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5화 (75/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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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 대해선, 별말씀 없으셨어?”

긴장한 표정으로 태하의 대답을 기다리는데 그녀의 손끝이 잘게 떨렸다.

그가 그녀의 손을 따뜻하게 감싸 쥐며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솔직히 네가 고아라는 얘기에 탐탁지 않아 하신 건 사실이야.”

그것뿐일까. 집안도, 형편도, 직업도……. 뭐 하나 마음에 든 게 없으실 거다.

그런 자신을 며느리로 들이고 싶지 않은 마음은 아영도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왜냐하면, 재계를 주름잡고 있는 서일그룹의 며느리가 되고 싶은 여자들이 줄을 섰을 테니까.

아영은 새삼 그와 저 사이에 보이지 않는 거대한 벽이 서 있는 것처럼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래서 말씀드렸지. 만약 결혼 반대하시면 나뿐만 아니라 서준이도 다시 볼 수 없을 거라고. 나보다 서준이를 볼 수 없다는 말에 더는 아무 말씀도 못 하시더라.”

“아버지를 협박한 거야?”

“협박이라니. 내 의지를 말씀드렸을 뿐이야. 그러니 넌 아무 걱정 하지 말고, 나만 믿고 결혼하면 돼.”

태연자약한 그의 대답에 아영은 어이가 없어 헛웃음만 나왔다.

그의 저돌적인 성격은 익히 잘 알고 있었지만, 결혼 승낙까지 막무가내로 밀어붙일 줄은 몰랐다.

“너 때문에 나 미움받으면 어떡해.”

“그럴 일도 없을 테지만, 우리 아버지께 잘 보일 필요도 없어. 넌 나와 결혼한 거지 우리 아버지와 결혼한 게 아니니까.”

그가 그녀의 얼굴 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며 덧붙였다.

“그리고 같이 살지 않을 거니 자주 볼 일 없을 거야. 나 모르게 널 부르게 하지도 않을 거고. 연락도 없이 우리 집에 찾아오는 일도 없도록 할 거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필요해. 왜냐하면, 집은 우리 가족의 사적인 공간이니까. 아무리 아버지라 해도 함부로 들어와선 안 되는 거야. 그러니까 넌 나하고 서준이만 신경 써. 알았지?”

“그럴게.”

그가 깍지 낀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그녀의 볼이 발그레해지자 그의 눈빛이 짙게 가라앉더니 이내 손을 뻗어 그녀의 목덜미를 끌어당겼다.

뜨거운 숨이 부딪혔다.

***

「세계적인 모델 대니얼 권, 동갑내기 비연예인과 전격 결혼!」

두 사람의 결혼 소식이 기사에 실리자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발칵 뒤집혔다.

그가 갑자기 결혼하는 것도 놀라운데, 비연예인과 이미 혼인 신고를 마친 상태이며, 둘 사이에 다섯 살 난 아이까지 있다는 사실에 팬들은 패닉에 빠졌다.

하지만 한 여자를 10년 넘게 사랑한 그의 순정이 알려지면서 배신감에 휩싸였던 팬들은 그의 지고지순한 사랑에 두 사람의 결혼을 열렬히 축하해 주었다.

“이게 말이 돼?”

소파에 앉아 휴대폰으로 기사를 읽던 아영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뭐가.”

“어떻게 한 달 만에 결혼 준비를 해?”

“난 가능해. 그러니까 넌 웨딩드레스만 골라. 나머지는 내가 다 알아서 준비할 테니까.”

그는 전혀 문제 될 게 없다는 듯 자신만만한 어조로 말했다.

“뭘 어떻게 알아서 하겠다는 거야?”

“내가 언제 널 실망하게 한 적이 있던가?”

생각해 보니 한 번도 없었다. 아영이 마지못해 고개를 가로젓자 그가 씩 웃으며 말했다.

“그럼, 남편 말 믿어.”

“뭐? 남편?”

그의 낯 뜨거운 말에 그녀의 귓가가 붉어졌다.

그가 태연히 말을 이었다.

“이제 서준이도 있으니 호칭에 신경 써야지. 그러니까 앞으로 너도 이름으로 부르지 마.”

