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제 첫사랑이거든요. 아영이가.”
그가 나직하게 덧붙이는 말에 놀라 아영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그 순간 속을 알 수 없는 그의 눈빛과 마주쳤다.
이 순간을 모면하려고 그냥 한 말이겠지.
마음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마치 그의 말이 연기가 아닌 진짜 같아서.
“그래서 지금도 결혼해 달라고 사정하고 있습니다.”
그가 지긋한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의 이야기를 들은 민우 엄마와 주위에 있던 다른 엄마들은 ‘당신이 뭔데 감히 대니얼의 청혼을 거절해?’라는 얼굴로 쳐다보았다.
아영은 한순간에 분수도 모르는 여자가 돼 버렸다.
RRRRR. RRRRR. RRRRR.
순간 그의 주머니에 있던 핸드폰이 울리자 사람들의 시선이 분산되었다.
아영은 조였던 숨통이 조금 트인 것 같아 때마침 걸려 온 전화가 고마웠다.
“잠시만요.”
태하는 양해를 구하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어. 그래? 알았어. 다시 전화할게.”
전화를 끊은 그가 주머니에 핸드폰을 집어넣으며 말했다.
“죄송하지만, 그만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아, 그럼요. 바쁘실 테니 어서 가 보세요.”
“앞으로 우리 서준이와 아영이 잘 부탁드립니다.”
“어머, 저희가 잘 부탁드려야죠.”
그의 정중한 인사에 민우 엄마와 학부모들은 어쩔 줄을 몰랐다.
인사를 마친 그는 조수석으로 걸어가 차 문을 열었다.
“아영아, 타.”
그의 행동에 여자들은 부러움 가득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아영은 민망함을 꾹 참으며 조수석에 올라탔다.
운전석으로 돌아온 그는 곧 차에 시동을 걸었고, 이내 차는 부드럽게 어린이집을 빠져나갔다. 그들 뒤로 부러움과 질투 섞인 시선이 따라붙었다.
차가 큰 도로로 접어들자 내내 조수석 창문만 쳐다보고 있던 아영이 입을 열었다.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했어?”
“뭘?”
정면을 주시하던 그가 힐끗 쳐다보았다.
아영은 제 얼굴에 닿은 그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그가 무심하게 내뱉은 말에 아직도 심장이 제 자리로 돌아오지 못했다.
이게 다 권태하 탓이었다.
“사람들의 말에 일일이 대꾸할 필요까진 없었잖아.”
“묻길래 대답해 줬을 뿐이야.”
“그냥 넘어갔으면 꼬치꼬치 캐묻지도 않았을 거야.”
“아마 피했으면 더 이상하게 생각했을걸?”
그의 말이 틀리지 않는다는 건 안다. 오히려 침묵이 더 큰 오해를 낳는 법이니까.
특히 소문엔 더더욱.
태하가 갑자기 차선을 변경하더니 갓길에 차를 세웠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조수석에 앉은 아영을 돌아보았다.
“화난 이유가 뭐야?”
“안 났어.”
아영은 차마 그의 말에 널뛰는 심장이 싫어서 그런 거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너 화나면 손톱 잡아 뜯잖아.”
그가 마주 잡은 그녀의 손을 힐끗 내려다보았다. 생각 없이 따라간 시선 끝에 엉망으로 갈라진 제 손톱이 보였다.
아영은 황급히 손등으로 감췄다. 창피해 얼굴에 피가 몰렸다.
“널 화나게 할 생각은 없었는데 미안해.”
“네가 왜 사과해?”
그의 입에서 사과의 말이 튀어나오자 아영은 미간을 좁혔다.
“널 화나게 했으니까.”
“너 때문에 화난 거 아니야.”
“아니면?”
그의 시선이 집요하게 달라붙었다. 더 있다가는 그에게 저의 못난 속내를 들킬 것 같아 아영은 불안했다.
“나 버스 타고 갈게. 저기서 좀 세워 줘.”
“나도 게스트하우스 가는 길이니까. 같이 가.”
