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님 손에 기어이 죽고 싶은 거냐고 다들 수군거리고 있어.”
“귀찮은 거 제일 싫어하시는 분이니까.”
세실이 떠나고도 그녀가 남긴 말은 내내 나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무엇을 믿어야 할지 알 수 없어 혼란스러운 와중에 그간 레이넌이 보여 주었던 표정이 한꺼번에 스쳐 지나갔다.
차갑기 그지없던 그의 얼굴이 일상적인 게 아니라 다른 때보다 안 좋은 기분을 표현한 것이라면?
세상이 무너진 듯 창백한 얼굴로 서 있던 나는 곧 정신을 차렸다.
지금이라도 도망가는 게 맞지 않을까.
에린과 세실은 서로 반대의 말을 했지만 내가 사라지면 결과는 같았다. 내가 여기서 조용히 사라진다고 나를 찾을 사람은 없으니까.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끌려가 그대로 사라지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선택이었다. 내 입장에서는 두말할 것 없는 이야기이고, 레이넌에게도 그게 훨씬 좋지 않을까?
쓸데없이 사람을 안 해쳐도 되니까.
“뭐라는 거야, 정말.”
나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헝클였다. 그런다고 머릿속이 정돈되는 것도 아닌데 뭐라도 하지 않으면 그대로 소리를 지르며 뛰어다닐 것만 같았다.
그거야말로 큰일이었다. 누가 봐도 그대로 끌어낼 행태니까.
레이넌에게도, 에드윈에게도, 그리고 나에게도 행복한 결말은 무엇인가 싶어 잠시 고민에 잠겼다.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결말이 과연 있을까.
답은 쉽게 찾을 수 없었지만, 대신 몸이 절로 움직였다.
지금이다. 튀자. 튀어야 산다.
역시 여기서 불안하게 마음 졸이고 사느니 얼른 떠나서 마음 편한 삶을 찾는 것이 나았다.
“르네?”
바삐 걸음을 옮기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에드윈의 부름이 들렸다.
돌아보면 안 돼. 돌아보는 순간 이 결심은 흔들릴 테니까.
분명 생각은 그렇게 했는데 왜 내 몸은 이렇게 뻣뻣하게 뒤로 돌고 있는지.
“에드윈 님?”
에드윈은 옅은 분홍색 셔츠와 베이지색 재킷을 입고 있었다. 게다가 나비넥타이까지.
그래. 역시 도련님은 나비넥타이지.
내가 골라 준 옷이지만 생각보다 더 잘 어울렸다. 꼬마 신랑처럼 보이는 에드윈의 모습에 내 속을 가득 채웠던 공포감은 금세 잊고 말았다.
“너무 잘 어울리시네요.”
조금은 불안한 듯 눈치를 살피던 에드윈은 내 말에 방긋 웃음을 보였다.
이제까지는 혼자 레이넌을 만나러 갔지만, 오늘은 에드윈과 함께 가기로 한 날이었다.
시큰둥하지만 내치지는 않고 끝까지 이야기를 들어 주고 간혹 질문도 하길래 에드윈을 데려가기로 한 건데.
괜찮을까?
모를 때가 차라리 마음 편했어. 속으로 한탄을 거듭하고 있을 때 에드윈이 기대에 찬 얼굴로 물었다.
“멋있어?”
“네. 무척요.”
긴장과 기대가 뒤엉킨 에드윈의 얼굴을 보니 오늘은 그만두자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제까지 괜찮았으니 오늘도 괜찮을 거야. 그렇게 믿을 수밖에.
나는 몸을 낮추고 삐뚤어진 에드윈의 넥타이를 바로잡아 주었다. 에드윈 역시 제 차림이 마음에 드는지 가슴을 잔뜩 앞으로 내밀었다.
잔뜩 힘이 들어간 그의 모습에서 느껴지는 뿌듯함에 터지려는 웃음을 겨우 참고 질문을 던졌다.
“가지고 오셨어요?”
“응.”
불끈 올린 작은 손에 들린 꾸러미와 종이를 본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가 보실까요?”
세실에게 그런 이야기를 듣고도 레이넌에게 가자는 말을 이 입으로 꺼내야 한다니.
근래에 입 밖에 내 본 말 중에 나를 가장 우울하게 만드는 말이었다. 그렇다고 에드윈의 앞에서 티를 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울적한 기분 딱 그만큼 환하게 웃을 수밖에.
“응.”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에드윈의 손을 잡고 조금 전에 급히 걸었던 그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래요. 갑시다. 이렇게 될 줄 알았지. 에드윈을 바로 마주칠 줄이야.
