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02 (79/82)

외전 02

“어? 아영아…….”

뜻밖의 재회였다.

아영은 곧 다가올 태하의 생일 선물을 사기 위해 들른 쇼핑몰에서 진혁을 만나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때 회사 그만두고 도망치듯 서울을 떠난 뒤 다시 만난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선배가 여긴 어떻게…….”

“출장 왔다가 갈아입을 셔츠가 없어서 사러 왔어.”

진혁이 제 손에 들린 종이 가방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출장 왔구나. 아영이 같이 근무할 때도 사무실보다는 밖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던 진혁이었다.

“그러는 넌? 혹시 여행 왔어?”

진혁 역시 그녀를 만난 게 뜻밖인지 얼굴에 놀라움이 역력했다.

“아니요. 전, 여기 살아요.”

“제주도에서 산다고?”

“네.”

“언제부터?”

“회사 그만두고 1년 뒤에 내려왔어요.”

“그래서 우연히도 마주친 적이 없었구나.”

진혁이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영은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전화번호, 바꿨더라.”

“네.”

“솔직히 좀 서운했어. 너와 내가 알고 지낸 지가 몇 년인데, 그렇게 갑자기 연락 끊어 버릴 줄은 몰랐거든.”

“죄송해요.”

아영은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변명 대신 사과를 선택했다.

RRRRR. RRRRR. RRRRR.

그때 진혁의 핸드폰이 울렸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낸 진혁이 액정을 확인하더니 이내 표정이 굳어졌다.

“잠깐.”

그녀에게 양해를 구한 뒤 몸을 돌린 진혁이 전화를 받았다.

“무슨 일이야. 안 돼. 저번처럼 약속 어기면 앞으로 소희 못 볼 줄 알아.”

매섭게 일갈한 뒤 전화를 끊은 진혁은 화가 가라앉지 않는지 가슴을 들썩였다.

몇 번 숨을 고른 후 표정을 정리한 그는 이내 아영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미안.”

“괜찮아요.”

아영은 무슨 일인지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저기, 바쁘지 않으면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

서준이 끝나려면 아직 시간이 있었기에 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근처 카페로 향했다.

“너랑 이렇게 있으니 옛날 생각난다.”

진혁의 말에 아영은 옅게 웃으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떫은맛이 강한 게 제 취향은 아니었다.

아영이 찻잔을 내려놓는 걸 보며 진혁이 말을 이었다.

“그동안 잘 지냈어?”

“네. 잘 지냈어요.”

그녀의 밝은 안색에 진혁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제주도가 너한테 맞나 보네.”

“그런가 봐요. 서울 생각 하나도 안 나는 걸 보면.”

진혁이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난 네 걱정 많이 했는데.”

“걱정을 왜 해요. 제가 애도 아니고.”

“너 회사 그만두고 얼마 뒤에 권태하가 찾아왔어. 너 어디 있냐고 무섭게 다그치는 걸 보고 알았어. 두 사람이 헤어졌다는 걸.”

“미안해요. 회사까지 찾아갈 줄은 몰랐어요.”

태하에게 들어 알고 있었던 아영은 진혁에게 사과했다.

“네가 왜 사과해. 잘못은 그 사람이 했는데.”

“저 때문에 벌어진 일이니까요.”

“넌 여전하구나.”

그녀가 무슨 소리냐는 듯 쳐다보자 진혁이 말을 이었다.

“무슨 일 생기면 네가 다 짊어지려고 하는 거.”

“제가 그랬어요?”

“어.”

진혁의 단호한 대답에 아영은 피식 웃었다. 눈가가 부드럽게 휘고 입꼬리가 말려 올라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진혁의 눈빛이 짙어졌다.

“놀랐어.”

“뭐가요?”

아영이 입가에 미소를 매단 채 물었다.

“너 하나도 안 변해서. 그래서 한눈에 알아보겠더라.”

혼자서 서준을 키우는 게 쉽지 않아서인지 임신하면서 늘었던 몸무게가 자연스럽게 빠졌다. 그래서 크게 변화가 없어 보이는지도 몰랐다.

“난 많이 변했지?”