그는 그녀의 핑계를 단숨에 날려 버렸다.
“사람들 눈에 띄어서 좋을 거 없잖아.”
“어차피 오늘 중으로 전 국민이 알게 될 텐데 굳이 숨길 필요 있을까?”
“그게 무슨 말이야?”
“좀 전에 걸려 온 전화 매니저였어. 아침에 너희 집에서 나오는 걸 보고 누군가 언론사에 제보한 모양이야.”
“벌써?”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다. 서준의 손을 잡고 점프 놀이를 하느라 미처 사람들 시선을 신경 쓰지 못했다.
아영은 그제야 자신이 얼마나 큰일을 벌인 건지 깨달았다.
가방을 쥔 손이 파르르 떨려 왔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해?”
“기사 나서 등 떠밀 듯 인정하는 것보다, 우리가 먼저 기사 내는 게 사람들의 반감도 덜 사고 좋을 것 같긴 한데.”
“기사를 먼저 내보내자니. 어떻게?”
예상보다 빠르게 돌아가는 상황에 아영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자 그녀를 쳐다보는 그의 눈매가 짙어졌다.
“이렇게 된 이상 결혼 발표 하자.”
“뭐? 결혼?”
아직 마음을 정하지도 못했는데 또다시 결혼 이야기를 꺼내자 그녀는 미간을 찌푸렸다.
“서준이가 있다는 게 밝혀진 마당에 결혼까지 안 한다면, 더 안 좋은 소문에 휩싸이게 될 거야. 솔직히 아직 한국에서 싱글맘 좋게 보진 않잖아. 나 역시 내 아이를 내팽개친 나쁜 놈이 될 테고. 그리고 무엇보다 서준이를 이 혼란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하고 싶지 않아.”
그건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이 일로 서준이 다치는 걸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쫓기듯 결혼하고 싶지는 않았다.
다른 사람도 아닌 권태하와.
“결혼이 해결책이 될 순 없어.”
“내가 다 버리고 한국에서 살겠다면 나랑 결혼할래?”
아영은 제 귀를 의심했다.
최고의 자리에 오른 그가 모든 걸 버리고 한국에서 살겠다고? 말이 되지 않는 소리였다.
“진심이야?”
“계속 진심이었어. 너와 내 아이를 지키고 싶어. 그러니까 서준이를 생각해서라도 나에게 다시 기회를 줘.”
직선으로 날아든 그의 곧은 시선이 그녀 안으로 파고들었다.
“우리가 결혼한다고 행복할 수 있을까? 그때 네가 날 좋아했다고 했지만 지금은 서준이 때문에 나를 아직도 좋아한다고 착각하는 거일 수도 있어. 감정 없는 결혼 생활이 행복할 리 없잖아.”
“나 너 좋아해. 아주 옛날부터 좋아했고 지금도 좋아해. 사실 너 좋아한 지 꽤 됐어. 고등학교 입학식 날 첫눈에 반했거든.”
“그게 무슨…….”
아영은 뇌 어딘가가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입만 벙싯거릴 뿐 말이 되어 나오지 않았다.
말도 안 돼. 그때부터 날 좋아했다고?
하지만 그런 낌새는 전혀 없었다.
그녀가 주위에 무신경한 성격이긴 했지만 그는 학교에서 연예인 못지않은 유명인이었기에 그는 어딜 가든 눈에 띄었다.
그랬기에 그가 어떤 눈빛이나 행동을 했다면 모를 수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와 제대로 대화라는 걸 나눠 본 건 졸업식 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만약 그가 정말 자신을 좋아했다면 졸업식 날 자신의 첫 키스를 훔치고 사과를 할 게 아니라 고백을 해야 했다.
아니면 5년 뒤 다시 재회했을 때라도.
하지만 그땐 제 몸만 원했던 그였다.
아영은 어이가 없다 못해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재미없으니까 장난 그만해.”
“내가 지금 장난하는 것 같아?”
그의 눈가가 굳어졌다.
