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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03 (80/82)

외전 03

첫 언쟁을 벌이고 이틀 뒤 그는 화보 촬영 때문에 다시 이탈리아로 출국했다.

아영은 그와 떨어져 있는 동안 몇 번이나 전화를 들었다가 놓기를 반복했다. 결국은 전화 걸 용기가 없어 문자로 보냈다.

잘 도착했냐는 그녀의 문자에 그는 단답형 대답만 보내왔다.

그게 서운하고 미워서 아영은 그 뒤로 문자도 보내지 않았다.

더 기가 막힌 건, 그 역시 아무런 연락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자 아영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그때 제 방에서 놀던 서준이 거실로 뛰어나왔다.

“엄마, 아빠 내일 온대!”

일주일 일정이라고 들었다. 하지만 야외 촬영일 경우 날씨 때문에 변수가 생기는 경우가 많다 보니 예정보다 하루 이틀 늦어지는 게 다반사였다.

“누가 그래?”

“아빠가 그러셨어.”

그녀의 두 눈이 커졌다.

“아빠가? 혹시 아빠랑 통화했어?”

“응. 방금. 나랑 매일 매일 통화해.”

천진한 서준의 말에 그녀의 얼굴이 미세하게 굳어졌다.

저에겐 전화는커녕 문자 하나도 안 보내면서 서준과 매일 통화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어이가 없었다.

바람을 피운 것도 아니고, 단지 알고 지냈던 선배와 잠깐 차 한잔 마셨을 뿐이다.

이게 이렇게 속 좁게 굴 일인가 싶었다.

삭히지 못한 화가 부글부글 끓어올라 왔다.

“엄마, 나 배고파.”

아영은 재빨리 표정을 지우며 물었다.

“그래? 뭐 먹고 싶은데?”

“음. 돈가스!”

서준이 곰곰이 생각하더니 이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알았어. 엄마가 맛있게 해 줄 테니까 놀고 있어.”

“응!”

돈가스 먹을 생각에 신이 난 서준을 향해 아영은 애써 웃어 보인 뒤 주방으로 향했다.

저녁을 먹인 뒤 깨끗하게 목욕시키고 재우고 나니 어느새 시간은 10시를 향해서 하고 있었다.

서준의 방을 나온 아영은 씻은 뒤 침대에 누웠다. 몸은 피곤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말똥말똥한 눈으로 천장을 보는데 서준과 했던 말이 떠오르자 서운했던 감정이 울컥 올라왔다.

도저히 이대로는 잠이 올 것 같지 않아 시차를 확인한 아영은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가는 동안 일주일만의 통화라서 그런지 저도 모르게 긴장됐다.

그런데 웬일인지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지금쯤 촬영이 끝났을 시간인데…….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며 전화를 막 끊으려는 찰나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Hello.]

처음 듣는 외국 여자 목소리에 아영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Hello?]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여자는 재차 말했다.

아영은 목에 걸렸던 숨을 가까스로 삼킨 뒤 입을 열었다. 하지만 손에 쥔 핸드폰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It's Daniel's call, isn't it(대니얼 전화, 아닌가요)?”

[Yes. Daniel left for a second. Who shall I say called?(맞아요. 대니얼 잠깐 자리 비웠는데, 누구라고 전해 드릴까요?)]

심장이 후드득 떨어졌다.

대체 당신은 누구냐고, 왜 그의 전화를 받은 거냐고 묻고 싶었지만 굳어 버린 그녀의 입은 아무 말도 뱉지 못했다.

전화를 받은 여자는 몇 번 더 헬로우를 외치더니 낮게 뭐라 중얼거리고는 이내 전화를 끊어 버렸다.

아영은 끊어진 전화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전화를 받은 여자는 누굴까? 분명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태하는 사생활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었다. 자신의 개인 폰을 대신 받거나 만지지 못하게 했다. 자신의 몸처럼 항상 함께 다니는 그의 매니저조차도.

아영은 불안이 엄습하자 손톱 끝을 깨물었다.

설마.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제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무서운 상상 때문에.

아니야. 아닐 거야.

아영은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그가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마음 한구석에 자꾸만 의심이 제멋대로 뻗어 나가 심장을 할퀴었다.

