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01
“우와─.”
거대한 철제문과 높은 담벼락이 우뚝 솟아 있는 태하의 본가를 본 서준의 눈과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여기가 진짜 아빠가 살던 집이에요?”
“맞아.”
“태어나서 이렇게 큰 집은 처음이에요. 집이 아니라 왕들이 사는 성 같아요!”
“그래?”
서준의 천진한 표현에 태하가 사랑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빠 혹시 부자예요?”
“아빠보다 할아버지가 더 부자야.”
“그럼, 대통령보다 더 부자예요?”
“아마 그럴걸?”
“와! 할아버지 멋지다!”
대통령보다 부자라는 말에 한 번도 보지 못한 할아버지에 관한 관심이 높아진 듯했다.
“자, 이제 들어갈까?”
서준의 손을 잡은 태하가 아영의 허리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아영이 긴장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잠시만.”
“떨려?”
아영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는 내내 너무 긴장했는지 배 속이 단단하게 뭉친 느낌이었다.
그러자 그가 그녀 손에 깍지를 끼었다.
“걱정하지 마. 내가 있잖아.”
흔들림 없는 그의 시선을 마주하자 일렁이던 불안감이 누그러지는 듯했다.
그의 시선에 용기를 얻은 아영이 웃어 보이자 그도 따라 웃어 주었다.
“들어가자.”
세 사람은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아주머니, 저희 왔어요.”
“어머, 도련님 오셨어요?”
그가 신발을 벗으며 안으로 들어서자 주방에 있던 아주머니가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종종걸음으로 뛰어나왔다.
50대 중반 정도 돼 보이는 아주머니는 서글서글한 눈매 때문인지 인상이 참 좋았다.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네. 그럼요.”
“아버지는요?”
“나, 여기 있다.”
그때 그의 아버지 권일영 회장이 서재 문을 열고 나왔다.
희끗한 머리만 빼면 60대라는 나이가 무색하리만치 건장한 모습이었다.
태하가 일영을 향해 인사했다.
“안녕하셨어요.”
“안녕은 무슨. 결혼 날짜 잡고 이제야 인사하러 오는 놈이 어디 있냐?”
권 회장이 서운한 마음을 감추지 않으며 눈을 흘겼다.
“죄송합니다. 결혼 준비하느라 바빴습니다.”
태하의 깍듯한 사과에 한마디 하려던 권 회장은 그만 입을 다물었다.
“소개할게요. 이쪽은 아버지 며느리 될 이아영입니다.”
그의 소개에 꿰뚫어 보는 듯한 권 회장의 날카로운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
아영은 긴장한 얼굴 위로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이아영입니다.”
“반가워요.”
권 회장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님, 말씀 편하게 하세요.”
“그래.”
“그리고 늦게 찾아봬서 죄송합니다.”
“이게 어디 네 탓이냐. 태하 놈 탓이지.”
권 회장은 말 안 해도 다 안다는 듯 태하를 슬쩍 쳐다보며 말했다.
“정확히 보셨습니다.”
“저, 저. 말이나 못 하면.”
태하가 맞장구치자 권 회장이 혀를 차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태하는 아랑곳하지 않고 제 손을 꼭 잡고 있는 서준을 소개했다.
“제 아들 서준입니다. 서준아, 할아버지께 인사할까.”
그의 손을 놓은 서준이 배에 두 손을 겹친 뒤 90도로 인사했다.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권 회장은 서준이를 찬찬히 쳐다보았다.
태하보다 체구는 작지만 위압감이 느껴지는 얼굴이다 보니, 보통 그를 만난 어린애들은 눈물을 터트리거나 어른 뒤로 숨어 버리기 일쑤였다.
하지만 그런 애들과 달리 서준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되레 똘망똘망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게 기특해 권 회장이 자세를 낮추며 물었다.
“이 할아버지가 안 무서우냐?”
“네. 하나도 안 무서워요.”
서준은 왜 무서운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답했다. 그러자 날카로운 권 회장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어렸을 때 네 아빠와 똑 닮았구나.”
“아빠도 저처럼 생겼어요?”
서준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그래. 너처럼 단단하고 야무졌지.”
“그럼, 저도 할아버지 닮은 거네요?”
“뭐?”
“아빠랑 할아버지랑 똑같이 생겼어요.”
서준이 그와 권 회장을 번갈아 쳐다보며 말했다. 권 회장이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네 눈에 그래 보이냐?”
“네.”
똑 부러진 서준이 대답에 권 회장이 기특한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눈썰미가 좋구나.”
“저도 알아요.”
“알아?”
