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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를 잘 키워보려고 했을 뿐인데 (5)화 (5/129)

“그러니까 공작님께 잘 보이고 싶다는 말이야?”

놀란 듯 소리를 내지른 에린 덕분에 주변의 시선이 한데 모여들었다. 나는 귀를 쫑긋 세우며 집중되는 사람들의 관심에 당황했다.

놀라 새빨개진 얼굴로 그녀를 얼른 구석진 곳으로 데려갔다. 하지만 에린은 멍한 얼굴을 할 뿐 좀처럼 그 자리에서 움직일 생각을 않았다.

얼마나 힘겹게 그녀를 끌었던지 사람들이 잘 지나지 않는 곳에 겨우 도착했을 땐 땀투성이가 되었다.

“그러니까 공작님이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을 묻는 이유가 뭐야? 잘 보이고 싶다는 거 아냐?”

“으응? 따지고 보면 그렇지?”

어색한 내 얼굴을 보는 에린의 눈이 일순 날카로워졌다. 왜 그러냐고 물으려는 그때, 그녀는 언제나처럼 생긋 웃는 얼굴로 고민에 빠졌다.

“그러니까 공작님 눈에 들고 싶다…….”

“눈에 들지 않아도 돼. 그냥 좋은 인상 정도라도 남기고 싶어.”

정확하게는 내가 아니라 에드윈에게 좋은 인상을 느꼈으면 좋겠는데.

이런저런 소문에 귀가 밝은 에린이라면 뭔가 알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초조한 얼굴로 그녀의 입만 바라보고 있자 곧 에린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최대한 눈에 많이 뜨이는 게 좋겠지?”

“오히려 싫어하지 않으실까?”

잠시 마주했던 레이넌의 눈을 떠올린 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알 수 없는 한기가 느껴진 탓이었다.

그의 눈에 띄기 위해서 알짱거린다니……. 괜찮은 건가, 그거?

그대로 아무도 모르게 끌려갈 것만 같은데.

불안한 눈으로 에린을 바라보자 그녀는 눈을 곱게 접었다.

“아니야. 그렇게 보이셔도 은근 좋아하신대. 로만 님이 그렇게 그 자리까지 올라가셨다던데?”

“로만 님이?”

레이넌의 보좌관인 로만의 이름이 들리자 신뢰도가 급격히 올라갔다. 그는 로에리안 공작가에서 성공의 척도로 불리는 남자가 아닌가.

로만에 대해 알려진 건 별로 없었다. 출신도, 배경도, 어떻게 레이넌과 만나서 연을 맺게 됐는지조차.

어느 날 레이넌의 보좌관의 자리를 꿰찬 그에게 많은 불신과 소문이 뒤따랐지만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일 처리 하나만큼은 아주 깔끔하고 완벽했기 때문이었다.

그 일 처리가 물론 정상적이고 신사적인 방법으로만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과 그래서 그를 신뢰할 수 없다는 게 그의 단점이었다.

보통 사람들이야 그렇게 생각하지만 레이넌도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로만이 어떤 사람인지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 보였다.

그런 로만이 레이넌의 눈앞에 알짱거려서 그 자리를 얻었다고?

올라갔던 신뢰도가 한순간에 다시 바닥으로 내리꽂혔다.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그건 아닌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다들 공작님의 보이는 면만 보고 지레 겁먹어서 그러는 거야. 나도 힘들게 얻은 정보니까 어디 가서 얘기하면 안 돼.”

목소리를 낮춰 말하는 에린의 얼굴은 진지하기 그지없었다.

“응. 알았어. 고마워.”

불과 얼마 전에 보이는 것에 현혹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놓고…….

잠시 반성의 마음이 일었지만 아주 찰나였다.

아니, 무서운 걸 어떻게 해. 이제 또 찾아뵙는 일 없기를 바란다고 생각한 것도 진심이었는데…….

그의 눈에 자꾸 보이려 노력해야 한다니.

앞으로 레이넌과 마주치는 일을 최대한 피하고 싶었던 내게는 너무도 어려운 충고였다.

그런 내 속을 알 리 없는 에린은 그저 싱글벙글 웃을 뿐이었다. 그녀를 따라 웃는 내 얼굴은 보지 않아도 훤했다.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매우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

포기할까. 아니, 에드윈을 위해 눈 한 번 딱 감고 해 보자.

상반된 마음이 힘겹게 싸우는 나날이었다. 하지만 걱정했던 것과 달리 레이넌에게 눈도장 찍는 건 수월하게 잘 진행이 됐다.

그의 작은 손짓 하나에도 깜짝 놀라는 내 심장이 어디까지 버텨 낼 수 있을지가 관건이었다.

아직도 레이넌이 슬쩍 움직이기만 해도 움찔 놀라는데 처음엔 오죽했을까.