“그럼 뭐라고 불러?”

“왜, 많잖아. 여보, 자기, 허니 등등.”

“헉.”

한 번도 불러 보지 못한 호칭들을 태연하게 내뱉는 태하를 보며 아영은 민망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자 그가 진지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난 서준이에게 좋은 부모가 되고 싶어.”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좋은 부모가 되려면 아이들 앞에서 모범이 되는 행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 자식은 부모의 거울이니까. 안 그래?”

“그, 그렇긴 하지.”

어째 점점 그에게 말려 들어가는 것 같지.

“그럼 한번 불러 봐.”

“뭐?”

듣는 것도 민망해 죽겠는데 불러 보라니 말도 안 돼.

“지금부터 연습해야 할 거 아니야. 서준이 앞에서 어색하지 않으려면.”

그가 어서 해 보라는 듯 기대 어린 시선으로 빤히 쳐다보았다.

아영은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그녀가 할 때까지 기다릴 심산인지 그는 시선을 떼지 않았다.

부담스러움을 견디지 못한 그녀가 시선을 회피했다.

“지금은 그렇고 다음에 할게.”

“다음에 언제?”

집요한 그의 질문에 아영은 숨을 길게 내쉬었다.

“마음의 준비가 되면.”

“서준이를 위한 일인데 마음의 준비까지 해야 해?”

그가 그녀의 약점인 서준을 들먹거리자 아영이 발끈했다.

“알았어. 하면 되잖아.”

“잘 생각했어. 서준이를 위한 일이라 생각하고 눈 딱 감고 해 봐.”

그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살살 달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를 힘주어 노려보던 아영은 마른침을 삼켰다.

이게 뭐라고 긴장이 되는 건지.

감은 눈을 뜬 아영은 입 안에 맴도는 말을 꺼내기 위해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그러자 그의 눈빛이 기대감에 반짝였다.

“여…… 보.”

처음 불러 보는 호칭에 목까지 붉어진 채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녀의 모습을 쳐다보던 그가 갑자기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와락 껴안았다.

그의 단단한 품에 갇힌 아영은 답답한 듯 그의 등을 콩콩 때렸다.

“잠깐만 있어 봐.”

“숨 막혀.”

그제야 못 이긴 척 그녀를 안은 손에 힘을 뺀 그가 말했다.

“그러게 누가 그렇게 사랑스러우래?”

마치 제 잘못이 아니라 그녀 잘못이라는 듯.

“뭐?”

밉지 않은 그의 뻔뻔함에 눈을 흘기던 아영은 어이가 없어 피식 웃었다.

미소 띤 그녀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그가 이내 나직한 목소리로 불렀다.

“아영아.”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조금 전까지 장난스러웠던 눈빛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그녀를 향한 짙은 열망이 자리하고 있었다.

순간 그녀의 몸에 더운 열기가 확 올라왔다.

모를 수가 없었다. 그의 눈빛에 담긴 의미를.

그녀의 입 안에 침이 고였다.

“지금 당장 널 안고 싶어.”

탁하게 뇌까린 그의 말에 미처 삼키지 못한 침이 목에 걸렸다.

오늘은 휴무였고, 아직 서준이 어린이집에서 오려면 한참 시간이 남았지만, 정오도 지나지 않은 밖이 지나치게 밝은 게 신경이 쓰였다.

모든 게 드러나 보일 것처럼 큰 게스트하우스의 창문도.

그녀의 시선이 창가로 향하자 이내 문제점을 간파한 그는 성큼 걸어가 커튼을 쳤다.

암막 기능 때문에 거실이 완벽한 어둠에 잠기자 태하는 샹들리에 대신 간접 등을 켰다.

은은한 불빛 아래 두 사람의 실루엣만 덧그리듯 선명해졌다.

“이제 괜찮아?”

그녀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다행이라는 듯 씩 웃자 전염이라도 된 듯 따라 웃던 그녀는 짙게 일렁이는 그의 눈빛과 마주치자 서서히 미소가 사라졌다.

저벅저벅. 그가 다가왔다. 오늘이 처음도 아닌데 아영은 그가 거리가 좁혀 올수록 가슴이 쿵쿵 뛰어 귀가 먹먹할 지경이었다.

