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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에 앉은 태하는 서준이 고른 샌드위치의 포장지를 먹기 좋게 반으로 접어 주었다.
그걸 건네받은 서준이 바로 먹지 않고 망설였다.
“서준아, 피클 빼 줄게.”
서준이 망설이는 이유를 눈치챈 아영이 말했다.
그때 태하가 보란 듯이 샌드위치를 크게 한 입 베어 물더니 맛있게 먹었다.
아빠가 먹는 모습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서준이 이내 들고 있던 샌드위치를 베어 물었다.
아영은 피클을 빼지 않았는데도 잘 먹는 서준이 신기했다.
그 또한 서준이 가리지 않고 먹는 모습을 보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아빠에게 칭찬받은 게 뿌듯했는지 서준은 그 뒤로 샌드위치를 남기지 않고 다 먹었다.
아영은 가리지 않고 먹어야 한다고 잔소리하는 것보다 조용히 행동으로 보여 주는 그가 어딘가 대단해 보였다.
“서준이 오늘 먹기 힘든 피클 잘 먹어서 아빠가 선물 주고 싶은데. 혹시 갖고 싶은 거 있어?”
“정말요?”
서준이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되물었다.
“아빠도 어렸을 때 피클이랑 피망 엄청 싫어했거든. 그래서 서준이가 얼마나 기특하고 대견한지 몰라. 그러니까 어떤 장난감이든 말해.”
“음…… 장난감 아니어도 돼요?”
“그럼.”
“오늘 아빠랑 어린이집에 같이 가고 싶어요.”
서준이 그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예상치 못한 말에 놀란 건 그녀만이 아니었다. 그 역시 놀랐는지 양쪽 눈썹을 밀어 올리며 조심스러운 얼굴로 되물었다.
“아빠랑 같이?”
“네!”
“왜 아빠랑 같이 가고 싶은지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
“친구들한테…… 자랑하고 싶어서요.”
“좋아. 가자.”
수줍은 서준의 대답에 그제야 그 마음을 깨달은 태하가 흔쾌히 대답했다. 그러자 서준의 얼굴에 기쁨이 차올랐다.
“괜찮겠어?”
서준이 잠시 화장실 간 사이 출근 준비를 마친 그녀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뭐가.”
“어린이집 가는 거.”
“물론이야.”
“소문, 빠르게 퍼질 거야. 그렇게 되면 광고 같은 건 몇 배로 위약금을 물어야 한다고 하던데…….”
“그러는 너는? 나와의 사이가 밝혀져도 괜찮아?”
내내 그의 걱정만 하고 있던 아영은 순간 당황했다.
사실 그의 말처럼 걱정이 안 된다면 거짓말이다. 저에게 쏟아질 시선들과 말들이 절대 좋을 리 없을 테니까.
하지만 이제 더는 숨고 싶지 않았다. 서준이를 위해서도, 저를 위해서도.
어려운 용기를 내 준 그와 함께 앞으로 나아가고 싶었다.
“난 괜찮아.”
“네가 괜찮으면 나도 괜찮아.”
깊이를 알 수 없는 그의 시선이 깊숙이 파고들었다.
아영은 그의 시선에 묶인 것처럼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달칵.
그때 서준이 화장실 문을 열고 나왔다.
그 순간 마법이라도 풀린 것처럼 황급히 시선을 돌린 그녀의 숨결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서준아, 아빠가 신발 신겨 줄까?”
“네!”
그의 말에 서준이 신이 난 얼굴로 달려갔다.
태하는 긴 다리를 접어 자세를 낮추고는 제 손보다 작은 서준의 운동화를 집어 들었다.
“서준이 혼자 신을 수 있어.”
“알아. 그동안 못 했던 거 지금부터라도 해 주고 싶어서 그래.”
버릇없어질까 봐 지레 걱정이 된 그녀의 말에 그는 이해해 달라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동안 그가 당연히 누렸어야 할 행복을 제가 빼앗았다고 생각하니 아영은 더는 만류할 수가 없었다.
