

당당한 내 위로에도 영리한 에드윈은 의심의 눈초리를 쉽게 거두지 않았다.

“정말이라니까요. 처음이라 그렇지 다음번엔 공작님도 에드윈 님의 그림을 바로 알아보실 거예요. 다음에는…… 쿠키 말고 다른 걸 같이 만들어 보죠.”

“그럴까……?”

아무래도 레이넌에게 아이의 여린 마음을 신경 쓰는 화법을 알려 주어야 할 것 같았다.

물론 그를 보고 떨지 않을 수 있을 때의 이야기겠지만. 오늘처럼 미리 연습해 가면 의외로 잘될지도 몰랐다.

생각만큼 부자 관계는 최악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조금 더 좋은 사이가 되도록 만들려면 손이 많이 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좋은 사이가 되는 게 먼저일지, 내 앞날의 행방이 결정되는 게 먼저일지.

오싹한 기분이 피부를 타고 온몸에 퍼졌지만 다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일단 오늘은 과부하였다.

***

일단 에린에게 찾아가 확인부터 하고 싶었는데. 급한 내 마음과 달리 좀처럼 그녀를 찾아갈 시간이 나지 않았다.

그럴수록 초조함만 커졌고, 며칠이 지나서야 겨우 시간을 내어 그녀가 있는 곳으로 찾아갈 수 있었다.

직접 만나서 그 소문의 근거를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정작 에린은 못 만나고 다른 시녀들의 질문 세례만 받고 겨우 빠져나왔다.

에드윈과의 교류가 거의 없는 레이넌이기에 나 역시 그와 마주치지 못했을 거라고 다들 단정했다.

하지만 분명 그렇게 단정 지으면서도 왜 다들 레이넌에 관한 질문만 내내 쏟아 냈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내가 못 만났을 거라고 단정한 것도, 레이넌에게 접근하는 내가 이상하다는 소문을 나눈 것도 모두 그녀들이었다.

그런 내색도 없이 질문을 쏟아 내는 시녀들은 레이넌에 대한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더 알고 싶다는 의지를 보여 주었다.

에린을 만날 수 없다는 걸 알고는 얼른 그 자리를 빠져나왔지만 아직도 귓가가 시끄러운 것만 같았다.

에드윈의 침실 문을 붙들고 고개를 푹 숙였다. 울렁이는 속을 조금은 가라앉히고 들어가야 할 것 같았다.

“안 믿을 거면서 왜 물어봐.”

“뭘 물어봤는데?”

잠깐 사이에 너무 지친 탓에 한탄하듯 흘러나온 말이었는데 뒤에서 질문이 돌아왔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나도 모르게 화들짝 놀랐다.

“에드윈 님?”

“놀랐어?”

뒤를 돌아보자 나보다 더 놀란 표정으로 큰 눈을 끔뻑거리고 있는 에드윈이 보였다.

“저 때문에 놀라셨어요? 죄송해요.”

“괜찮아.”

“오늘은 일찍 끝나셨네요?”

“응. 얼른 르네를 만나고 싶어서 엄청 열심히 했거든.”

그래서 할당량을 일찍 끝내서 결국 수업도 일찍 끝났다는 이야기인 것 같았다.

“그럼 오늘은…… 회의를 좀 해 볼까요?”

“좋아.”

“혹시 공작님께 드리고 싶다거나 보여 드리고 싶은 게 따로 있으세요?”

“음…….”

에드윈은 두 뺨을 손으로 감싸고 고민에 빠졌다.

그렇게 한참을 끙끙대며 생각을 해도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는지 도움을 구해 왔다.

“뭐가 좋을지 모르겠어. 어떤 걸 좋아할까?”

“그럼 반대로 에드윈 님이 잘하는 거라든가, 좋아하는 건요?”

“내가?”

“네.”

에드윈은 아무 말 없이 나를 빤히 바라봤다. 그 눈빛이 꼭 “그거 괜찮은 거 맞아?”라고 묻는 것 같았다.

나는 그런 에드윈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고 말고요.”라는 의미를 담아.

몇 번 나를 힐끔거리던 에드윈은 곧 다시 생각에 잠겼다.

“아, 나 그거 잘하는데.”

“어떤 거요?”

“나무 꼭대기까지 올라갈 수 있어.”

아. 그랬다. 에드윈이 나무에 올라간 걸 직접 본 그날이 떠올랐다.

나를 부르는 에드윈의 목소리는 들리는데 한참을 고개를 돌려도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해맑게 웃으며 나무 위에서 나를 부르는 에드윈의 모습을 발견했을 땐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에드윈은 고소 공포증도 없는 아이인 모양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보여 드리지?”

“아! 사과를 하나 따서 드릴까요? 특별히 예쁘고 잘 익은 사과로?”

내 말에 에드윈은 눈을 굴렸다. 잠시 고민하던 그는 만족한 듯이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사과나무는 그렇게 높지 않으니까 괜찮겠지. 설사 에드윈이 떨어진다고 해도 내가 충분히 받아 낼 수 있는 높이였다.

아니, 그보다 레이넌이 사과를 좋아할까? 캐서린에게 물어보면 알겠지. 사과를 싫어하면 다른 과일도 있고.

공작저 곳곳에 자리한 몇몇 과일나무를 떠올렸다. 사과를 대체할 만한 건 충분히 있었다.

그리고 다들 그렇게 높지 않은 나무이니 에드윈에게 위험하지도 않을 터였다.

직접 딴 과일을 선물하다니. 직접 만든 공작물을 선물하는 것만큼이나 정성이 담겨 있지 않은가.

“그럼 내일 공부를 마치면 사과를 따러 갈까요?”

“응.”

생각하면 할수록 꽤 괜찮은 회의 결과인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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