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서준이 잠든 건 그로부터 두 시간이 지나서였다.
한 시간 전, 돌아가겠다는 태하의 말에 서준이 울며불며 가지 말라고 붙잡는 통에 그와 아영은 서준을 가운데 두고 나란히 침대에 누울 수밖에 없었다.
퀸사이즈 침대에 셋이 눕기엔 무리가 있었지만 서준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두 사람은 불편을 감수했다.
아빠, 엄마와 함께 셋이 잠자리에 든 적이 처음이라서 그런지 신이 난 서준은 쉴 사이 없이 조잘거렸다.
때론 맞장구를 쳐 주거나 조용한 미소로 얘길 들어 주던 두 사람은 서준의 말이 점점 늘어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곧이어 느리게 깜빡이던 눈이 이내 움직임을 멈췄다.
방 안에서 들리는 유일한 소음이 사라지자 고요한 침실에 장대같이 쏟아지는 빗소리만 가득했다.
아영은 손을 뻗어 서준의 가슴께로 이불을 끌어다 덮었다. 그러고는 내내 제 얼굴에 달라붙어 있던 그의 시선을 더는 모른 척할 수 없어 얼굴을 들었다.
저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던 그와 눈이 마주쳤다.
창밖 가로등 불빛에 비친 그의 얼굴에 그늘이 져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아영은 저를 향한 그의 눈빛이 미동도 없이 박혀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숨 막힐 듯한 정적에 입 안이 타들어 가는 듯한 갈증이 일었다.
아영은 참지 못하고 마른침을 삼켰다.
그 소리가 그에게 들렸을까. 그가 갑자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난 갈 테니까. 편히 자.”
침대에서 내려온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조용히 방을 나섰다.
달칵.
곧이어 거실 불을 켜는 소리가 들렸다.
완전히 닫히지 않는 문틈으로 작은 빛이 스며들어 왔다.
저벅. 저벅.
현관으로 향하는 그의 발소리에 심장이 조여들었다.
그 순간 아영은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방을 나섰다.
바닥에 내려놓았던 재킷을 들고 현관에서 신발을 신으려던 그가 그녀의 인기척에 돌아보았다.
거실의 환한 빛이 서준의 잠을 방해할까 봐 서둘러 문을 닫은 아영은 방문 앞에 서서 그를 쳐다보았다.
“왜, 할 말 있어?”
그녀가 나올 줄 몰랐는지 그가 의아한 눈빛으로 물었다.
아영은 할 말이 없었다. 그녀도 자신이 왜 나왔는지 이유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침묵이 길어지자 내심 뭔가를 기대한 건지 그의 입에서 바람 빠진 소리가 새어 나왔다.
“간다.”
“서준이…….”
돌아선 그가 현관문을 잡는 순간 아영은 다급히 내뱉었다.
천천히 돌아선 그가 무슨 얘기냐는 듯 빤히 쳐다보았다.
마른침을 삼킨 아영은 생각나는 대로 내뱉었다.
“서준이 일어나면, 너 찾을 거야.”
“그럼, 가지 말까?”
예상치 못한 그의 되물음에 등 뒤로 문고리를 잡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네가 가지 말라고 하면 안 가고.”
자신이 가고 안 가고는 그녀에게 달렸다는 듯이 말했다.
언제부터 날 배려했다고.
아영은 저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것처럼 느껴져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그냥 갈게. 나 있으면 너 잠 못 자잖아.”
그래서 가겠다는 뉘앙스였다. 마치 그녀를 배려해 피해 준다는 듯이.
그래. 가는 게 맞아.
그의 말처럼 그가 옆에 누워 있다는 사실 때문에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할 정도로 그녀의 모든 신경이 곤두서 있었기에 아영은 벌써 깊은 피로감을 느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제멋대로 폭탄을 터트릴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저를 위하는 듯이 구는 그의 태도가 어이없기도 했다.
더구나 자신을 신경 쓰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는 듯한 자신만만한 눈빛 또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아영은 제 마음과 다르게 대답했다.
“상관없어.”
“다행이네. 사실 가기 싫었거든.”
히죽 웃은 그가 신발을 벗고 다시 들어왔다.
그러고는 들고 있던 재킷을 탁자 위에 내려놓으며 덧붙였다.
“혹시 남는 이불 있어?”
“이불?”
“난 여기서 자려고.”
“바닥에서?”
그녀가 놀라 되물었다.
평생 바닥에서 자 본 적도 없었을 그가 그런 말을 하니 놀랄 수밖에.
“나 때문에 두 사람까지 불편하게 잘 필요는 없잖아.”
그건 맞는 말이었다. 키가 190센티에 육박하는 그 혼자 누워도 그리 넓지 않을 침대였으니까.
하지만 괜찮을까. 분명 내일이면 딱딱한 바닥에 익숙하지 않은 몸이 아우성을 칠 게 뻔했다.
“원한다면 같이 자 주고.”
아영의 대답이 바로 나오지 않는 걸 다른 뜻으로 오해했는지 그가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기다려.”
저를 놀리는 듯한 그의 말에 힘껏 노려보던 아영은 이내 몸을 돌려 안방으로 사라졌다.
등 뒤로 그의 웃음이 달라붙은 것 같아 귓불이 붉어졌다.
안방으로 들어간 아영은 열이 오른 얼굴에 손부채질을 했다.
잠시 후 어느 정도 열이 식자 장롱에서 바닥에 깔 요와 이불 그리고 베개를 들고 나왔다.
“이불은 까는 거 하나면 돼.”
“웃풍이 있어서 추울 거야.”
“알잖아. 나 열 많아서 이불 안 덮고 자는 거.”
