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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를 잘 키워보려고 했을 뿐인데 (3)화 (3/129)

“들어와.”

두꺼운 나무 문을 타고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멀리서 들려오는 것같이 작은 소리였지만 온몸에는 긴장이 퍼졌다.

캐서린을 따라 움직이는 내 몸은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슬쩍 아래를 내려다보니 오른손과 오른발이 함께 나가고 있었다.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몸이야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니 표정이라도 어떻게든 해야 했다. 애써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집무실에 들어섰다.

커다란 책상 양쪽에는 서류가 높이 쌓여 있었고, 그 사이에 그가 있었다.

레이넌 로에리안 공작. 본디 공작 위를 이을 이는 아니었지만, 공작가에 불현듯 찾아든 불행으로 인해 운명이 뒤바뀐 남자였다.

분명 사람이 들어온 것을 알고 있었을 텐데도 그는 고개를 들지도, 시선을 보내지도 않았다.

캐서린은 익숙한 듯 책상 앞에 서서 두 손을 모으고 곧게 섰다. 나 역시 머뭇거리며 그녀의 뒤에 자리를 잡았다.

걸음을 멈춘 순간 손을 채웠던 온기가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에드윈 역시 잔뜩 긴장한 얼굴로 양손을 다리에 붙이고 딱딱하게 서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집무실에 들어온 세 사람이 움직임을 멈추고도 한동안 펜이 종이 위를 지나가는 소리만 공간을 채웠다.

공기마저 얼어붙은 듯한 분위기 때문일까. 사각거리는 소리는 아주 작았으나 무척 날카롭고 은밀하게 칼을 가는 소리처럼 귓가에 닿았다.

괜히 오싹한 기분이 들어서 나도 모르게 몸이 움츠러들었다.

문득 스커트를 잡아당기는 느낌이 들어 시선을 옮겼다. 에드윈이 잔뜩 굳은 얼굴로 내 스커트를 꼭 붙들고 있었다.

아마 저도 모르는 사이에 그랬던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에드윈은 내 존재도 잊은 듯 보였다.

바닥과 레이넌을 오가는 에드윈의 시선은 조심스럽지만 무척 분주했다.

스커트를 붙든 작은 손을 떼어 내자 에드윈은 화들짝 놀라 나를 올려다보았다. 금세 얼굴이 울상이 되는 것을 보니 아마 실수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나는 그에게 괜찮다고 말하는 대신에 손을 붙들어 주며 작게 미소 지었다.

그것만으로도 내 뜻이 충분히 전달된 걸까.

에드윈의 얼굴이 조금은 편해졌다. 잠시 맞잡은 손을 내려다보던 에드윈은 곧 언제나처럼 환하게 웃으며 나를 바라봤다.

그렇게 서로 마주 보며 미소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탁.

펜을 내려놓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에드윈은 작게 몸을 움찔 떨었다.

고개를 들어 레이넌을 바라보던 나 역시 에드윈과 다르지 않았다. 언제 고개를 들었는지 레이넌이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던 탓이었다.

그의 뒤에 있는 커튼 사이로 가늘게 빛이 흘러들어 왔다. 햇빛이 움직이자 그의 머리칼이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상쾌한 바람에 흩날리듯이.

반짝이는 은발 아래에는 단정한 얼굴이 자리하고 있었다. 둥글둥글한 에드윈과 달리 잘 깎아 내린 듯한 이목구비는 그야말로 잘생김 그 자체였다.

매끄럽게 내려오는 콧날을 따라 굳게 다문 입술을 바라볼 때였다. 천천히 그의 입술이 움직였다.

“테레스의 후임이라고?”

멍하니 레이넌의 얼굴을 바라보던 나는 화들짝 놀랐다. 나도 모르게 대놓고 그를 훑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레이넌의 보랏빛 눈동자에는 슬쩍 한심하다는 기색이 묻어났다.

“네. 르네라고 합니다. 얼마 전부터 에드윈 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인사를 하고 고개를 드니 레이넌이 몸을 천천히 의자에 묻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자세가 조금 바뀌었을 뿐인데 순식간에 묻어나는 나른한 분위기에 당황한 건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자세와 분위기는 바뀌었으나 그의 눈빛은 조금 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떤 감정도 읽을 수 없는 무심한 눈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공중에서 그와 나의 시선이 얽혀들었다.