심장이 미친 듯이 뛰다 못해 입으로 튀어나오는 건 아닌지 걱정했던 그날이 떠올랐다.

며칠간 고민한 결과였다.

레이넌이 지나갈 만한 길에서 기다렸다가 그의 앞을 막아서자고. 아주 자연스럽게.

그와 마주치는 순간을 머릿속으로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상상했다. 어떤 상황에서든 당황하지 않을 수 있게.

“조, 좋은 오후입니다, 공작님.”

덕분에 그에게 간단한 인사를 하고 자리를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앞을 막은 아주 짧은 순간 얼마나 무서웠던지.

그대로 누군가가 나타나서 어딘가 음습하고도 어두운 곳으로 나를 끌고 갈 것만 같았다.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게 우연을 가장한 만남을 몇 번 만든 후에는 그의 집무실을 직접 찾아가기 시작했다.

“에드윈 님이 요즘 말이 무척 늘었습니다. 발음도 명확해졌고요.”

내 말에 바삐 움직이던 레이넌의 손이 멈췄다. 천천히 고개를 든 그가 물었다.

“용건이라는 게 그거였나?”

“네. 아무래도 궁금하시지 않을까 싶어서…….”

그는 들고 있던 펜을 내려놓고 나를 한참을 가만히 바라봤다. 의미를 알 수 없는 집요한 시선에 괜히 몸이 떨려 왔다.

갑작스럽게 밀려드는 겁을 잊기 위해서 애써 웃었다. 레이넌은 내 미소를 보며 아주 살짝이지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삐뚤게 올라간 그의 입매를 보고 문득 깨달음을 얻었다.

어색한 부자 사이를 중재하려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래서였나 보다.

말없이도 사람을 휘어잡는 그의 위압감은 보통 사람에게는 아주 부담스러운 것이었다.

아주 잠깐 나도 포기하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고민에 빠져들려고 할 때, 레이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가 봐.”

“알겠습니다.”

레이넌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나는 그의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참았던 숨을 몰아쉬며 나는 스스로를 다독였다.

“아주 자연스러웠어. 차근차근 잘 진행이 되고 있다고.”

그에게 눈도장을 찍는 내 계획에 날개를 달아 주는 것이 바로 에드윈이었다.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점점 더 사랑스러워지는 에드윈 덕분에 레이넌에게 당당하게 할 수 있는 말이 늘어난 것이었다.

“나는 르네가 제일 좋아. 르네도 나 좋아해?”

“커서 르네랑 결혼할 거야.”

“피곤해? 피곤하면 쉬어도 돼. 나는 혼자서 잘 놀 수 있어.”

“르네랑 케이크 나눠 먹을래.”

처음 만났을 때의 어눌한 말투는 어느새 사라진 상태였다. 아이가 앳된 목소리로 이렇게 예쁜 말들을 건네니 그를 위해서라도 포기하지 않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아무리 레이넌이라고 해도 딱 그 나이 때의 아이 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배려 깊은 에드윈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놀라지 않을 리가 없었다.

기왕이면 감동도 받고, 애정도 주고 또…….

사이도 좋아지면 좋겠는데.

생글생글 웃는 와중에도 종종 시무룩한 얼굴을 하거나 눈치를 보는 에드윈을 떠올리자 마음이 무거워졌다.

레이넌과 조금이라도 애착 관계가 생겨나면 에드윈도 덜 불안할 텐데. 그러면 사람을 죽이겠다고 날뛰는 일도 안 할 테고, 내 미래도 훨씬 안락할 텐데.

나는 화들짝 놀라서 고개를 저었다. 에드윈이 나를 죽인다니. 이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내 미래는 충분히 밝아져 있었다. 물론 레이넌과 에드윈의 관계가 좋게 발전하려는 징조도 보였다.

레이넌은 내가 그의 앞에 나타날 때면 차가운 낯을 하고서도 내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 주곤 했다. 가끔은 그 이상의 이야기가 궁금한지 의아한 눈빛을 보내기도 했다.

이제 에드윈에 대한 관심은 물론 궁금증까지 생겨난 것이 분명했다.

에린에게 정보를 처음 들었을 때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꽤 정확한 정보였던 모양이다.

“르네.”

혼자 생각에 빠져 있느라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팔을 붙드는 손에 화들짝 놀라자 상대방은 더 놀란 듯 보였다.

“세실?”

“잘 만났다. 그렇지 않아도 할 말이 있었는데.”

“나한테?”

꽤 냉소적인 그녀를 다들 어려워하긴 했지만, 나에겐 그럴 틈도 없었다. 딱히 마주칠 만한 일이 없었으니까.

그런 그녀가 나를 이렇게 붙들고 할 말이 있다니.

“너에 대해 지금 무슨 이야기가 도는지 알아?”

“나?”

