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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02 (77/82)

에필로그 02

세계 최고의 호텔로 뽑힌 하와이 포시즌스 리조트 후알랄라이에 도착했지만 아영은 서준과 영상 통화하느라 그림처럼 펼쳐진 밖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서준아, 정말 혼자 잘 수 있겠어?”

며칠씩 떨어져 잔 적이 없었던 터라 아영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엄마, 걱정하지 마. 할아버지랑 같이 자기로 했어.]

“뭐? 정말? 할아버지가 그러자고 하셨어?”

[아니. 내가 먼저 같이 자자고 했어.]

“그런데 할아버지가 허락하신 거야?”

[응. 엄마, 이건 비밀인데. 사실 할아버지도 혼자 자는 거 무섭대.]

“그랬구나.”

서준이 비밀이라는 듯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아영은 서준을 위해 하얀 거짓말을 해 준 시아버지에게 속으로 감사를 전했다.

“뭐야, 아버지랑 서준이랑 같이 자기로 했대?”

마침 욕실에서 씻고 나오던 그가 통화 소리를 엿들었는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그런가 봐.”

전화를 끊은 아영이 고개를 끄덕이자 태하가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닦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의외네. 아버지 잠귀 밝으신 분이라 옆에 누구 있으면 잘 못 주무시는데.”

“괜찮을까?”

“걱정하지 마. 서준이랑 같이 자고 싶어서 그러신 걸 테니까.”

“혹시나 서준이가 자다가 발이라도 차면 어떻게 해?”

서준과 자다가 몇 번이나 발에 차인 경험이 있는 그녀는 얼마나 아픈지 잘 알기에 걱정이 앞섰다.

“아버지 그 정도로 약한 분 아니야. 그리고 만약에 다쳐도 손주 발이라 되레 좋아하실걸?”

“뭐?”

그가 성큼 다가와 그녀 허리에 두 팔을 감았다. 허리에 묶은 가운 끈이 아랫배에 닿았다.

“멀리 있는 사람 그만 신경 쓰고, 나한테만 집중하란 소리야.”

“하지만…….”

“그거 알아? 하와이에 도착해서 내 얼굴 제대로 본 거 지금이 처음이라는 거?”

“내가?”

그녀가 놀라 반문했다.

“나는 신경도 안 쓰고, 내내 서준이 걱정만 했잖아.”

“미안해. 이렇게 오래 떨어져 본 적이 없어서 그런가 봐.”

생각해 보니 그와 보내는 신혼여행보다 혼자 남을 서준의 걱정만 했다는 게 떠올랐다.

아영은 미안한 마음에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이해해. 하지만 이 시간 이후부터는 나 외엔 다른 사람은 생각하지 마. 나만 생각해.”

“뭐?”

“널 독차지할 수 있는 이 일주일을 아무에게도 빼앗기고 싶지 않아.”

“서준이한테도?”

“그래.”

“하지만 남도 아니고 아들인데?”

아들한테까지 질투하는 그를 보며 아영이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신혼여행은 우리 둘만의 시간이야. 그 시간만큼은 오롯이 널 독차지하고 싶어. 그러니 너도 나만 생각해.”

“알았어.”

그가 그녀를 향해 강한 소유욕을 드러내며 말했다.

여기서 더 따지고 들었다가는 싸움으로 번질 것 같아 아영은 한발 뒤로 물러났다. 그제야 그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그래서 뭐부터 할래?”

“뭘 뭐부터 해?”

그녀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뭐긴 뭐겠어? 신혼여행 온 사람들이 제일 많이 하는 걸 하자는 거지.”

태하가 은근한 눈빛으로 말했다.

그제야 그의 말뜻을 알아챈 그녀가 눈을 흘겼다.

“우리 여기 온 지 세 시간도 안 됐어.”

무엇보다 밖은 대낮처럼 환했다.

“그래서?”

그게 뭐가 문제냐는 얼굴로 쳐다보던 그가 태연하게 덧붙였다.

“결정해. 씻고 할 건지 아니면 바로 지금 할 건지. 참고로 난 후자야.”

“그게 뭐야? 결국은 둘 다 하는 거잖아.”

“그래서 싫어?”

순간 태하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여기서 잘못 말하면 행복해야 할 신혼여행은 물 건너가게 된다.

아영은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싫은 게 아니라, 일단 하와이에 왔으니 구경부터 하자는 거지.”

“이아영, 아직 눈치 못 챘나 본데. 나 지금 걸어 다닐 상황 아니야.”

그가 자신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하체를 더욱 밀착시켰다.

아랫배에 선명한 형태가 닿자 그녀의 두 눈이 놀라 커졌다. 당장이라도 뚫고 나갈 것처럼 기세가 등등했다.

“아니, 언제…….”

“알잖아. 이놈은 너만 보면 시도 때도 없이 이러는 거.”

이런 상황에 익숙한 듯 그가 달관한 얼굴로 말했다. 그녀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러니까 한 번만 하고 나가자.”

“거짓말.”

