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레스 님이 곧 공작저를 떠날 예정이시라는데?”
“그러면 에드윈 님은 누가 모시게 되는 거래?”
“그렇지 않아도 시녀장님이 차기 보모를 고르고 계시대.”
“시녀 중에서 지원받아서 고르시지 않을까?”
“설마 기대하는 거야? 너처럼 덜렁대는 애가 에드윈 님의 보모라니. 말이 되는 소리를 좀 해.”
들뜬 목소리와 웃음소리가 뒤섞여 여기저기에서 들려왔다. 자리를 피하고 싶었지만,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
어디를 가더라도 시녀들 사이에는 이 이야기가 최고의 화제였으니.
차라리 다른 생각을 하자. 다른 생각. 다른 생각…….
얼른 돈을 모아 공작저를 떠나자. 희망찬 미래를 떠올려 봤지만 나오는 건 한숨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악착같이 벌었지만, 지금까지 모인 돈은 목표 금액에 한참 모자랐다.
르네, 너는 왜 모아 둔 돈이 하나도 없는 거니. 이렇게나 월급을 많이 받는데. 게다가 부양할 가족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
“르네는 어때?”
마음속으로 르네를 원망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들려오는 친근한 목소리에 나는 화들짝 놀랐다.
다들 앞다투어 이야기할 때 조용히 있으면 그 대화에 끼어들고 싶지 않아서 그러는 거란 걸 왜 모르는 걸까.
“응? 뭐가?”
“르네는 에드윈 님의 보모가 되고 싶지 않아?”
“전혀? 나는 지금이 좋은데?”
생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고개를 돌릴 때마다 휙휙, 바람 소리가 들렸다.
그만큼 강렬한 의지가 반영된 격렬한 고갯짓에 질문을 던진 에린이 당황했다.
에드윈의 보모라니. 결사코 피하고 싶은 자리였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그 끝이 어떤지 알고 있었으니.
한숨을 쉬며 이 모든 일이 시작되었던 그 날을 떠올렸다.
여느 날처럼 평범하게 잠들었다가 아침에 눈을 떴다. 그때부터 전혀 평범하지 않은 상황이 이어졌다.
예전에 읽었던 소설과 모든 상황이 일치한다는 걸 깨닫기까지는 며칠의 시간이 필요했다.
사실 이 모든 게 꿈이 아닌 현실이라는 걸 받아들이는 데에 걸린 시간이 그 정도였다.
물론 그보다 더 긴 시간을 충격과 공포에 휩싸여 지냈다.
내가 있는 곳이 아를소티아 제국에서 손꼽히는 세력가인 로에리안 공작저라는 것을 알았을 때까지는 그래도 괜찮았다.
문제는 내가 르네라는 것이었다. 이 소설의 남주, 에드윈의 보모인 르네.
“망했다. 왜 하필 르네야.”
처음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땐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빠져 도무지 서 있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주 예전에 읽은 소설이라 대부분의 기억이 흐릿했지만,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아버지인 레이넌의 무관심과 르네의 정서적 학대로 에드윈은 성인이 되고 레이넌과 르네를 무참히 죽인다.
그 후로도 피를 부르는 폭군으로 살던 그는 여주를 만나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게 되면서 사랑도 하고, 겸사겸사 사람도 되었지만…….
그러면 뭘 하나. 르네는 죽고 없는데.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걸. 내가 에드윈의 손에 죽게 되는 그 보모라는 사실을.
아니, 모르는 채 그대로 죽는 것도 너무 끔찍하잖아?
오히려 알고 있으니 다행이었다. 미래를 바꿀 기회를 얻은 것일지도 몰랐다.
소설 속에서 제대로 다뤄지지 않을 정도로 에드윈은 아직 어렸다.
지금의 공작은 레이넌이었고, 소설 속 몇 줄로 묘사된 것처럼 에드윈에게는 무관심한 그는 착실히 업보를 쌓고 있었다.
그만큼 나에겐 시간이 남아 있다는 말이 아닌가.
아직 에드윈이 여섯 살이니 성인이 되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다.
그만큼 나에겐 시간이 남아 있지만, 그렇다고 마냥 안심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문제는 지금 에드윈을 돌보는 테레스가 언제 물러날지를 알 수 없다는 점이었다. 그러다 보니 하루하루가 살얼음판 위를 걷는 것 같았다.
에드윈의 보모이기 이전에 레이넌의 보모였던 그녀의 나이가 많은 것이 불안 요소였다.
