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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상처만 생각하느라 그가 받을 상처는 생각하지 못했다.
자신이 얼마나 못난 인간이었고, 그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주었는지 깨달은 아영은 뼈아픈 후회가 밀려왔다.
눈시울이 붉어진 아영의 눈에 금세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그때의 자신은 집을 잃은 나비처럼 어디에도 안착할 수가 없었다.
집은 불이 나서 갑자기 사라졌고, 떠날 예정인 그의 임시 거처에 자신의 짐을 풀기도 부담스러워 필요한 게 생기면 그때그때 가방을 열어 꺼내 쓰곤 했다.
그런 자신을 보며 불안해할 줄은 몰랐다. 이미 내 불안에 잠겨 그의 불안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때의 자신은 상처받기 싫어하는 고슴도치처럼 제 몸에 가시를 잔뜩 세우고 있었다.
그랬기에 그가 다정하게 대해도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도 그럴 거라고 가볍게 받아넘겼고, 저를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볼 때면 착각일 거라며 의미를 두지 않으려 애썼으며, 그가 자신을 뜨겁게 안아 주었을 때는 사랑이 아닌 욕망이라는 이름으로 치부했다.
누구보다 그의 사랑을 갈구했음에도.
“다시 만난 넌 내가 어떤 말을 해도 믿으려 하지 않았지. 그런데도 네가 포기가 안 되더라. 날 미워하고 원망해도 좋으니까 내 옆에 두고 싶었어. 그래서 서준이 핑계를 대며 결혼을 제안했던 거야.”
모든 게 자신의 오해로 비롯된 일이었다는 걸 깨달은 그녀의 볼 위로 뜨거운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미안해.”
“넌 아무 잘못 없어. 너에게 제대로 믿음을 주지 못한 내 잘못이야.”
그가 손을 뻗어 그녀의 눈물을 닦아 주며 말했다. 하지만 닦은 게 무색하게 또다시 흘러내렸다.
아영은 서둘러 눈물을 밀어내며 말했다.
“그렇지 않아. 임신했을 때 내가…… 겁먹지 말고 아이에 대해 너한테 제대로 얘기했다면……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지는 않았을 거야. 흐흑. 정말 미안해.”
아영은 말하면서도 중간중간 목이 메는지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그러다 결국은 참지 못하고 터져 나온 눈물에 흐느꼈다.
태하는 그런 그녀를 자신의 너른 품으로 끌어당겼다. 그러고는 작은 등을 들썩이며 우는 그녀의 여린 등을 천천히 위아래로 어루만졌다.
“쉬─. 울지 마. 지나간 시간은 덮어 두자. 어쨌든 우리는 다시 만났고 이제는 절대 헤어지지 않을 거니까.”
그가 숨을 삼킨 뒤 나직하게 덧붙였다.
“사랑해. 이아영.”
태하의 사랑 고백을 들은 순간 아영의 울음이 더욱 커졌다. 어깨뿐만 아니라 가슴까지 들썩이며 목 놓아 울었다.
“이아영, 왜 그래? 내가 뭐 잘못했어?”
그녀의 울음이 갑자기 커지자 그는 자신이 뭔가 잘못한 줄 알고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럴수록 아영은 더욱 서럽게 울었다.
엄마 장례식 때도 조용히 눈물만 훔치던 그녀가 꺼이꺼이 소리 내어 울자 그는 당황했다.
“나쁜 놈. 진작 좀 말해 주지. 허엉엉엉. 난 네가 날 좋아하는지도 모르고…… 혼자 얼마나 끙끙 앓았는데…… 흐어엉.”
아영이 그의 가슴팍을 작은 주먹으로 콩콩 치며 설움을 쏟아 냈다.
그제야 그녀의 마음을 알아챈 그가 제 가슴을 치는 그녀의 두 손을 잡은 뒤 제 품에 가두었다.
“미안해. 쑥스러워 말은 못 했지만 나름대로 충분히 표현했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너도 내 마음을 아는 줄…….”