“공작님 손에 기어이 죽고 싶은 거냐고 다들 수군거리고 있어.”

“내가?”

이게 무슨 날벼락 같은 말인가. 놀라서 절로 목소리가 높아졌다. 내 반응에 세실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공작님이랑 어떻게 해 보고 싶은 거라면 그 방법은 아주 많이 잘못된 거야. 최악이지.”

“최, 최악?”

“지금이라도 최대한 공작님 눈에 안 띄게 조심해. 귀찮은 거 제일 싫어하시는 분이니까.”

할 말은 마쳤다는 듯 세실은 미련 없이 자리를 떠났다. 고요한 복도가 오늘따라 스산하게 느껴졌다.

“뭐, 뭐가 맞는 거야?”

전혀 다른 방향의 갈림길 중에 내가 선택한 길은 어디로 향하는가.

아니, 이미 출발해 버렸는데? 이 길이 아니면 되돌아갈 수는 있을까? 그것도 살아서?

혼란이 커질수록 온몸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

에드윈의 보모는 참으로 이상한 여자였다.

공작저에서 불필요하게 레이넌의 근처를 얼씬거리지 않는 게 제 신상에 좋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아직도 있단 말인가.

적어도 르네만큼은 그 사실을 모르는 게 분명했다. 언젠가부터 레이넌의 곁에 불쑥 나타나기 시작한 그녀의 방문은 점점 주기가 짧아지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매몰차게 내보냈을 테지만 이상하게 르네에게는 그게 쉽지 않았다.

뭔가 말려드는 느낌이랄까. 한순간에 팔랑팔랑 시야에 들어와서는 뭔가를 이야기하는 그녀의 표정과 손짓은 분주하기 그지없었다.

조그만 게 혼자 바쁘게 움직이는 걸 저도 모르게 넋 놓고 보고 있게 되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용무는 끝났는지 나타났던 것처럼 또다시 팔랑팔랑 사라졌다.

문제는 그녀가 풀어놓고 가는 이야기는 늘 아주 사소하고도 별것 아니라는 점이었고, 더 큰 문제는 그걸 아주 대단한 일인 양 이야기한다는 점이었다.

“하여간 이상하다니까.”

“르네를 말씀하십니까?”

입 밖으로 흘러나온 작은 혼잣말을 어떻게 들었는지 로만이 기다렸다는 듯이 되물었다.

그건 또 어떻게 알았나 싶어 바라보자 당연하다는 듯한 얼굴로 로만이 대답했다.

“요즘 이상한 게 르네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도 그렇군.”

로만의 눈에도 이상해 보일 정도면 꽤 이상한 게 맞는 모양이었다.

“치울까요?”

“내버려 둬.”

기계적으로 물었지만, 뜻밖의 답이 들려오자 로만은 놀란 눈으로 레이넌을 바라봤다.

“왜?”

“아니, 꽤 귀엽게 봐 주시는가 봅니다.”

놀리는 건지 진심인지 알 수 없는 그의 말에 레이넌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조차 꽤 서늘한 기운을 품고 있었지만 로만은 익숙한 듯 덩달아 미소를 보였다.

“에드윈이 사람을 저렇게 따르는 건 처음 보지 않나?”

“아, 그것도 그렇군요. 꽤 예민한 편이신데.”

사람을 좋아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예민하고도 까탈스러운 에드윈을 떠올린 로만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짧은 시일 내에 에드윈이 저렇게나 마음을 내어준 건 르네가 유일했다.

정작 르네는 그걸 모르는 것 같았지만.

“저보다 더 좋아하시는 것 같습니다.”

“얄미운 소리만 골라 하는 너보다야 훨씬 낫겠지.”

“애정이 담긴 말을 너무 곡해하십니다.”

로만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제 억울함을 토로했다. 레이넌은 그런 로만은 쳐다보지도 않고 짧게 말했다.

“대신 뒷조사나 해 두지.”

“알겠습니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다른 때보다는 머뭇거림이 느껴지는 소리에 레이넌은 고개를 들었다.

“또 왔나 보군요.”

로만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난감한 얼굴을 한 시종이 집무실로 들어섰다.

“공작님.”

“들어오라고 해.”

시종이 채 말을 꺼내기도 전에 레이넌은 답을 주었다. 그가 언제쯤 화를 낼까 두려움에 휩싸여 있던 시종은 재빨리 집무실을 벗어났다.

“너는 나가 보고.”

르네가 들어오더라도 그 자리를 지킬 기세인 로만에게 말하자 그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였다.

뭔가 심술궂은 생각을 하는 것이 분명한 그의 얼굴을 본 레이넌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것만으로도 로만은 그의 뜻을 알 것이었다.

로만이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그때,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분홍색 머리칼의 여인이 문을 열고 들어섰다.

오늘은 그녀 혼자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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