“장난이 아니면! 어떻게 날 좋아했다는 사람이 지금껏 한 번도 말을 안 할 수가 있어? 그게 말이 돼?”
“하려고 했어.”
“언제.”
“5년 전 네가 날 떠나기 전에.”
“뭐?”
아영은 순간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녀의 눈동자가 빠르게 일렁이는 걸 본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미국에 갔을 때 눈보라를 뚫고 너한테 프러포즈할 반지를 샀어. 만약 결혼이 부담스럽다면 약혼이라도 할 생각이었거든. 그런데 이상하게 한국에 오기 전부터 너와 연락이 잘 되지 않길래 폭설로 인해 통화가 매끄럽지 않은 상황이었으니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어.”
그때 그녀는 일부러 그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런데 공항에 도착해서 바로 집으로 오는데 당연히 있어야 할 네가 보이지 않는 거야. 잠깐 나갔나 하고 기다리는데 한 시간을 기다려도 안 오는 거야. 불길한 예감이 들어서 전활 했더니 전화기가 꺼져 있더라고.”
그는 말하면서 감정이 격해지는지 숨을 끊어 쉬었다. 점점 고조되는 마음을 애써 가라앉힌 뒤 덧붙였다.
“서둘러 드레스룸으로 달려갔더니 항상 있던 자리에 네 가방이 없더라. 그제야 뭔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지. 사실 내내 불안했어. 마치 언제든 떠날 준비를 하던 사람처럼 절대 풀지 않던 네 가방을 본 순간부터 어쩌면 예상했던 일이었는지도 모르지. 그렇다고 말도 없이 떠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지만.”
그의 말끝에 허탈함이 묻어 있었다.
“처음엔 네가 날 떠났다는 걸 받아들일 수가 없었어. 분명 나에게 말 못 할 사정이 생겼을 거라는 생각에 미친놈처럼 널 찾아 헤맸어. 하지만 작정하고 숨은 널 찾기란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만큼 어렵더라. 그런 날 보며 캐리가 너한테 다른 남자가 생긴 게 아니냐고 바람을 넣었지.”
미친.
날 거짓말로 쫓아낸 것도 모자라 모함까지 하다니.
정말 그 여자는 인간 말종이었다.
“처음엔 나도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치부했어. 하지만 널 찾지 못한 시간이 길어질수록 불안은 점차 의심으로 바뀌더라고. 그래서 차진혁을 찾아갔어.”
“뭐? 선배한테?”
그녀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래. 차진혁이 널 숨겨 둔 게 아닐까 의심했거든.”
“선배 결혼한 사람이야. 그런데 내가 어떻게 선배한테 갈 수 있겠어?”
“이미 돌아 버린 난 이성적인 사고 판단을 할 수가 없었어. 다짜고짜 차진혁을 찾아가 너 어디 있냐고 캐물었지. 차진혁은 모른다고 하더라고. 당연히 잡아뗄 거라고 예상했기에 차진혁에게 사람을 붙였지. 그런데 한 달 동안 어떤 움직임도 없는 걸 보고 내가 잘못 짚었다는 걸 깨달았어. 난 점점 널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초조해져 갔어. 시간이 지날수록 너에 대한 걱정은 원망으로 변했고, 나중에는 분노로 바뀌더라.”
그의 얼굴에 짙은 그늘이 드리워졌다.
아영은 억울하면서도 그가 오해할 여지가 있었음을 인정했다.
그도 그럴 게, 선배를 좋아한다고 여겼던 마음이 동경이었다는 걸 알아차린 뒤 그에게 제 마음을 밝히지 않았다.
그러니 그는 아직도 그녀가 선배를 마음에 두고 있다고 오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너와 다시 재회했을 때 내가 받았던 상처만큼 너에게 되돌려 주고 싶었어. 네가 떠난 5년이 나에겐 지옥이나 다름없었으니까. 그래서 이를 악물고 못되게 굴었어. 하지만 상처받은 네 얼굴을 볼 때마다 시원하기는커녕 내 마음도 찢어져 너덜거리는 걸 보며 아직도 널 사랑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