그것만으로도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무엇이 담겨 있는지 알 수 없는 그의 짙은 눈빛이 내 몸을 칭칭 에워싸는 것만 같았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레이넌의 시선은 천천히 캐서린에게로 옮겨 갔다.

그제야 나도 모르게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리고 그때야 알아차렸다. 이제까지 제대로 숨조차 쉬지 못했다는 걸.

반대로 그의 눈빛에 조금 전의 나처럼 딱딱하게 굳어 버린 사람이 있었다. 바로 에드윈이었다.

에드윈의 손을 잡고 있다는 걸 잠시 잊고 있었다. 그 사실을 상기시켜 준 건 에드윈이었다.

손에 얼마나 힘을 줬는지 아이의 힘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아마 힘이 들어간 건 손만이 아니라 온몸일 터였다.

“에드윈은 왜 데려왔지?”

시큰둥한 레이넌의 질문에 캐서린은 잠시 당황했다. 곧 표정을 다잡고 나를 바라보자 레이넌의 시선 또한 나에게 와 닿았다.

“공작님께 드릴 선물이 있다고 합니다. 에드윈 님?”

나는 에드윈을 내려다보며 다른 때보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하지만 에드윈은 조금씩 걸음을 뒤로 옮겼다.

결국은 내 뒤로 숨은 모양새가 되자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레이넌은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아, 아버지.”

떨리는 목소리로 레이넌을 부르는 것까지는 성공했다. 하지만 그 이상은 용기가 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한 발짝도 앞으로 내딛지 못하고 에드윈은 그저 레이넌의 눈치만 볼 뿐이었다.

그를 응원하는 마음을 담아 에드윈의 손을 조금 더 힘을 주어 잡았다. 에드윈도 더 강하게 내 손을 붙들었지만 좀처럼 용기를 내지 못했다.

나야 얼마든지 에드윈을 기다릴 수 있었지만 과연 레이넌도 그러할까. 이렇게 머뭇거릴 기회를 주는 사람이던가.

혹시 당장이라도 차갑게 에드윈을 내보내지는 않을까, 싶어 걱정스러운 눈으로 레이넌을 바라봤다. 하지만 뜻밖에도 그는 조금 전과 비슷한 자세로 에드윈을 계속 쳐다보고만 있었다.

에드윈이 움직이지 않아도, 말을 하지 않아도 그는 말없이 시선만 보냈다. 마치 기다려 주는 것처럼 어떠한 재촉도 없이.

“에드윈 님?”

그렇다고는 하나 언제까지고 에드윈이 움직이길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레이넌의 인내심이 사라지면 어떤 반응이 나올지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고.

조심스러운 내 재촉을 들은 에드윈은 쭈뼛쭈뼛하며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갔다.

소중하게 들고 있던 종이를 책상 위에 올려놓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렸지만, 내 곁으로 돌아오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이건 뭐지?”

레이넌은 손을 뻗어 하얀 종이 뭉치를 집어 들었다. 선물이라는 말과 어울리지 않는 물건에 의문을 품은 듯했다.

“에드윈 님이 직접 접으신 장미입니다.”

내 설명에 종이 뭉치를 무심히 살펴보던 그가 멈칫했다. 곧 잔뜩 굳은 눈으로 되물었다.

“뭐라고?”

분명 제대로 들은 게 맞는데. 다시 대답해야 할까. 잠깐 사이에 큰 고민에 빠져들었다.

내 대답이 그를 화나게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조금은 충격받은 얼굴로 종이 뭉치를 이리저리 돌려 보던 그는 다시금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꼭 노려보는 것처럼 매서운 눈초리는 내게 큰 압박감을 가져다주었다.

“이게 뭐라고?”

“장……미입니다.”

“그럼 다른 손에 들린 그것도 장……미인가?”

“네. 제게도 선물해 주셨답니다.”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레이넌의 얼굴은 조금씩 심각해졌다. 살벌하게 보일 정도로 굳은 얼굴을 한 그를 보자 덜컥 겁이 일었다. 이럴 때 할 수 있는 대처는 딱 하나였다.