물론 내가 에드윈의 보모가 된다는 보장도 없었고, 소설 그대로 죽음을 맞이할지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소설이 왜 소설이겠는가. 그렇게 이야기가 흘러가게 되어 있으니까 그런 게 아닐까.
어쨌거나 나는 불안을 떠안고 싶지 않았다. 가늘고 길게 살고 싶었다. 그저 마음 편하고 안온하게.
이렇게 된 것, 그냥 최대한 빨리 튀어야 했다.
하지만 내 발목을 잡는 건 르네의 재정 상태였다.
아무래도 그녀는 내일을 생각하지 않는 여자였던 모양이었다.
그 많은 월급을 받는 족족 모두 흥청망청 써 버려 내 손에 남은 돈은 하나도 없었다. 그래도 직장은 무사하니 눈에 띄지 않고 조용히 돈만 모아서 떠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최대한 빨리, 그리고 많은 돈을 모아서 떠나자. 기왕이면 제국을 벗어나야 한다.
그게 나의 유일하고도 가장 큰 목표였다. 이런 내가 에드윈의 보모가 되길 원한다니.
나는 진지한 얼굴로 에린을 바라봤다.
“나는 자질이 아주 많이 부족한 데다가 욕심도 없어.”
“그래도 에드윈 님은 차기 공작님이 되실 텐데…….”
에린은 아쉬운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더니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인생이 바뀌게 될지 어떻게 알아?”
인생이 바뀌게 되겠지. 근데 그게 네가 생각하는 그런 쪽은 아닐지도 몰라. 너는 아니더라도 나는 저승길이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아.
뭐라고 설명할 수도 없는 이야기였다. 게다가 입 밖에 꺼냈다가는 에드윈이 성인이 되기 전에 죽을 것이 분명했다.
답답한 마음을 애써 꾹 누르고 나 역시 그녀에게 속삭였다.
“나는 정말, 정말로 그 자리는 안 가고 싶어. 그러니까 제발 나 좀 빼 줘.”
에린은 단호한 내 말이 믿기지 않는 듯 잠시 가는 눈으로 나를 빤히 바라봤다. 하지만 곧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알았어. 어쨌거나 너는 정말 관심 없다는 거지?”
“응.”
오늘따라 에린은 이상할 정도로 집요했다. 그래서였을까. 다른 때였다면 금세 다른 주제로 흘러갔을 대화는 오늘따라 유독 길어지고 있었다.
그럴수록 내 심장은 세차게 뛰었다. 그런 와중에 에드윈, 보모라는 단어가 들릴 때마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주 불길하게.
“르네, 시녀장님이 찾으셔. 지금 가 봐.”
식당으로 들어온 누군가의 말에 미친 듯이 뛰다가 철렁 내려앉길 반복하던 심장이 순간 멈춘 것만 같았다.
“……시녀장님이?”
“응.”
“나를? 왜?”
“나도 몰라. 그런데 중요한 이야기니까 지금 바로 오래.”
점점 더 짙어지는 불길한 기운은 기분 탓일까.
바닥으로 푹푹 꺼지는 발걸음을 옮기는 데는 시간이 꽤 걸렸지만, 그 와중에도 몸은 착실히 움직였다.
“들어와.”
“찾으셨어요?”
“일단 앉지.”
오래도록 공작저에서 일해 온 캐서린은 평소보다 더 깐깐하게 눈을 빛내며 의자로 손을 뻗었다.
일어서서 듣는 게 아니라 앉아서 들으라니. 그 정도로 긴 이야기를 하겠다는 뜻일까.
쭈뼛거리며 의자에 앉자 그녀는 바로 본론을 꺼냈다.
“테레스는 곧 공작저를 떠날 예정이다.”
역시나. 나는 속으로 신음을 삼켰다.
그래도 이렇게나 이르게 공작저를 떠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내 주위에 서서히 내려앉던 불길함이 조금씩 몸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이제까지 캐서린과 독대한 적도 없었거늘 테레스의 이름으로 말문을 열다니.
“그래서 말인데…….”
“콜록!”
“앞으로 네가 에드윈 님을…….”
“콜록! 콜록!”
캐서린은 평소에 제 말이 끊기는 걸 극도로 싫어했다. 분명 화를 내며 내쫓을 줄 알았는데 그녀의 반응은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일부러 뱉어 낸 기침에도 그녀의 얼굴은 아주 미약하게 움찔거렸을 뿐이었다.
“모셔야겠구나.”
그토록 듣고 싶지 않았던 말은 끝내 그녀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고야 말았다.
“네?”
또다시 기침해야지. 그렇게 다짐한 것이 무색하게 나도 모르게 소리를 높여 물었다.