그는 아무렇지 않게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댄 채 서준의 작은 발에 운동화를 신겨 주었다.
그리고 마저 다른 발에도 운동화를 신겨 준 뒤 그녀의 손에 들린 어린이집 가방을 자연스럽게 가져가 들었다.
“엄마도 서준이 손잡아.”
그와 손을 잡고 내려오던 서준이 1층에 도착하자 다른 한 손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아영이 손을 잡자 서준은 기분이 좋은지 엄마 아빠와 잡은 손을 앞뒤로 흔들며 걸었다.
“서준아, 점프할래?”
“점프?”
“엄마 아빠가 하나둘 셋 하면 서준이 위로 점프하는 거야. 어때?”
“재밌을 것 같아요!”
서준이 기대 어린 눈빛으로 말했다.
“내가 셋 하면 서준이 손을 높이 올리면 돼.”
아영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태하가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아영은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동작이라 어색했다.
“하나, 둘, 셋!”
“꺄악. 까악.”
태하의 구호에 맞춰 팔을 들어 올리자 서준의 작은 몸이 따라 올라왔다.
서준은 제 몸이 붕 떠오르는 게 신기하고 재미있는지 기쁨의 탄성을 질렀다.
마치 놀이기구를 타는 것처럼 좋아하는 서준의 모습을 보자 아영은 가슴이 뭉클했다. 태하의 입가에도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서준아, 또 해 줄까?”
“네!”
서준의 힘찬 대답에 태하가 괜찮겠냐는 듯 그녀를 쳐다보았다.
아까부터 힐끗거리는 시선들이 신경 쓰였지만, 아영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서준만 생각하기로 했다.
***
태하의 차에서 내린 순간부터 엄마들의 이목이 쏠렸다.
그도 그럴 게, 한국에 몇 대밖에 없는 대형 수입 세단 운전석에서 내린 사람이 TV나 잡지에서만 보던 세계적인 모델 대니얼 권이라는 사실도 놀라운데, 그 차에서 서준과 아영이 내리자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저 지금 눈앞의 펼쳐진 상황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쳐다볼 뿐.
“선생님!”
“안녕. 서준아.”
그곳에서 제일 먼저 마법이 풀린 사람은 서준이었다.
2층 계단에서 막 내려오고 있던 담임 선생님을 발견한 서준이 뛰어갔다.
제 품에 안긴 서준을 반갑게 맞아 주던 선생님이 물었다.
“서준이 오늘 기분 좋아 보이네?”
“네!”
“무슨 좋은 일 있어?”
어제 일 때문에 내심 서준이 신경 쓰였던 담임 선생님이 안도하며 되물었다.
“오늘 아빠랑 같이 왔어요!”
“뭐? 아빠랑?”
서준을 세 살 때부터 봐 왔던 선생님은 편모 가정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서준의 말에 어리둥절했다.
서준은 선생님께 빨리 자랑하고 싶은지 밖에 서 있던 그를 힘찬 목소리로 불렀다.
“아빠!”
태하가 어린이집 안으로 성큼 들어서자 담임 선생님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미혼이라고 알려진 모델 대니얼 권이 서준의 아빠라는 사실에 다물려 있던 선생님의 입이 스르륵 벌어졌다.
태하는 그런 반응을 예상한 듯 무감한 얼굴로 정중하게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서준이 아빠 권태하라고 합니다.”
“네? 아, 네. 아, 안녕하세요. 서준이 담임입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선생님은 새빨개진 얼굴로 인사했다.
“선생님, 부탁 하나 해도 될까요?”
“무슨 부탁인데요?”
진지한 그의 표정에 재빨리 선생님의 본분으로 돌아온 그녀가 되물었다.
“잠깐 서준이 친구들에게 인사할 수 있을까요?”
“직접이요?”