아니, 그래서 레이넌 앞에 자꾸 나타나는 게 좋은 거야, 안 좋은 거야? 에린이 맞을 수도 있지 않을까.
레이넌의 집무실에 도착하기까지 애써 희망을 되뇌었다.
조금씩 퍼져 나가던 희망은 크고 두꺼운 문을 앞두고서는 바람 빠진 풍선처럼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사라진 희망 대신 기대를 살짝 품어 봤다. 오늘은 집무실에 없다거나, 너무 바빠서 돌려보내는 일이 생길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들어오시랍니다.”
에드윈을 향해 공손히 이야기하는 시종의 목소리가 어떤 기대도 소용없다고 알려 주었다.
머리가 아플 정도로 고민하고 겁먹었던 것과 달리 레이넌은 다른 때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그게 오히려 나를 더 긴장하게 했다.
일상이라고 생각했던 저 모습이 실은 언짢음의 표현일지도 몰랐으니까. 다른 날보다 신경을 곤두세우고 레이넌의 눈치를 살폈다.
이러다 그가 눈을 깜빡이는 것조차 이상하게 보이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예민해진 순간, 손을 가득 채우는 온기가 느껴졌다.
다행히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손에서 시작된 온기가 마음을 조금씩 진정시켜 주었다.
어른인 나도 긴장이 되는데 에드윈이라고 상황이 나을 리 없었다.
내 손을 붙든 작은 손이 잠시도 쉬지 않고 계속 꼬물거리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고개를 돌리니 옅은 미소를 띤 에드윈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렇게 차려입고 곧게 서 있으니 꽤 의젓해 보였다. 흔들리는 눈동자는 그의 불안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긴 했지만.
걱정할 것 없다는 마음을 담아 붙든 손에 힘을 주니 에드윈의 표정이 조금은 편안하게 풀어졌다.
안심하고 고개를 돌린 순간 집무실을 나가려던 로만과 눈이 마주쳤다.
아마 로만은 내내 내게 시선을 두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것도 꽤 의미심장한 눈으로.
왜요? 이거 아닌가요? 잘못된 길을 가고 있나요?
로만이라면 분명 알고 있을 터. 하지만 눈으로 애타게 물어봤자 전달될 리 없었다.
그런데 그는 꼭 알아본 것처럼 슬쩍 고개를 저었다. 그와 함께 로만의 눈에 찰나 스쳐 간 감정에 나는 더 혼란스러워졌다.
연민? 아니면 애도? 뭐지? 그 눈빛은 뭔가요!
그를 붙들고 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실행에 옮길 정도로 정신이 없진 않았다는 게 그나마 다행일까.
할 수 있는 건 초조한 눈빛으로 그를 좇는 것밖에 없었다.
“뭐지?”
정신이 반쯤은 나가 있는 상황이었던 모양이다. 로만을 보느라 레이넌에게서 등을 돌리고 있었다니.
차가운 레이넌의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재빨리 몸을 돌리자 두 손으로 깍지를 끼고 턱을 괸 그가 눈에 들어왔다.
“오늘은…….”
목소리 끝이 살짝 떨려 온 걸 부디 눈치채지 않았으면 했다. 침을 꿀꺽 삼키는 그 짧은 시간을 기다리지 못한 레이넌이 되물었다.
“오늘은?”
“에드윈 님께서 처음으로 공작님께 쓴 카드를 드리고 싶다고 해서 함께 왔습니다.”
“카드?”
“네. 그리고 쿠키도 구워 봤는데 드셔 보시죠.”
미리 할 말을 생각해 둔 덕에 더듬는 불상사는 없었다. 그 덕에 목소리가 떨려도 크게 티가 나지 않았을 것 같았다.
속으로 숨을 삼키며 에드윈의 손을 살짝 앞으로 끌었다.
금세 떨어져 나갈 줄 알았던 손은 여전히 내 손을 꼭 붙들고 있었다. 나를 올려다보던 에드윈에게 작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이것만으로도 그를 응원한다는 마음이 전달될 터였으니.
역시나 에드윈은 말로 하지 않아도 알아들었는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법 비장한 표정으로 걸음을 옮기는 그의 뒷모습은 꽤 늠름하고도 귀여웠다.
손을 뻗어도 레이넌에게 닿기는커녕 가까이 가지도 못하자 에드윈이 잠시 당황한 듯했다.
“제가 만든 카드와 쿠키예요.”
울상을 하고도 에드윈은 또박또박 말했다. 공중에 뜬 에드윈의 손을 지켜보던 레이넌이 팔을 뻗었다.
별말 없이 받아 든 레이넌은 잠시 아무 표정 없이 카드와 쿠키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럼 나가 보겠습니다.”