아무리 그래도 예상보다 너무 빨랐다. 아직은 시간이 조금은 더 남아 있을 거라고 예상했었는데.
이번엔 캐서린의 굳건한 얼굴이 무너졌다. 눈에 띄게 인상을 쓰며 노려보는 날카로운 눈빛에 작은 목소리로 사과했다.
“죄, 죄송합니다. 너무 놀라서.”
“최근에 보니 너만큼 성실하고 열심히 일하는 아이가 없어서 말이야.”
얼른 돈을 모아서 떠나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추가 수당을 벌고자 했던 일이 이렇게 돌아올 줄이야.
“아니, 감사한 말씀이지만 저는 에드윈 님을 모시기에 너무 부족합니다.”
“그래. 이렇게 겸손함까지 갖췄으니 에드윈 님에게 좋은 본보기 또한 될 수 있겠지.”
정말 하고 싶지 않아 한 말이 오히려 칭찬이 되어 돌아왔다.
잠시 눈을 굴리며 방법을 찾던 나는 한층 창백한 얼굴로 이마를 짚으며 힘없이 말했다.
“제가…… 몸이 허약해서 에드윈 님을 모실 수가…….”
“지난달에 시종들과 함께 마구간 청소도 하고, 보수 공사에 쓰일 자재들도 옮기지 않았던가?”
망할 추가 수당. 나는 이를 꽉 물고 어색하게 웃었다.
“네. 그랬었죠……. 그때 너무 무리해서 그런지 건강이 매우 나빠졌답니다. 콜록!”
말끝에 옅은 기침을 함께 뱉어 냈다. 그러자 캐서린의 얼굴에 아주 작은 변화가 생겨났다.
곤란하지? 곤란할 거야. 공작의 후계자를 돌볼 보모가 이렇게나 허약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일걸?
“그 정도로 열심히 일하는 줄 몰랐군. 주치의에게 가장 좋은 약을 쓰라고 해야겠어. 에드윈 님을 모실 네가 아파서는 안 될 일이지.”
“저보다 에린이!”
어느샌가 캐서린은 내가 에드윈의 보모가 되었다고 확정하고 대화를 이어 가고 있었다.
한다고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는데요!
어떻게든 그녀의 관심을 돌리고자 다급하게 에린의 이름을 꺼낸 순간 문이 슬며시 열렸다.
캐서린과 나의 시선이 문으로 향했다. 하지만 문은 아주 약간 열렸을 뿐 누가 들어오기는커녕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지지도 않았다.
“문이 고장이 났나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서자 주황빛 머리칼이 문틈 사이로 쏙 나타났다.
“캐서린?”
“에드윈 님!”
작은 아이였다. 캐서린은 어느 때보다 재빨리 걸음을 옮겨 그를 반갑게 맞이했다.
“어찌 여기까지 오셨어요? 마침 잘되었습니다. 앞으로 에드윈 님을 모실 아이를 소개해 드리지요.”
“나를?”
“테레스의 뒤를 이어 앞으로 에드윈 님을 모실 르네입니다.”
눈만 깜빡이고 있는 나를 향해 캐서린은 자신 있게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을 따라 작은 아이의 시선이 움직였다.
“르네?”
세상에. 어린 에드윈이 이렇게 예쁘다는 묘사는 왜 안 하셨죠, 작가님?
사용인이 많기도 하지만 유독 레이넌과 에드윈의 주변은 폐쇄적이라 공작저에서 일하면서 그 두 사람을 보는 일은 쉽지 않았다.
공작 부자에 대한 이야기는 알음알음 들어 보기는 했다. 하지만 직접 마주한 에드윈은 소문을 뛰어넘었다.
구불거리는 주황색 머리카락, 땡글땡글한 볼에 크고 동그란 푸른 눈은 인형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얼굴을 마주 봤을 뿐인데 내 얼굴에는 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무엇보다 붉고 작은 입술이 오물거리며 내 이름을 부르는데 나도 모르게…….
“네, 에드윈 님. 르네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아, 망했다. 잘 부탁드린다니.
상냥하고 성실한 다른 시녀가 많다는 걸 어필하려던 계획은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지금이라도 다시 말을 꺼내 볼까. ‘살가운 에린이라면 에드윈 님 마음에 꼭 들 거예요.’라고.
크게 숨을 들이쉬며 입을 열려던 그때였다.
“응. 잘 부타캐.”
창밖에서 들어오는 햇살보다 눈부시게 생긋 웃는 에드윈의 얼굴을 본 순간, 나도 모르게 그의 두 손을 덥석 붙들었다.
“성심성의껏 모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