다시 전화를 걸어 확인하고 싶지만 또다시 그 여자가 받을까 봐 겁이 나 번호를 누를 수가 없었다.

초조하게 그에게 전화가 오기만을 기다리던 아영은 시간이 지나도 울리지 않는 핸드폰에 화가나 전원을 꺼 버렸다.

이불을 뒤집어쓰고는 소리 죽여 흐느꼈다.

“엄마─.”

서준이 졸린 눈을 비비며 침실로 들어왔다. 아영은 밤새 울어 쓰라린 눈가를 재빨리 정리한 뒤 고개를 돌렸다.

“서준이 일어났어?”

“응.”

아직 잠이 덜 깨서 그런지 그녀의 붉어진 눈가를 눈치채진 못했다.

아영은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애써 목소리를 밝게 냈다.

“우리 서준이 잘 잤어?”

서준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더 자고 싶은지 그녀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러고는 아기 새처럼 그녀 가슴에 얼굴을 비볐다.

“음, 엄마 냄새 좋다.”

“그래?”

아영은 눈물 때문에 목이 잠기자 작게 밭은기침을 내뱉은 뒤 말했다.

“아빠도 엄마 냄새 좋대. 그래서 맨날 맨날 안고 싶대.”

처음 듣는 소리였다.

“아빠가, 그랬어?”

“응. 그래서 질투 났어.”

“왜?”

“나보다 아빠가 엄마를 많이 안아서. 내가 더 많이 안고 싶은데.”

서준이 서운한지 입술을 불퉁하게 내밀었다. 그 모습이 너무 사랑스럽고 애틋해 아영은 울컥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아영은 서준의 콧등을 톡 건드리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 엄마는 서준이를 제일 많이 사랑하니까.”

“정말? 아빠보다 더?”

“응. 아빠보다 더.”

“히이잇!”

그제야 서준의 얼굴에 안도의 웃음이 새어 나왔다.

“대신 아빠에겐 비밀이다.”

서준이 무슨 큰 비밀이라도 생긴 것처럼 눈을 또렷이 뜨고 고개를 크게 주억거렸다.

***

서준을 유치원에 보내고 돌아온 아영은 쏟아지는 잠을 이기지 못하고 침대에 누웠다. 밤새 한숨도 못 잔 후유증이었다.

곧바로 잠에 빠져들었지만 아영은 악몽을 꾸었다.

꿈속에서 그가 얼굴도 보이지 않는 여자와 침대에 누워 있는 장면이 나오자 아영은 뛰어가 두 사람 사이를 강제로 떼어놓으며 소리쳤다.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내가 뭘?”

그가 뻔뻔한 얼굴로 되물었다.

“지금 내 앞에서 다른 여자랑 붙어 있었잖아!”

“오해야.”

그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말했다.

아영은 제 눈으로 직접 봤는데 오해라고 말하는 그의 뻔뻔함에 더욱 화가 치솟았다.

“오해? 이게 어떻게 오해야?”

“지금 날 못 믿는 거야?”

“어떻게 믿어? 내 앞에서 둘이 붙어 있어 놓고!”

“네가 이렇게 속 좁은 여자인 줄 몰랐어. 날 못 믿는 여자랑은 더는 못 살아. 헤어지자.”

태하가 서늘한 얼굴로 그렇게 내뱉고는 침실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 순간 그와 함께 침대에 누워 있던 여자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여자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 마네킹만 남아 있었다.

질투에 눈이 멀어 여자를 마네킹으로 오해했다는 걸 깨달은 아영은 밖으로 뛰어나갔다.

막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그를 향해 아영은 다급히 소리쳤다.

“믿어. 믿을게. 그러니까 제발 가지 마!”

그녀의 간절한 외침에도 그는 비릿한 미소를 짓더니 이내 엘리베이터 문을 닫아 버렸다.

아영은 닫힌 엘리베이터 앞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흐흐흐흑. 내가 잘못…… 했어. 제발…… 돌아와.”

“쉬─ 울지 마.”

그때 따뜻한 무언가가 그녀의 젖은 눈가를 부드럽게 쓸었다. 그러더니 눈 끝으로 조심스럽게 옮겨가 눈물을 훔쳤다.