웃자.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댔으니까.

어색하게 입꼬리를 조금씩 끌어 올리자 그만큼 레이넌의 얼굴은 험악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밝은 미소를 보였을 때, 그는 그만큼 험악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웃는 얼굴에도 침을 뱉을 수 있겠는데?

순식간에 머릿속은 여러 가지 생각으로 가득 찼다. 도대체 내가 할 수 있었던 최선의 행동은 뭐였을까.

아무리 고민을 거듭해도 적절한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매섭게 쏘아 오는 눈빛을 받으며 차분히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적어도 나는 아니었다.

울고 싶은 마음을 애써 누르며 더 나은 대안을 찾기 시작했다.

장미 접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말해 볼까. 그게 아무래도 가장 좋은 대안이라는 판단을 내렸을 때였다.

“고……맙구나.”

어색한 인사가 레이넌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잘못 들었나. 긴장이 지나치면 그럴 수도 있지.

잠시 눈을 깜빡이던 나는 고개를 돌렸다. 에드윈 역시 얼떨떨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걸 보니 제대로 듣긴 했나 보다.

제대로 들었다고?

눈이 크게 뜨였다. 그와 동시에 조금 전까지 눈치를 보던 작은 아이의 얼굴에는 뿌듯한 감정이 퍼져 나갔다.

설레는 마음을 차마 숨기지 못하는 순진한 얼굴을 보니 나 역시 상황을 잊고 미소 짓게 되었다.

“에드윈은 그만 나가 보도록 해.”

레이넌은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냉정한 목소리로 딱 잘라 말했다. 에드윈은 대답하지 못하고 레이넌과 나를 번갈아 바라봤다.

나를 두고 나가는 것이 걱정된 것일까. 그의 시선은 꽤 오래 내게 머물렀다.

물론 에드윈의 걱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나 역시 에드윈을 레이넌 앞에 홀로 두고 나가야 한다면 쉽게 걸음을 떼지 못했을 테니까.

특히 레이넌을 직접 만나고 나니 더욱더 그랬다.

하지만 에드윈, 내가 너보다 낫지 않을까? 나도 무섭긴 하지만 일단은 어른이고…….

아, 나도 같이 나가고 싶다. 왜 나는 남아야 하나.

속으로 잠시 신세를 한탄하던 나는 자리를 피하고 싶다는 욕구를 꾹 누른 뒤 허리를 숙여 에드윈과 눈을 맞췄다.

“장미를 하나 더 접어서 캐서린에게도 선물하면 어떨까요?”

“캐서린에게?”

“네.”

에드윈은 솔깃한 얼굴로 캐서린을 바라봤다. 캐서린은 내 의도를 이해했는지 옅은 미소를 보이며 고개를 끄덕이곤 말했다.

“공작님도 받았고, 르네도 받았으니 저도 꼭 받고 싶습니다.”

“응. 캐서린에게도 선물할게.”

“기대하겠습니다.”

내용은 꽤 상냥했으나 목소리는 여전히 무미건조했다. 하지만 에드윈의 얼굴은 한결 밝아졌다.

언제 긴장했냐는 듯이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이자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종이 다가왔다.

그의 손을 잡고 에드윈이 집무실을 나가자 다시금 무거운 공기가 나를 짓눌렀다.

아니, 어쩌면 조금 전보다 더 삭막한 분위기일지도 몰랐다. 도대체 이런 분위기에서 숨은 어떻게 쉬어야 하는 걸까.

자연스러운 호흡에 대해 심각한 고민을 하는 내게 레이넌의 시선이 닿았다. 꽤 집요한 눈길은 나를 샅샅이 살피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시선은 느릿하게 움직였지만 그만큼 세밀하기도 했다.

레이넌의 눈길이 닿는 곳마다 힘이 들어가 쥐가 날 것만 같았다. 한참을 그렇게 탐색하듯 살피던 시선은 내 얼굴로 되돌아왔다.

이제 안 돼. 더는 표정을 가다듬을 수도 없었다.

표정 포장하기를 이젠 포기해야 하나 생각한 그때, 레이넌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혹시 웃는 건가.

어리둥절한 마음에 그저 눈만 깜빡이고 있자 그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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