그에게 한 번은 없었다. 매번 그렇게 말해 놓고 그녀가 지쳐 잠들 때까지 놓아주지 않던 그였다. 하와이까지 와서 방에만 틀어박혀 있고 싶진 않았다.

“오늘은 정말이야.”

“알았어. 씻고 나올게.”

아영은 거짓말일 게 뻔한 그의 말에 속아 넘어가는 척했다. 그가 본연의 상태로 돌아올 때까지 최대한 오랫동안 샤워할 생각이었다.

“굳이 안 씻어도 되는데.”

“아니. 난 씻고 싶어.”

“그럼, 같이 씻을까?”

씻는 척하며 달려들 게 뻔했다. 아영이 그의 가슴을 단호하게 밀어내며 말했다.

“침대에서 얌전히 기다려.”

아영은 그가 저를 붙잡기 전에 빠른 걸음으로 욕실로 향했다. 그러고는 욕실 문을 잠근 뒤 천천히 입고 있던 옷을 벗었다.

마음 같아서는 욕조 안에 물을 받아 느긋하게 즐기고 싶었지만, 밖에서 귀를 쫑긋 세우고 있을 그가 떠올라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며 샤워 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쏴아아아.

시원하게 떨어지는 물줄기가 몸을 적시도록 가만히 있었다.

머리카락을 타고 얼굴 위로 흘러내리던 물줄기가 턱 끝으로 떨어지더니 볼록한 가슴으로 떨어졌다.

가파른 경사를 따라 흐르던 물줄기가 평평한 배를 지나 폭포수처럼 한데 모이더니, 이내 매끈하게 쭉 뻗은 다리를 훑듯이 내려갔다.

아영은 젖은 머리를 쓸어 넘긴 뒤 몸에 뱄을 땀을 물로 씻어 낸 다음 향긋한 샤워젤을 손바닥에 짰다. 그런 뒤 물줄기가 지나간 자리마다 꼼꼼히 바르며 문지르기 시작했다.

푸른 혈관이 보일 정도로 새하얀 목덜미를 지나, 오목하게 팬 쇄골에 머물렀다가 둥글게 솟은 능선에 잠시 멈췄다. 그러고는 손바닥을 벌려 넓게 펴 발랐다. 매끄러운 감촉이 짙은 향과 뒤섞이면서 묘하게 자극되었다.

더불어 그가 밖에서 저를 애타게 기다린다고 생각하니 이상하게 몸이 뜨거워졌다. 배 속에 열기가 고였다.

그가 제게 안달 내는 게 싫지 않았다. 오히려 좋았다. 흥분됐다.

나 사디스트인가.

아영이 픽 웃었다.

달칵. 달칵.

그때 욕실 문고리가 움직였다.

흠칫 놀란 아영은 재빨리 제 몸에서 손을 뗐다. 못된 짓을 하다 들킨 것처럼 얼굴에 열이 올랐다.

“이아영, 욕실 문 왜 잠갔어?”

“모, 몰라. 습관적으로 잠갔나 봐.”

당황한 아영은 거짓말을 했다.

“혹시 내가 들어갈까 봐 잠근 거야?”

역시 눈치가 백단이었다. 아영은 눈알을 굴렸다.

“그럴 리가. 그런데 왜?”

“기다리는데 안 나오길래.”

그녀가 모른 척 묻자 그가 조바심이 난 어조로 말했다.

“아직 씻는 중이야.”

“내가 도와줄까?”

“권태하, 자꾸 방해하면 더 늦어져.”

“알았어.”

그의 침울한 목소리에 아영은 잠시 흔들렸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신혼여행 첫날을 호텔 방 안에서만 보내는 건 너무 아까웠다. 가 보고 싶은 곳이 많았다.

똑. 똑.

그사이 사라진 거품을 다시 몸에 묻히는데 이번에는 노크 소리가 들렸다.

아영은 한숨을 삼키며 말했다.

“왜, 또?”

“서준이한테 전화 왔어.”

“정말?”

마음이 급해진 아영은 거품도 씻지 않고 욕실 문을 열었다. 작게 열린 틈 사이로 손을 뻗었다.

“핸드폰 이리 줘.”

그러나 핸드폰 대신 그의 손이 잡혔다. 아영이 장난하지 말라고 하려는 순간 잡고 있던 욕실 문이 벌컥 열렸다.

“뭐야?”

그가 아무 말 없이 욕실 안으로 성큼 걸어들어왔다. 아영이 가슴을 손으로 가리며 뒤로 물러났다.

“핸드폰은? 서준이한테 전화 왔다며?”

그의 손에 아무것도 들리지 않은 걸 발견한 아영이 뜨악한 얼굴로 물었다.

“끊어졌어.”

“뭐야, 설마 거짓말한 거야?”

그제야 그가 거짓말을 했다는 걸 눈치챈 그녀가 눈을 뾰족하게 떴다.

“날 먼저 골탕 먹인 사람은 너잖아.”

“내가?”

“너 일부러 시간 끈 거 다 알아.”

“아닌데?”