“네. 아빠도 그렇게 말씀하셨거든요.”
“그래? 하하하.”
권 회장은 기분 좋은지 호탕하게 웃었다.
그때 안성댁이 주방에서 나왔다.
“회장님, 식사 준비 다 됐습니다.”
“그래.”
권 회장이 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준아, 밥 먹으러 갈까?”
“네!”
서울에 오기 위해 일찍 서둘렀던 터라 배가 고팠던 서준이 큰 소리로 대답했다.
씩씩한 서준의 대답에 긴장감이 흘렀던 분위기가 일순 가벼워졌다.
“다들 들어가자꾸나.”
권 회장이 앞장서자 옆에서 따라 걷던 서준이 권 회장의 손을 잡았다.
갑자기 고사리 같은 손이 덥석 잡자 깜짝 놀란 권 회장의 눈이 커졌다.
서준이 씩 웃자 권 회장은 이내 허허허 웃었다.
두 사람의 모습을 뒤에서 조용히 쳐다보던 태하가 그녀에게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아버지 서준이한테 꽉 잡힌 것 같은데?”
“그러게.”
“거봐. 내가 걱정하지 말라고 했잖아.”
아영은 어리둥절했다. 서준이 낯가림이 있는 편이었던 터라 권 회장을 무서워하면 어쩌나 내심 걱정했던 그녀였다.
그 뒤 식사 자리는 화기애애했다. 정확히는 서준과 권 회장이 그러했다.
음식을 가리지 않고 잘 먹는 서준이 신기한지 권 회장은 자기 밥은 손도 대지 않고, 아들에게도 안 발라 주던 생선을 손수 발라 서준의 숟가락 위에 올려 주었다.
그러면 서준은 감사 인사를 잊지 않고 숟가락을 깨끗이 비웠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쳐다보는 권 회장은 안 먹어도 배가 부르는 듯한 표정이었다.
식사가 끝나고 티 타임을 갖기로 한 네 사람은 심심해할 서준을 위해 정원으로 나갔다.
날씨가 덥지도 않고 춥지도 않아 뛰어놀기에 딱 좋았다.
“아빠, 우리 술래잡기해요!”
“그럴까? 하나 둘 셋 하면 도망가는 거다?”
“네!”
“하나, 두울─ 셋!”
그가 셋을 외치자마자 서준이 앞으로 뛰어갔다. 그 뒤를 태하가 뒤쫓아갔다.
“꺄악─.”
뒤쫓아오는 태하 발소리에 서준이 소리를 지르며 도망갔다. 태하는 일부러 잡힐 듯 말 듯 아슬아슬한 거리를 유지하며 서준의 뒤를 쫓아갔다.
운동장만큼이나 넓은 정원을 두 사람은 맘껏 뛰어다녔다.
두 사람의 모습을 말없이 쳐다보던 권 회장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오래 살고 볼 일이군. 태하가 저렇게 웃는 걸 다 보고.”
그녀 역시 하얀 이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는 태하의 모습이 낯설면서도 보기 좋았다.
권 회장이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으며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고맙구나. 태하가 저렇게 밝아진 거, 네 덕이란 거 알고 있다.”
“아, 아닙니다.”
“태하는 마음의 상처가 있는 아이다. 어릴 적 어머니를 사고로 일찍 잃고 나와 단둘이 살았는데 난 일이 바빠 태하를 신경 써주지 못했다. 그래서 난 물질적인 걸로 빈자리를 채우려 했지. 하지만 태하가 원한 건 단 10분이라도 저와 함께 있어 주는 거였다는 걸 나중에서야 깨달았다. 뒤늦게 태하와의 사이를 좁히려 노력했지만 이미 벌어진 상처는 잘 아물어지지 않더구나.”
권 회장은 그때를 떠올리는지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래서인지 태하는 결혼에 회의적이었다. 하지만 자식이라곤 태하가 전부였던 난 대가 끊길까 봐 전전긍긍했지. 그런 태하가 갑자기 결혼한다고 했을 때 난 내 귀를 의심했다. 그리고 궁금하더구나. 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고집불통 아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는지. 그런데 널 보자마자 태하가 왜 너한테 반했는지 알겠더구나.”
잠시 말을 끊은 권 회장은 그녀를 지그시 쳐다보며 덧붙였다.
“혼자 힘으로 아이 키우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서준이를 잘 키웠더구나. 그동안 고생 많았다.”
“아버님…….”
아무리 세상이 변했다고 해도 여자 혼자 아이를 키우는 건 쉽지 않았다. 그런 제 노력을 알아주는 것 같아 아영은 가슴이 울컥했다.
