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잘 다루는군.”
치, 칭찬인가? 차갑기 그지없는 목소리에 잠시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몇 번을 곱씹어 봐도 내용은 칭찬인 듯 들렸다.
슬쩍 입꼬리가 올라가려던 그때, 레이넌과 눈이 마주쳤다.
칭찬이 아니라, 그래서 마음에 안 든다는 걸까?
이쪽이 훨씬 그럴싸했다. 서늘하다 못해 오싹할 정도로 날카로운 눈빛은 그 말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게 만들었다.
당황이 역력히 묻어났을 것이 분명한 눈으로 나는 급하게 캐서린을 돌아봤다. 그녀라면 레이넌의 뜻을 알고 있을 것이 분명했으니까.
하지만 캐서린은 내게 전혀 시선을 두고 있지 않았다. 레이넌을 바라보며 제가 칭찬이라도 받은 양 흐뭇한 얼굴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칭찬이 맞았던 모양이었다. 캐서린의 얼굴에서 답을 찾은 나는 얼떨떨한 얼굴로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뭐야. 왜 칭찬을 이렇게 살벌하게 하는 거야. 목소리에 담긴 음산한 기운은 또 뭐고.
“성실한 데다가 일도 잘하는 아이이니 에드윈 님을 모시는 데 크게 부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레이넌은 캐서린의 말이 이어지는 내내 찌를 듯한 눈빛을 보냈다. 온몸이 따끔거리다 못해 고슴도치로 변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 그때 그는 한순간에 시선을 거둬들였다.
“캐서린이 칭찬할 정도면 충분하겠지.”
시큰둥한 목소리로 말한 레이넌은 다시 서류에 집중했다.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그의 단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고 있겠지만 에드윈 관련해서 귀찮게 하는 일 없게 하도록.”
쳐다보지도 않고 내뱉은 말은 다른 사람에게로 향한 것 같기도 했다.
나는 그대로 얼음처럼 굳어 눈만 깜빡였다.
제대로 들은 것이 맞나 의심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집무실에 들어오고 내내 그랬듯이.
이럴 땐 역시…….
캐서린이지. 눈을 슬쩍 굴려 캐서린을 바라보자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내가 그녀를 찾은 이유를 알아챈 듯 캐서린은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대로 들은 게 맞단 말이야?
귀찮게 하는 일이 없게 하라니. 아무리 그래도 당신 아들에 관한 일인데요?
그때였다. 캐서린이 슬쩍 한쪽을 향해 눈짓했다. 그쪽을 얼른 바라보라는 듯이.
어쩐지 서늘한 기운이 몰려오는 것 같았다. 그녀가 말한 방향으로 삐걱대는 고개를 천천히 돌리던 나는 그대로 굳었다.
책상을 톡톡 치는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눈이 마주친 순간 레이넌은 다시 한번 손가락을 튕겼다.
한쪽 손에 얼굴을 기댄 채 그는 무심히 손가락을 움직였고, 책상과 손가락이 만들어 내는 작은 소음이 들릴 때마다 나도 모르게 몸이 움찔거렸다.
횟수가 늘어날수록 레이넌의 얼굴에는 미소가, 눈에는 흥미가 고여 들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
그의 물음에 나는 힘차게 고개를 저었다. 문제가 있으면 큰일 날 것 같았다. 있어도 없다고 대답해야 할 때였다.
“아닙니다. 워낙 사랑스러우시고 총명하셔서 문제가 될 만한 일은 전혀 없습니다.”
어쩐지 비장하게까지 들리는 내 말에 그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사랑? 총명?”
내 말을 곱씹듯 읊조리는 그의 목소리에 얼음물이 온몸에 쏟아져 내리는 느낌이 들었다.
이 오싹한 기분은 뭘까. 혹시 무슨 말실수라도 했나?
되짚어 보고 싶어도 그럴 만한 건 없었다. 내가 한 말은 아주 짧았으니까.
무엇보다 거짓말이나 과장은 전혀 없었다. 에드윈은 정말 사랑스럽고 총명하였으니.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나직한 목소리가 공기를 울렸다. 물기를 머금은 입술이 천천히 움직이자 나도 모르게 넋을 놓고 그를 바라봤다.
그런데 왜 저렇게 음산하게 웃는 거야.
이제는 정말 나가고 싶다. 그의 시선 밖으로 벗어날 수 있다면 어디라도 갈 수 있었다.
여러모로 심장에 안 좋은 남자였다. 이대로 조금만 더 있다가는 울면서 매달릴 것만 같았다. 뭔지 모르겠지만 잘못했다고.
“그럼 그렇게 알고 있지. 나가 봐.”