뭐라 말하기 전에 얼른 자리를 떠나야지. 에드윈 역시 같은 생각이었던 듯 집무실을 나서는 우리 두 사람의 움직임은 다른 어느 때보다 깔끔하고도 재빨랐다.
집무실을 나오고서는 에드윈도, 나도 아무 말 없이 걷기만 했다.
에드윈의 침실이 이렇게 멀었던가. 심리적 부담감만큼 멀게 느껴지던 침실에 도착하고 방문을 닫자마자 크게 숨을 내쉬었다.
문을 등지고 있던 에드윈 역시 안도한 얼굴로 숨을 고르고 있었다.
“받아 주셨네요.”
“응. 되게 떨렸는데 아버지가 좋아해서 다행이야.”
“그래요?”
좋아했나? 레이넌의 반응을 되짚어 봐도 나로서는 전혀 알 수 없는 말이었다. 되레 다른 때보다 더 무표정했던 것 같은데.
하긴, 평소엔 차갑게 웃었고, 오늘은 표정이 없었으니 다른 때에 비해 좋아한 것일 수도.
“사실 비밀인데…….”
침실에는 둘뿐이었지만 에드윈은 잔뜩 목소리를 죽였다. 까치발을 하고서는 손짓까지 하길래 그의 뜻대로 허리를 낮췄다.
“아버지는 원래 귀찮게 하는 거 엄청나게 싫어하는데.”
“……그래요?”
아까 내가 놓쳐 버린 게 인생 연장의 유일한 기회였으면 어쩌지?
손끝이 차게 식고 저렸다. 피가 제대로 통하지 않는 기분이 들어 손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에린? 에드윈도 세실과 같은 의견인 듯해. 어떻게 된 거니?
당장 에린을 찾아가야 했다. 정말 레이넌의 눈에 많이 띄는 게 좋은 건지 다시금 그녀에게 확인을 해야할 것 같았다.
순간 머릿속을 채운 생각에 에드윈도 잠시 잊은 상태였다. 나는 그를 향해 숙였던 몸을 일으켜 세웠다.
“르네?”
에드윈은 굳어 버린 나를 보고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아버지가 많이 무섭지? 이제 쉬어도 돼.”
내가 왜 그러는지 스스로 답을 찾아낸 에드윈은 내 손을 끌었다.
그의 짐작과는 다른 방향이었지만 결국은 맞는 말이긴 하다.
“아니에요. 그래도 그간 에드윈 님의 이야기를 할 때마다 끝까지 잘 들어 주시던걸요.”
“그……래?”
“네. 그냥 조금 긴장이 된 것뿐이랍니다.”
에린은 나중에 찾아가야지. 여기서 이렇게 나가 버리면 티도 못 내고 에드윈이 혼자 속으로 끙끙 앓을 것이 분명했다.
“좋아하실까?”
계속 묻고 싶었던 질문이었을지도. 그의 마음을 알 것 같아 나는 더 밝게 대답했다.
“그럼요. 카드도, 쿠키도 정말 잘 만드셨잖아요. 기뻐하실 거예요.”
“그런데 쿠키…… 정말 괜찮을까?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짓을 했다고 화내면 어쩌지?”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짓이라니. 도대체 저런 말은 누가 가르쳐 준 거야.
에드윈은 종종 나이답지 않은 어휘로 나를 놀라게 하고는 했다. 하지만에드윈이 이런 불필요한 감정까지 알고 있는 모습을 보일 때면 어쩔 수 없이 마음이 짠해졌다.
“그럴 리가요. 원래 부모는 아이가 부모를 위해 뭔가를 만들면 그게 뭐든 기뻐한댔어요.”
“정말?”
상식적인 답을 내어놓았을 뿐인데 에드윈은 여전히 불안한 눈을 했다.
“그럼요. 제 부모님도 예전에 제가 종이꽃을 드렸을 때 뭐 이렇게 쓸데없는 짓을 했냐고 뭐라 하셨는데요, 제가 만든 종이꽃을 온종일 가슴에 꽂고 계셨다니까요.”
과장 섞인 목소리로 크게 손짓하며 말하자 그제야 에드윈은 조금은 안심한 기색을 보였다.
그때였다. 침실 문이 벌컥 열렸다.
꽤 소란스럽게 등장한 이는 다름 아닌 레이넌이었다.
“공작님?”
그가 왜 여기에?
의아한 건 에드윈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얼떨떨하게 눈만 깜빡이고 있자 레이넌은 나와 에드윈을 번갈아 바라봤다.
곧 망설임 없이 성큼성큼 걸음을 옮긴 그는 손에 든 것을 보이며 물었다.
“이게…… 도대체 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