“바보야! 말을 안 하는데 내가 어떻게 알아?”
“그래. 내가 잘못했어. 다시는 안 그럴 테니까 그만 울어. 응, 아영아.”
그의 말처럼 그만 울고 싶은데, 다정한 그의 목소리에 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태하는 그녀의 울음이 잦아들 때까지 한 줌도 안 되는 그녀의 작은 등을 어루만지며 연신 사랑한다고 속삭였다.
마치 그동안 하지 못했던 그 말을 토해 내듯, 그녀의 귀에 박히고, 그녀의 가슴에 새겨지도록.
그녀의 눈물로 그의 가슴팍이 젖어 들 때쯤, 멈추지 않을 것 같았던 그녀의 눈물이 멈췄다.
그러자 그는 제 품에 안긴 그녀를 살짝 떼어 얼굴부터 살폈다.
눈물로 얼룩진 그녀의 눈가와 코끝이 빨갰다.
제 얼굴 상태가 어떨지 대충 짐작이 간 그녀는 창피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가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그녀의 얼굴을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꼼짝없이 마주 보게 되자 민망함에 붉게 달아오른 아영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런 그녀를 사랑스럽다는 듯 쳐다보던 그가 손을 뻗어 그녀의 이에 물린 아랫입술을 조심히 잡아 뺐다.
그녀의 새하얀 이에 짓눌렸던 입술이 새빨갰다. 마치 탐스러운 체리처럼.
순간 그의 눈빛이 검은 밤바다처럼 어둡게 가라앉더니 일렁이기 시작했다.
이내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그녀의 얼굴을 붙잡은 그는 그대로 입술을 집어삼켰다.
그가 빨려 들어간 그녀의 입술을 거칠게 빨아 당겼다.
그의 사나운 키스에 짜릿한 통각이 일자 그녀도 모르게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 소리를 들었는지 흡착하듯 빨아당기던 그가 마치 미안하다는 듯 혀로 에워쌌다.
그의 보드라운 혀에 휘감기자 아까와 다른 쾌감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그러자 작은 새처럼 그의 품에 안겨 있기만 하던 그녀가 손을 뻗어 그의 목을 감쌌다.
아영의 적극적인 행동에 억누르고 있던 욕구가 폭발했는지, 그녀를 으스러지도록 껴안은 태하는 그녀 안으로 더 깊이 파고들어 와 그녀를 저로 가득 채웠다.
때로는 넘실거리는 잔잔한 파도처럼, 또 때로는 거센 물보라가 이는 것처럼 그녀를 헤집더니 곧이어 그녀의 타액을 모조리 앗아간 그는 태풍처럼 그녀 안을 휘몰아쳤다.
“하아. 하아.”
그의 입술에 가까스로 놓여난 그녀는 목까지 엉켜 있던 달뜬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그가 손을 뻗어 그녀의 입술에 남아 있는 투명한 타액을 엄지손가락으로 밀어 닦고는 열기 띤 목소리로 말했다.
“사랑해.”
“…….”
“이아영, 넌?”
자신의 사랑 고백에도 아영이 아무 말이 없자 그가 긴장한 얼굴로 되물었다.
초조한 표정으로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는 그를 보며 아영은 아까부터 입 안에서 맴돌았던 말을 꺼냈다.
“나도 사랑해.”
수줍은 듯 꺼낸 그녀의 속마음을 들은 그의 얼굴이 벅차오르더니 그녀를 와락 껴안았다.
단단한 그의 몸이 조이자 숨이 막힌 아영은 그의 가슴을 두들겼다.
“미안. 너무 좋아서 그만.”
흥분해 힘 조절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걸 깨달은 그가 황급히 손에서 힘을 풀며 사과했다.
아영은 미안해하는 그를 보며 사랑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에는 차갑고 냉정한 그가 저한테만 쩔쩔매는 것 같아서.
RRRRR. RRRRR. RRRRR.