간절한 내 마음을 읽은 것 같은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내 몸은 이미 90도로 꺾여 있었다.
“나가 보겠습니다.”
‘이제 웬만하면 찾아뵙고 싶지 않습니다.’라는 속마음을 숨기고 얼른 몸을 움직였다.
들어올 때처럼 오른손과 오른발이 함께 움직였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드디어 그의 시야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으니까.
레이넌의 집무실을 벗어나자마자 큰 숨이 터져 나왔다. 저 안에서는 제대로 숨도 쉬지 못했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이제야 겨우 몸 안으로 공기가 들어오는 것 같았다.
“르네?”
두 손을 가슴에 올리고 숨을 고르고 있을 때,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의 주인은 초조한 얼굴을 한 에드윈이었다.
“에드윈 님?”
내 부름을 들은 그는 울 듯한 얼굴로 뛰었다. 곧장 품에 안길 것처럼 저돌적으로 달려오던 에드윈은 정작 나를 바로 앞에 두고는 급하게 멈춰 섰다.
걱정스러운 마음을 숨기지 못하면서도 내 눈치를 살피는 그의 모습에 마음이 아렸다.
“왜 아직 여기 계세요?”
“괜찮아?”
“네?”
“아니…….”
무엇을 묻는지 알지 못해 되묻자 에드윈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면서 머뭇거렸다.
짧고 통통한 손가락이 서로 엉겨드는 게 귀여워서 흐뭇하게 보고 있으니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혼났어?”
레이넌이 풍기는 분위기 때문에 에드윈은 늘 그에게 혼나는 것처럼 느꼈던 걸까.
스르륵 닫히던 집무실의 문틈 사이로 보였던 레이넌의 책상이 떠올랐다. 정확하게는 넓고 삭막한 책상 한구석에 놓여 있던 에드윈의 장미가.
제가 직접 만든 선물이라며 머뭇거리면서 내밀던 작은 손도, 풀 죽어 눈치를 보던 빵실한 얼굴도.
또한 힘껏 붙들어 오던 미약하고도 따스한 손의 온기도 함께 되살아났다.
안쓰러우면서도 기특한 아이였다. 저처럼 나도 혼났을까 봐 걱정된 모양이었다.
역시나 아까 레이넌에게 한 말에 실수라고 여길 만한 부분은 없었다. 이렇게나 사랑스러운 아이인데.
“캐서린에게 줄 선물은 아직 안 접으셨죠? 같이 가서 접어 볼까요?”
활짝 웃으며 말하자 에드윈의 얼굴에도 조금씩 웃음이 떠올랐다. 화사하게 웃은 에드윈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웃기는 했지만 곧 에드윈은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걸었다. 침실로 돌아가는 길 내내 나는 그런 에드윈을 달랠 방법을 고민했다.
침실에 도착할 때까지도 특별한 방법을 찾지 못했지만, 뜻밖에도 고민은 쉽게 해결됐다.
아이는 아이인 모양이었다. 언제 그랬냐는 듯 종이접기에 빠진 에드윈을 보니 나 역시 긴장은 씻은 듯 사라지고 마음이 편해졌다.
닮은 구석이라고는 전혀 없는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닮았단 말이지.
마음이 진정된 덕일까. 정작 눈앞에 두었던 그때보다 더 선명히 레이넌의 얼굴이 떠올랐다.
공들여 깎아 놓은 듯한 미남인 레이넌과 동글동글 귀여운 에드윈은 얼핏 보면 전혀 닮은 듯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하나하나 잘 떼어서 보면 닮았다. 그렇다면 역시나 가장 둘을 달리 보이게 하는 건 분위기일지도 모른다.
냉기를 품은 겨울바람과 같은 레이넌과 공기 중에서 통통 튀는 봄 햇살 같은 에드윈은 너무 다른 느낌이었으니까.
에드윈이 만약 소설에서 묘사된 대로 컸다면 레이넌과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게 될까.
모두 에드윈이 레이넌의 아들이라고 알고 있었지만 정확하게 그들은 삼촌과 조카 관계였다.
요절한 형의 아들이 에드윈이었다.
“어? 이상한데? 왜 처음부터 레이넌의 아들로 키웠지?”
그들의 공통점을 찾던 그때 문득 소설 속 구절이 떠올랐다.
에드윈은 태어날 때부터 레이넌의 아들로 알려졌다. 그때는 그의 형이 차기 공작의 자리를 공고히 지키고 있을 때였다.
결혼은커녕 약혼도 하지 않았던 레이넌의 아들이 갑자기 나타난 탓에 꽤 시끄러웠다고도 했다.