고였던 눈물이 닦이자 남은 자리가 쓰라려 잠결에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인상 쓰지 마. 예쁜 얼굴에 주름지니까.”

단단한 손가락이 좁혀진 미간을 지그시 누르자 잡힌 주름이 스르륵 펴지는 것 같았다.

꿈인가.

이상하다. 꿈이라고 하기엔 느껴지는 감촉이 너무나 현실 같았다.

그럴 리 없다는 생각을 하며 아영은 감은 눈을 천천히 떴다.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더니 뿌옇게 흐려 보이던 시야가 점차 선명해지고, 이내 구체적인 형상이 눈에 들어왔다.

“권…… 태하?”

“나쁜 꿈이라도 꾼 거야?”

침대 끝에 걸터앉은 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아영은 꿈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는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머리가 부딪치기 직전 그가 몸을 살짝 뒤로 물렀다.

“어, 언제 온 거야?”

“30분쯤 전에.”

벽에 걸린 시간을 확인하니 어느새 오후 3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왜 전화 안 했어?”

“출발 전에 했는데 안 받기에 문자 보냈는데 못 봤어?”

“아…….”

아영은 낮게 탄식했다.

어젯밤 그의 개인 핸드폰으로 전화했을 때 다른 여자가 받자 화가나 전원을 꺼버렸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와 동시에 그가 저를 버리고 떠난 꿈도.

아영은 떠올리는 것만으로 누군가 제 가슴을 후벼 파듯 아팠다.

“그런데 왜 울었어?”

그가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영은 그와 싸우기 전으로 돌아간 것 같아 울컥했다.

“악몽이라도 꾼 거야?”

아영은 눈물이 나려는 걸 꾹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누가 널 울린 거야?”

그녀를 달래기 위해 그가 짐짓 화내는 어조로 말했다. 그를 찬찬히 쳐다보던 그녀가 입술을 파르르 떨며 말했다.

“너.”

“나?”

자신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지 그는 잠시 당황하더니 이내 그녀의 두 손을 마주 잡았다. 그러고는 그녀의 눈을 깊게 들여다보았다.

“혹시 그때 카페에서 일 때문에 그래?”

아영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는 그렇게 단정하는 듯했다.

“미안해. 그날 속 좁게 굴어서.”

생각지도 못했던 그의 사과에 아영은 순간 울컥했다.

“내내 마음이 불편해서 일이 손에 안 잡히더라.”

“너한테 전화했었어.”

그녀가 그에게 잡힌 손을 빼내며 말했다.

“나한테? 언제?”

그는 전혀 몰랐던 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어젯밤 10시쯤. 어떤 여자가 받더라.”

“여자? 누구?”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그때 너랑 같이 있었던 여자 누구야?”

침착하게 묻고 싶었지만, 어느새 그녀의 말투는 날이 서 있었다. 그를 의심하는 눈빛과 함께.

태하는 선뜻 짚이는 사람이 없는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더니 이내 누군가 떠올랐는지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아마 그 여자, 감독이었을 거야.”

감독이라고? 여자 감독이 종종 있는 건 알고 있지만 이번에 그와 작업하는 감독이 여자일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녀의 의심은 더욱 짙어졌다.

“렌 스튜어트라고, 디오르 향수 광고 찍은 감독인데 나랑 얘기 중이었거든.”

그의 말을 듣자 몇 번 보지 않았는데도 단번에 기억이 날 정도로 파격적이면서 독특한 영상이 인상 깊은 광고였다.

“그런데 어떻게 그 감독이 네 전활 받은 거야? 촬영은 전날 끝났다고 하지 않았어?”

“끝났는데 어제 감독이 호텔까지 찾아왔더라고. 마지막 촬영한 게 마음에 안 든다고 추가 촬영 해 줄 수 없냐고 사정하는 데 스케줄상 도저히 시간 내기가 어려워 거절했거든. 아마 전화는 잠깐 내가 화장실 간 사이에 받은 모양이야. 내 손에서 핸드폰을 내려놓은 게 그때뿐이거든.”

그의 말을 잠자코 듣던 그녀가 뜨악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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