그때 그녀의 가방 안에 있던 핸드폰이 울렸다.
벨 소리에 놀란 아영이 재빨리 그의 품에서 벗어나 핸드폰을 꺼냈다.
전화를 건 사람이 카페 사장 현성인 걸 알고 그녀의 두 눈이 커졌다. 아영은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아영 씨, 혹시 오늘 무슨 일 있어요?]
“네?”
[아니, 출근 시간이 넘었는데도 아직 안 오셔서요.]
무슨 일이 있지 않으면 지각한 적 없는 그녀였기에 현성의 목소리에 걱정이 가득했다.
그제야 아영은 자신이 출근 시간보다 20분이나 늦었다는 걸 깨달았다.
당황한 아영은 사과부터 했다.
“아, 죄송해요.”
[늦잠 잤어요?]
“아니요. 버, 버스를 놓치는 바람에.”
차마 태하와 있다는 말을 할 수 없어 아영은 거짓말을 했다.
그녀의 거짓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태하가 미간을 확 구겼다. 하지만 그녀는 통화하느라 그의 얼굴은 보지 못했다.
[별일 없으면 됐습니다. 천천히 오세요.]
“얼른 가겠습니다.”
[그러다 사고 나면 어쩌려고요. 제가 대신 주문 받고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말아요.]
걱정하지 말라는 현성의 말이 아영은 더 부담스럽기만 했다.
그때 두 사람의 통화 내용을 잠자코 듣고 있던 태하가 갑자기 그녀의 손에 있던 핸드폰을 빼앗아 갔다.
“이리 줘.”
놀란 그녀가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태연하게 그녀의 핸드폰을 자신의 귀에 댔다.
“아영이는 걱정하지 마세요. 내가 알아서 잘 데려다줄 테니까.”
그러고는 현성의 대답도 듣지 않고 전화를 끊어 버렸다.
아영은 그의 행동에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짓이야?”
“사랑하는 남자 앞에서 잘도 다른 남자와 통화하네?”
“남자가 아니라 카페 사장님이야.”
“그리고 널 좋아하는 남자지.”
그의 지적에 따지려던 아영은 입을 다물었다.
“아무래도 불안해서 안 되겠다. 당장 혼인 신고부터 하자.”
“뭐? 혼인 신고?”
“결혼식 올리려면 준비할 것도 많으니 혼인 신고부터 해 놓고 마음 편히 하는 게 나을 것 같아. 그래야 찝쩍거리는 놈들도 없을 거고.”
그가 현성을 염두에 두고 말했다. 질투 섞인 그의 어조에 옅게 웃던 아영은 문득 중요한 걸 간과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혹시 서준이에 대해서…… 아버님은 아셔?”
“말씀드렸어.”
그녀가 눈이 커다래졌다.
“언제?”
“친자 확인 결과 받자마자.”
그렇게 빨리?
“뭐라고, 하셔?”
아영이 조심스럽게 묻자 그녀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그가 입을 열었다.
“좋아하셨어. 그것도 무척.”
“좋아하셨다고?”
예상했던 답이 아니라서 아영은 어리둥절했다.
그도 그럴 게 고아에다 별 볼 일 없는 직업이라고 생각할 게 뻔한 카페 매니저인 저와의 사이에서 난 아이를 마음에 들어 하셨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혹시 내가 상처받을까 봐 일부러 사실과 다르게 말하는 게 아닐까 걱정하고 있던 순간.
“그래.”
마치 그녀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그가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너도 알겠지만, 우리 집 손이 귀해. 자식이 나뿐인데 해외에 나가 있어 얼굴 한번 보기도 어려우니 이대로 대가 끊기는 게 아닐까 매번 노심초사하셨거든. 그래서 그런지 아들이 있다는 내 말에 되레 한시름 놓았다며 안도하셨어.”
천만다행이었다.
서준이를 천덕꾸러기로 생각하실까 봐 내심 조마조마했던 그녀였다.
“나에 대해선, 별말씀 없으셨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