아영이 새삼 쳐다보는데, 그의 얼굴에 없던 주름이 보였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나, 사실…… 이혼했어.”

“이혼요? 언제요?”

아영이 놀라 되물었다.

“1년쯤 됐어.”

잘 살 줄 알았다. 진혁이라면.

자기 생각을 내세우는 것보다 남의 의견을 존중해 주는 배려심 많은 사람이었으니까.

“혹시 아까 전화, 전 부인이었어요?”

“맞아.”

부인 얘기가 나오자 진혁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네 살 된 딸이 하나 있는데, 같이 살 때는 다른 남자한테 정신 팔려 신경도 쓰지 않더니 이혼하고 났더니 이제 와서 키우겠다고 난리네.”

진혁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회사 앞에서 제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겼을 때 성격이 보통이 아닌 건 알고 있었지만, 선배를 두고 바람이라니. 아영은 어이가 없었다.

“가끔 네 생각 나더라.”

“저를요?”

“너와 결혼했으면 어땠을까 하고.”

아영이 뜨악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예전이었다면 가슴 떨리며 좋아했을 테지만 지금은 아무 감정도 들지 않았다.

“우리 꽤 잘 맞았잖아.”

“그건 선배가 맞춰 줘서 그런 거죠.”

“서로 맞춘 거지. 결혼해 보니까 한쪽만 맞춘다고 되는 게 아니더라. 상대방도 맞춰 줘야 그 관계가 유지되는 거더라고. 난 나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했거든.”

진혁의 눈빛에 짙은 후회가 서렸다.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이에요?”

“모르겠어. 아이를 생각하면 아이 엄마와 잘 지내야 하는데, 난 아직 그 여자가 용서가 안 돼.”

“아마 아이도 알 거예요. 엄마 아빠 사이가 좋지 않다는 걸. 그러니 억지로 애쓰지 말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시간을 주는 건 어때요?”

“…….”

“선배만큼 아이도 많이, 혼란스러울 거예요.”

그녀의 말을 곰곰이 생각하던 진혁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생각은 하지 못했다는 듯.

“넌 어떻게 잘 알아?”

“저도 배워 가는 중이거든요.”

아영은 서준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그런 그녀를 가만히 쳐다보던 진혁이 입을 열었다.

“연락해도 돼?”

“네?”

“이런 상황이 생길 때마다 벽에 부딪힌 것처럼 답답했거든. 너도 알다시피 내 주위에 여자는 어머니뿐인데, 어머니한테 말씀드리자니 걱정만 더 끼치는 것 같아서 안 하게 되더라고. 그렇다고 혼자 해결하려니 딸이라 내가 모르는 부분도 많아서 당황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거든.”

그랬을 거다. 저 역시 눈앞이 캄캄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부담되면…….”

“네. 부담되니까 하지 마세요.”

조심스러운 진혁의 질문에 아영이 막 대답하려는 순간, 머리 위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설마 하는 생각에 고개를 돌리자 태하가 무서운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권태하!”

깜짝 놀란 아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파리에 있어야 할 사람이 제 앞에 있으니 놀랄 수밖에.

“파리에서 언제 온 거야?”

“방금.”

그가 맞은편에 앉아 있는 진혁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말했다.

진혁 역시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내, 내일 온다고 했잖아.”

“촬영이 빨리 끝났어. 그런데 내가 빨리 와서 싫은가 봐?”

아영은 잘못한 것도 없는데 저도 모르게 버벅거렸다. 그 모습에 태하는 오해했는지 돌아보는 눈빛이 차가웠다.

“내 말은 그게 아니라…….”

“왜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거야?”

그가 그녀의 말허리를 자르며 물었다.

“어, 그게…….”

“우연히 만났습니다.”

이번에는 진혁이 그녀의 말을 자르고 대답했다.

아영은 저를 투명인간 취급하는 두 사람의 행동에 미간을 찌푸렸다.

“우연히?”

“네. 우연히요.”

태하가 매서운 눈빛으로 쏘아보자 진혁 역시 지지 않고 눈에 힘을 주며 말했다.

살벌한 두 사람 사이에서 아영은 안절부절못했다.