권 회장은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아영의 두 손을 꼭 쥐며 말했다.
“며늘아기야, 앞으로도 우리 태하와 서준이 잘 부탁한다.”
“네.”
아영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대답했다.
***
결혼식은 스몰웨딩으로 선택했다.
일생에 한 번뿐인 결혼식인데 후회하지 않겠냐는 태하의 질문에 아영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보여 주기식 결혼보다 진심으로 축하해 주는 사람들과 조용하게 하고 싶었다.
눈부시게 화창한 날. 야외 정원에서는 결혼식 준비가 한창이었다.
단상 앞에는 둥근 아치를 따라 색색의 꽃이 수놓아져 있었고, 버진로드를 따라 새하얀 장식이 우아한 곡선을 그리며 늘어졌고, 열 개의 테이블 위에는 콘셉트별로 각기 다른 꽃들이 놓여 있어 보는 즐거움을 더했다.
그 모습을 2층 창가에서 내려다보던 아영은 떨리는 숨을 내쉬었다.
그가 뒤로 다가와 오프숄더 드레스 위로 드러난 그녀의 어깨 위로 손을 올렸다.
“긴장돼?”
“조금.”
따뜻한 체온이 닿자 창밖을 보던 아영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러자 그가 그녀의 잘록한 허리에 손을 올려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얇은 실크 드레스 위로 그의 단단한 하체가 부딪혔다.
“내가 긴장 풀어 줄까?”
“어떻게?”
아영이 그의 셔츠에 달린 단추를 만지작거리며 속눈썹을 들어 올렸다.
“숨을 크게 들이쉰 다음 천천히 내쉬어 봐.”
아영은 그의 말에 따랐다.
경직되었던 몸이 조금 가벼워지긴 했지만, 긴장이 완전히 떨어지진 않았다.
그러자 그녀의 표정을 살피던 그가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잠깐 이리 와서 앉아 봐.”
그녀를 창가 근처에 있는 의자에 앉힌 그는 우아하게 조각된 의자 등받이에 편하게 기대게 한 다음 그녀 등 뒤에 섰다.
“눈 감아.”
아영은 그의 말을 따라 눈을 감았다.
태하는 잘게 떨리던 그녀의 눈꺼풀이 고요해질 때까지 기다린 다음 천천히 그녀의 두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그러고는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여린 어깨를 지그시 눌렀다.
“읏.”
긴장으로 인해 뭉쳐 있던 근육이 눌리자 그녀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신음이 새어 나왔다.
“조금만 참아.”
그가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더운 숨이 귓속을 파고들자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태하는 좁혀진 그녀의 어깨를 천천히 푼 뒤 목덜미를 따라 마사지했다. 때론 부드럽게 때론 강하게.
“흐음.”
뾰족하게 곤두섰던 긴장이 서서히 풀어지자 그녀의 고개가 뒤로 젖혀지면서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녀의 얼굴을 위에서 내려다보던 그가 나직한 어조로 물었다.
“좋아?”
“응. 좋아.”
아영은 눈을 감은 채 그의 손길에 녹아들었다.
딱딱했던 그녀의 어깨 근육이 부드러워지자 그가 상체를 낮추더니 자신의 손길이 지나간 곳에 입을 맞췄다. 그러자 매끄러웠던 살갗 위로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흣. 지금 뭐 하는…….”
단단한 손가락이 아닌 뜨거운 입술이 닿자 아영은 움찔 떨었다. 그러자 그가 그녀의 어깨에 뭉근하게 입술을 비비며 낮게 뇌까렸다.
“키스하고 싶은데 립스틱 지워질까 봐 참는 거야.”
“엄마!”
그 순간 문이 벌컥 열리더니 서준이 뛰어 들어왔다.
화들짝 놀란 아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바람에 그의 입술을 치고 말았다.
“윽!”
“미안. 괜찮아?”
그녀 어깨에 입술을 부딪친 그가 낮게 신음했다.
그 소리에 놀란 아영이 황급히 몸을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아픈지 그의 미간이 바짝 좁혀 있었다.
“아빠, 아파요?”
“아, 아니야. 괜찮아.”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서준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그가 부딪혀 얼얼한 입술로 애써 웃어 보였다.
“그런데 서준이 무슨 일로 왔어?”
“할아버지가 결혼식 시작한다고 빨리 내려오래요.”
“그래? 같이 가자.”
“엄마는 내 손 잡아.”
그가 서준에게 손을 내밀었다. 서준이 그의 손을 잡으며 다른 한 손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그럴까?”
세 사람은 나란히 그들을 축하해 주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들 곁으로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