“사정상 그동안 서준이와 떨어져 지내다 보니, 아빠가 없다고 오해하는 친구들이 있는 것 같아서요.”
“네. 그렇게 하세요.”
어제 있었던 일에 대해서 그가 말하고 있다는 걸 눈치챈 선생님은 서준이 백번 말하는 것보다 그가 한 번 말하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흔쾌히 자신의 부탁을 받아들여 준 선생님께 감사 인사를 한 뒤 뒤돌아선 태하는 아영에게 기다리라고 말 한 뒤 2층 교실로 향했다.
“서준이 엄마, 정말이에요?”
서준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하고 있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영이 고개를 돌리자 어제 통화한 민우 엄마가 팔짱을 끼며 서 있었다.
“뭐가요?”
“정말 대니얼 권이 서준이 아빠 맞아요?”
조금 전 선생님과 한 얘기를 들은 모양이다. 그런데도 믿기지 않는지 그녀에게 재차 확인하고 싶은 것 같았다.
민우 엄마뿐만 아니라 그곳에 있는 다른 사람들도 같은 마음인지 그녀의 대답을 숨죽이며 기다렸다.
아영은 순간 망설여졌다.
제 대답이 불러올 파장이 얼마나 클지 감히 예상되지 않아서.
하지만 용기를 내야 했다. 언제까지 서준에게서 아빠의 자리를 빼앗을 수는 없었다.
“맞습니다.”
그녀의 대꾸에 모두 각양각색의 반응을 보였다.
탄식하는 사람, 놀라 손으로 입을 틀어막는 사람, 옆 사람에게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확인하는 사람, 그리고 어이가 없어 콧방귀는 끼는 사람.
바로 민우 엄마가 그랬다.
“그런데 지금껏 왜 숨겼어요? 뭔가 켕기는 구석이라도 있지 않고서야…….”
“그런 거 없습니다. 우리 가족의 사생활에 대해서 말할 이유가 없어서 안 했을 뿐이에요.”
“대니얼 권 미혼으로 알고 있는데. 설마, 결혼도 안 하고 애부터 낳은 거 아니죠?”
민우 엄마가 비아냥거렸다.
서준이 대니얼 권의 아이인 건 얼굴만 봐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동안 왜 눈치채지 못했는지 의아할 정도로 무척이나 닮았다.
그래서 더 짜증이 났다. 저보다 못한 여자가 그 유명한 대니얼 권의 여자라는 게.
결혼 얘기까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아영은 순간 당황하고 말았다.
선뜻 말을 잇지 못하고 있던 그때 단단한 손이 그녀의 허리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그가 내려온 기척을 듣지 못했던 아영은 놀란 숨을 삼켰다.
“결혼, 아직 안 한 거 맞습니다.”
태하가 그녀의 허리를 자연스럽게 껴안아 제 쪽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그의 몸과 밀착되자 그녀가 움찔 떨었다.
아영의 미세한 떨림을 간파한 그가 다정한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마치 괜찮으니 가만히 있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녀가 손을 피하지 않고 가만히 있자 이내 안심한 태하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서 있는 민우 엄마를 보며 입을 열었다.
“사실 제가 서준이 엄마, 그러니까 아영이가 도망갈까 봐 아이부터 만드는 바람에 결혼이 늦어졌거든요.”
그는 ‘서준이 엄마’라는 호칭이 입에 잘 붙지 않는지 그녀의 이름으로 바꿔 말했다.
“임신 때문이라면 혼인 신고라도 하면 되는 거 아닌가요?”
민우 엄마가 눈을 가늘게 뜨며 반문했다.
“물론 전 하고 싶었죠. 아영이가 허락했다면.”
“설마, 서준이 엄마가 거절했다는 건가요?”
민우 엄마가 믿을 수 없다는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네. 사실 제가 좋아해서 따라다녔거든요.”
“아니, 그쪽이 뭐가 아쉬워서…….”
“제 첫사랑이거든요. 아영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