그녀가 일부러 뜸 들이고 있었다는 걸 그가 알아챈 모양이다. 당황한 아영은 부정했다.

“정말 아니야?”

“그, 그럼.”

그가 허리에 묶인 가운 끈을 풀며 다가오자 아영이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그의 손에 풀어진 가운 끈이 이내 아래로 툭 떨어지더니 여며져 있던 가운이 양쪽으로 벌어졌다.

그 사이로 드러난 그의 나신을 본 아영의 두 눈이 놀라 커졌다. 시간이 한참이나 지났는데도 여전히 혈기왕성한 모습이었다. 아영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아니면 다행이고.”

“그런데 옷은 왜 벗어?”

그가 어깨에 걸쳐진 가운을 벗자 그녀가 놀라 물었다. 성난 근육이 불끈거렸다.

“나도 씻으려고.”

“좀 전에 씻었잖아?”

“너 기다리다 이렇게 됐거든.”

그의 시선이 아래를 가리켰다.

무심코 따라가던 그녀 눈에 투명한 액이 맺힌 게 보였다. 그도 저만큼이나 흥분해 있었다.

“같이 씻자.”

그가 짙게 가라앉은 눈을 하고선 한 걸음 다가왔다.

저건 분명 같이 씻자는 눈이 아니었다. 같이 하자는 눈빛이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밖은커녕 욕실에서 밤을 새우게 생겼다.

“난 거의 다 씻었…… 앗!”

뒤로 주춤 물러나던 아영은 바닥에 떨어진 거품을 보지 못하고 미끄러져 휘청했다. 그가 재빨리 팔을 뻗어 그녀를 끌어안았다.

“괜찮아?”

“어. 헉헉.”

아영이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거친 숨을 내쉬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뒤로 넘어졌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아찔했다.

숨을 고른 아영이 고맙다는 말을 전하기 위해 고개를 든 순간, 저를 향해 이글거리는 눈빛과 마주쳤다. 곧이어 다리 사이로 뜨거운 이질감이 느껴지자 놀란 아영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권태하…….”

“이렇게 훅 들어오면 나도 버티기 힘들어.”

태하가 탁한 어조로 뇌까리더니 그녀를 벽으로 밀어붙였다. 그러는 사이 그는 더 깊이 자리 잡았다. 닿은 곳이 델 듯 뜨거웠다.

“이, 일단 나가자.”

“어차피 씻을 거 그냥 여기서 하지?”

지금 그의 눈빛은 절대 안 하고 나갈 수 없는 상태였다. 꼼수 쓰다 말려 버렸다.

“약속해. 한 번만 하기로.”

“오케이.”

시원하게 대답한 그는 그대로 그녀 안에 파묻었다.

그녀의 두 팔이 본능적으로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태하는 그녀의 머리가 타일 벽에 부딪히지 않도록 손등으로 감싼 뒤 있는 힘껏 밀어붙였다. 그러자 그녀의 작은 몸이 위로 들렸다가 쑥 내려왔다.

처음엔 시소를 타듯 천천히 오르내리던 그녀의 몸이 속도가 빨라지자 격렬하게 흔들렸다.

욕실에 서로가 내뿜는 열기가 가득 찼다.

그녀의 흐느낌이 고조되자 태하는 자신의 모든 것을 그녀에게 쏟아부었다.

곧이어 쾌감의 파도가 온몸을 덮쳤다. 열기에 녹아내린 그녀가 그의 위로 허물어졌다.

“하아. 하아.”

아영은 그의 어깨에 이마를 기댄 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하지만 다리에 힘이 풀려 서 있을 수가 없었다.

그녀의 힘이 빠지는 걸 느낀 그가 그녀를 번쩍 안아 올렸다. 그러고는 욕실 밖으로 나가더니 침대 위에 사뿐히 내려놓았다.

여전히 가시지 않는 열기로 인해 달뜬 숨을 내쉬고 있는 그녀를 내려다보던 그가 물었다.

“이래서 나갈 수 있겠어?”

“아니.”

아영은 힘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약속대로 한 번으로 끝냈지만, 그 한번이 마치 여러 번을 응집한 듯 강렬해 아영은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이런. 어쩔 수 없이 오늘은 호텔에 있어야겠네?”

내뱉는 말투는 아쉬운 듯했지만, 표정은 어딘가 즐거워 보였다. 아영은 눈을 흘겼다.

“너 때문이잖아.”

“내가 뭘?”

“네가 그렇게 강하게만 안 했으면…….”

“좋다고 조이던 사람이 누구더라?”

“내, 내가 언제?”

당황한 아영이 그의 가슴을 퍽 쳤다. 그가 소리 내어 웃더니 어느 순간 그녀 위로 올라왔다.

“뭐 하는 거야?”

“이왕 이렇게 된 거 욕실 테스트는 했으니, 침대 테스트 어때?”

“뭐? 앗!”

그가 그녀를 덮쳤다. 그렇게 시작된 신혼여행 일주일 내내 둘은 호텔을 벗어나지 못했다.

에필로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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