이미 시간은 꽤 흘렀지만, 에드윈과 관련된 여러 억측은 여전히 레이넌의 곁을 맴돌았다.
추문을 무릅쓰고라도 그래야 했던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일까.
“그래. 이유가 있었는데…….”
왜 그래야 했지?
나는 희미한 기억을 더듬기 시작했다.
분명 그 이유가 소설 속에 짧게 나왔었다. 스치듯 짧게 지나간 이유 때문에 후에 큰일이 생겼는데 그게 뭐였더라.
“우와! 르네, 엄청나게 잘한다!”
잔뜩 신이 난 에드윈의 목소리에 되짚어 가던 기억은 한순간에 공기 중에 흩어졌다.
“이건 무슨 새야?”
에드윈의 옆에서 생각에 잠긴 사이에 나도 모르게 손을 움직인 모양이었다.
나도 할 수 있는 쉬운 종이접기 두 가지 중 하나였다. 하지만 학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난감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이던 나는 설명은 포기하고 대신 에드윈에게 물었다.
“같이 접어 보실래요?”
“응. 나도 해 볼래!”
신나서 내 옆에 털썩 앉은 에드윈 덕분에 뭐라고 하면 좋을지 고민할 시간을 벌었다. 백조라고 할까.
얼마 지나지 않아 신이 났던 에드윈은 울상이 되었다.
이게…… 여섯 살이 접기엔 어렵지. 미안하다.
“나도 잘하고 싶은데…….”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서도 에드윈은 끝내 포기하지는 않았다. 그런 그에게 네가 접기엔 어렵다는 말을 할 수 없었던 나는 대신 다른 방법을 찾았다.
“아! 이거보다 더 멋진 새가 있어요. 날려 볼 수도 있는데, 그걸 접어 볼까요?”
몇 번 접는 것만으로도 금세 접히는 그것. 나도 접을 수 있는 두 가지 중 나머지 하나였다.
“응! 접어 볼래!”
의욕을 보이는 에드윈을 보며 나는 웃으며 새로운 종이를 집어 들었다. 에드윈은 행여 놓칠세라 눈도 깜빡이지 않고 내 손을 바라봤다.
“처음엔 여기 모서리를 맞춰서 이렇게 접으세요.”
“이, 이렇게?”
“네. 그리고 다음은…….”
역시나 에드윈도 쉽게 따라 접을 수 있었다. 한 번, 한 번 종이를 접을 때마다 그의 얼굴은 활짝 피어났다.
“독수리랍니다.”
뿌듯한 얼굴로 비행기, 아니 독수리를 손에 든 에드윈에게 말했다.
“저보다 훨씬 잘 접으셨어요! 와! 에드윈 님의 비, 아니 독수리가 훨씬 멀리 날아가겠어요!”
호들갑을 떨며 말하자 에드윈은 가슴을 잔뜩 앞으로 내밀었다. 내가 말한 대로 종이 독수리가 팔랑팔랑 날자 에드윈은 잔뜩 신이 난 얼굴을 했다.
한참 그 자리에 앉아 독수리를 접고, 또 날리던 에드윈은 흥분이 채 가시지 않은 얼굴로 내게 물었다.
“이것도 아버지한테 선물하면 좋아할까?”
목소리 끝에 묻어난 옅은 떨림이 에드윈의 목소리가 옅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몸을 낮춰 에드윈과 눈을 맞췄다.
“그럼요. 좋아하실 거예요. 다른 것도 조금 더 연습해서 함께 선물하면 어떨까요?”
“그게 좋을까?”
“깜짝 놀라실 거예요!”
주먹을 불끈 쥐고 조금 전보다 더 꼼꼼히 종이를 접기 시작하는 에드윈을 보니 마음 깊숙한 곳에 묻어 두었던 측은지심, 혹은 오지랖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계속 다가가면 지금보다 조금은 가까워질 수 있지 않을까. 에드윈이 이렇게 눈치 보지 않을 정도만이라도.
일단 레이넌이 에드윈을 싫어하는 건 아니지 않은가. 어쨌거나 에드윈의 이야기를 하며 웃기도 했고, 에드윈을 돌볼 나랑 굳이 면담도 하고?
그러고 보니 에드윈의 선물에 고맙다고 제대로 감사 인사도 전하지 않았던가.
보이는 것에 현혹되었던 것일지도 몰랐다. 두 사람의 사이가 좋아질 가능성이 없다고 단정 지을 필요도 없었다.
아니, 꽤 괜찮은 생각이잖아?
그렇게 나는 그의 앞에서 덜덜 떨었던 내 모습을 홀라당 잊고 무모한 결심을 품고야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