곧 그가 걸음을 멈추자 그녀도 숨을 멈췄다. 그가 손을 뻗어 와 그녀의 얼굴을 감쌌다. 얼굴이 내려오고 곧이어 입술이 닿았다.

촉. 맞닿은 입술이 델 듯 뜨거웠다. 그가 뜨거운지 그녀가 뜨거운지 알 수가 없었다.

촉. 촉. 짧게 닿았다 떨어지는 그의 입맞춤에 갈증이 났다. 아영은 손을 뻗어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그녀의 적극적인 행동에 그의 눈이 놀라 커졌다. 항상 수동적으로 받기만 하던 그녀였으니 그럴 수밖에.

그 눈빛을 보는데 왠지 모르게 자신감이 생겼다.

아영은 발뒤꿈치를 들어 올려 그의 입술에 키스했다. 닫힌 그의 입술을 맛보듯 핥던 아영은 이내 그 안으로 파고들었다.

단단한 성문처럼 굳건히 닫혀 있던 그의 입술은 그녀의 보드라운 혀가 천천히 쓸어올리자 이내 얼마 버티지 못하고 스르륵 열렸다. 아영은 대담하게 그 안을 가르고 들어갔다.

문지기처럼 지키고 있던 그의 혀가 닿자 그가 했던 것처럼 교차하듯 위아래로 쓸더니 이내 그의 혀를 휘감았다.

어설프게 엉켜 오는 그녀의 혀 놀림에 그의 입에서 끙하고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 순간 가까스로 억누르고 있던 이성의 끈이 끊어진 건지 그가 갑자기 그녀의 얼굴을 감싸 쥐더니 키스를 퍼붓기 시작했다.

아영은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그의 키스에 혼이 나간 듯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결국, 다리에 힘이 풀린 그녀가 버티지 못하고 휘청하자 그가 재빨리 그녀의 허리를 붙잡았다.

“꺄악.”

갑자기 몸이 하늘로 붕 떠오르자 깜짝 놀란 그녀가 소릴 질렀다.

“가만히 있어. 여기서 널 안고 싶지 않으니까.”

가뿐하게 그녀를 안아 올린 태하가 걸음을 옮겼고, 허공에서 허우적거리던 그녀의 손이 본능적으로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그녀가 내뱉는 뜨거운 숨이 목덜미에 닿자 그의 가슴이 팽팽하게 당겼다.

“돌겠네.”

그가 씹어뱉듯 내뱉었다. 긴 다리를 이용해 순식간에 2층에 도착한 그는 그녀를 침대에 내려놓았다.

그는 말려 올라간 그녀의 치마를 보며 양팔을 교차해 티셔츠를 벗어 던졌다. 그러자 그 아래 감춰져 있던 성난 근육이 들썩였다.

광활하리만큼 넓은 어깨와 양쪽으로 우아하게 뻗은 빗장뼈, 단단하게 솟은 가슴, 음각 양각이 선명한 복근, 그리고 바지 안으로 사라지는 아찔한 선을 따라 내려가던 아영은 아까와 확연히 다른 바지 형태에 두 눈이 커졌다.

그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바지 버클을 풀었다.

곧이어 바지와 함께 브리프가 내려갔다.

순식간에 전라가 된 그의 모습에 아영은 숨 쉬는 것도 잊었다.

“좋은 관람이었길 바라.”

제 몸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그녀의 모습이 만족스러운지 태하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뭐, 나쁘지 않네.”

그제야 자신이 넋을 놓고 보고 있었다는 걸 깨달은 아영은 새침하게 말했다.

창피함에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지만, 방 안이 어두워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관람료는?”

“관람료?”

그가 위험한 눈빛을 빛내며 침대 위로 다가왔다. 그의 체중이 실리자 침대가 묵직하게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그녀의 몸 위로 그의 그림자가 드리워지자 그녀의 숨결이 잘게 떨렸다.

“난 돈 말고 몸으로만 받거든.”

그의 커다란 몸이 그녀를 집어삼켰다.

삼키고 또 삼켰다.

밤 같은 어둠이 끝날 때까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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