“내가 그때 경고했을 텐데요. 다시는 아영이 앞에서 얼쩡거리지 말라고.”

“그때는 아영이와 헤어진 줄 몰라서 가만히 있었지만, 이제 와서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참견하는 겁니까?”

그때 태하가 그녀의 허리에 제 팔을 휘감으며 말했다.

“아영이 남편이면 자격 충분한 거 아닙니까?”

“방금 남편이라고 했습니까?”

“네.”

진혁의 표정이 뭐에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순간 멍해지더니 이내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자신이 잘못 들었길 바라는 표정으로 물었다.

“이아영, 정말이야? 정말 두 사람 결혼했어?”

“네.”

“그랬, 구나.”

그녀의 대답에 진혁은 어떻게든 실망한 표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써 웃어 보였다.

“미안해요.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타이밍을 놓쳤어요.”

“아, 아니야. 늦었지만 결혼 축하해.”

“감사합니다.”

세 사람 사이에 어색한 공기가 맴돌자 진혁이 가방을 들고 일어났다.

“저기, 난 바빠서 먼저 가 볼게.”

“벌써요?”

“저녁 약속 있는 걸 깜빡했네. 다음에 보자. 그럼.”

태하를 향해 고개를 까닥인 뒤 진혁은 빠른 걸음으로 카페를 벗어났다.

“우리도 나가자.”

허둥지둥 나가는 진혁의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데 태하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이미 그가 등장할 때부터 카페에 있던 사람들의 관심이 쏠리고 있던 터라 아영은 아무 말 없이 그를 따라나섰다.

그의 차가 집이 아닌 해변 쪽으로 향했지만, 아영은 따져 묻지 않았다. 핏줄이 불거지도록 운전대를 꽉 쥔 그의 표정이 살벌했기 때문이다.

20분 후 도착한 바닷가에는 사람이 없었다. 방송을 타지 않아서인지 근처에 사는 동네 사람들만 이용했다.

후미진 곳에 주차한 태하는 답답한지 창문을 내렸다. 차가운 바람이 훅 들이치더니 그의 머리를 헝클어놓았다.

그 모습을 조용히 쳐다보던 아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오해야.”

“어디서부터 어디가 오해인데?”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돌아보았다.

“자기 생일 선물 사러 쇼핑몰에 갔다가 우연히 만난 거야. 잠깐 얘기 좀 하자고 해서 있었던 거고. 그게 잘못은 아니잖아.”

솔직히 아영은 그가 이렇게 화내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누가 잘못이래?”

“그럼 왜 화가 난 건데?”

“결혼 전 아내가 좋아했던 남자랑 같이 있는 모습 보고 기분 좋을 남편이 어디 있어?”

그가 화를 억누르며 말했다.

“그건 지나간 과거일 뿐이야.”

“그래도 기분 나빠. 네가 그 남자를 한순간이라도 마음에 담아두었다는 자체가.”

그가 짙은 소유욕을 드러내며 말했다.

아영은 그가 아직도 진혁에 대해서 신경 쓰고 있을 줄은 몰랐다.

오래전 일이었고, 태하를 사랑하게 되면서 진혁에 대한 마음이 동경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다시 만났을 때 불편한 것보다 반가운 마음이 컸다.

“그래서 내가 어떻게 하길 바라?”

“그 남자랑 연락하지 마.”

좀 전에 진혁이 연락해도 되냐는 말을 듣고 하는 말 같았다.

아영은 기분이 언짢았다. 자신이 누군가와 연락하는 것까지 그가 간섭하는 것 같아서.

“지금 나 못 믿는 거야?”

“널 못 믿는 게 아니라 그 남자를 못 믿는 거야.”

“그게 그거잖아. 너 원래 이렇게 속 좁은 사람이었어?”

그의 눈썹이 가파르게 올라갔다.

“뭐?”

“그렇잖아. 지난 일 가지고 이러는 거.”

“미안하다. 속 좁은 남자라서.”

그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아영은 순간 아차 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 남자랑 연락하고 싶으면 연락해. 더는 상관 안 할 테니까.”

그 말을 끝으로 차에 시동을 건 그는 그대로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자갈이 거칠게 튕겼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