그의 말처럼 열이 많은 그는 이불은커녕 잠옷도 입지 않고, 속옷만 입고 잠을 잤다.
속옷 역시 그녀의 요청 때문에 입은 거지 혼자 지낼 때는 제 몸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그와 동거할 때 애로 사항이 많았다. 몸이 차가운 그녀는 한여름에도 이불을 목까지 덮을 정도로 추위를 많이 타기 때문이었다.
온도 차가 다르다 보니 그녀는 그와 한방에서 자는 걸 꺼렸다.
그녀가 관계 후 다른 방으로 건너가는 걸 눈치챈 그가 이유를 묻자 아영은 솔직하게 말했다.
그제야 왜 밤마다 그녀가 사라지는지 이유를 알게 된 태하는 밤새 고민하더니 이윽고 묘책을 꺼내 놓았다.
그녀가 추위를 느낄 사이도 없이 매일 밤 이불 대신 제 몸으로 그녀를 뜨겁게 데워 주는 것이었다.
“알아서 해.”
“잘 자.”
낯 뜨거운 과거의 기억에서 돌아온 아영은 달아오른 얼굴을 감추기 위해 황급히 내뱉고는 방으로 도망쳤다.
그녀가 지난 기억을 떠올렸다는 걸 눈치라도 챘는지 잘 자라는 그의 말투에 웃음이 배어 있었다.
설핏 잠이 들었나 보다.
거실에 누워 있는 그가 신경 쓰여서 새벽 동이 터 오를 때까지 잠을 못 이루던 그녀였다.
눅진하게 밴 잠을 털어 내기 위해 눈을 깜빡이는데 잠을 제대로 못 자서인지 모래알이 들어간 것처럼 눈이 거슬거슬했다.
눈두덩이를 꾹꾹 누르자 흐렸던 시야가 조금은 밝아졌다.
잠을 억지로 떨쳐 낸 아영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런데 있어야 할 서준이 보이지 않았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침잠이 많은 아이였다. 그래서 잠이 깰 때까지 매일 아침 10분씩 팔다리를 주물러 주면 그때야 마지못해 일어나곤 했다.
놀란 마음에 침대에서 벌떡 일어난 아영은 서둘러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리고 제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놀라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녀가 애타가 찾던 서준은 태하와 거실에 앉아 공룡 놀이를 하고 있었다.
갑자기 벌컥 열리는 문소리에 공룡 놀이를 하던 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그녀를 발견한 서준이 ‘엄마─’ 하고 부르며 달려와 안겼다.
몸을 낮춘 아영은 그런 서준을 꼭 안아 주었다.
“서준이 오늘 일찍 일어났네?”
“응. 갑자기 눈이 떠졌어.”
아영이 당황을 감추며 묻자 서준이 똘망똘망한 눈으로 말했다.
그러다 서준의 눈가가 빨간 걸 보고 아영이 놀라 물었다.
“서준아, 혹시 울었어?”
서준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왜?”
“일어났더니 아빠가 없어서.”
아영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되물었다. 그러자 서준이 그 순간이 떠올랐는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 간 줄 알았던 거야?”
금세 눈물이 차오른 눈으로 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우리 서준이 많이 놀랐구나.”
아영은 그런 서준이 안쓰러워 작은 등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그러다 저와 서준을 보고 있던 그와 눈이 마주쳤다.
언제 일어났는지 그의 모습은 자고 일어난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이불 또한 깔끔히 정리해 한쪽에 놓여 있었다.
그에 반해 자다가 뛰어나온 제 모습이 어떨지 떠오른 아영은 출근 준비를 한다는 핑계로 도망치듯 화장실로 향했다.
거울에 비친 제 모습에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도 그럴 게, 잠을 제대로 못 자서인지 눈은 퉁퉁 부어 있었고, 머리는 부스스했으며, 오래 입어 목이 늘어진 티셔츠 위로 속옷 끈이 빼꼼히 나와 있었다.
급한 마음에 그가 거실에 있다는 걸 미처 떠올리지 못했다.
후줄근한 제 모습을 보고 그가 무슨 생각을 했을지 아영은 창피함에 목덜미가 확 붉어졌다.
아영은 그런 제 모습을 지우기라도 하듯 재빨리 물을 틀어 세수했다.
산발이던 머리는 감아 수건에 감쌌다. 욕실에서 나오기 전 제 옷 상태를 점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녀가 욕실에서 나오자 거실에서 놀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태하와 서준이 보이지 않았다.
안방에도 보이지 않자 서둘러 핸드폰을 찾은 아영은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벨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리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사이 현관문을 열고 태하와 서준이 들어왔다.
태하의 품에 서준이 안겨 있었는데, 그 모습이 너무 다정해 보여 아영은 가슴이 뭉클했다.
“어딜 갔다 오는 거야?”
“엄마, 아빠랑 샌드위치 사 왔어.”
그녀의 질문에 서준이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제 손에 들고 있던 봉투를 높이 치켜들었다.
서준이 저 빼고 그와 단둘이 외출한 것도 놀라운데, 그 입에서 아빠라는 소리가 너무 자연스럽게 흘러나와 더 놀라웠다.
아영은 놀란 마음을 추스르며 되물었다.
“샌드위치?”
“응. 아빠가 엄마 힘들다고 해서 아침 사 왔어.”
“너 피곤할 것 같아서.”
아영이 의아한 시선으로 그를 쳐다보자 그가 안고 있던 서준을 내린 뒤 신발을 벗겨 주며 대수롭지 않은 투로 말했다.
그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려던 순간 서준이 그녀의 옷을 잡아당겼다.
“엄마, 서준이 배고파.”
“어? 어. 그래.”
입이 짧은 서준이 아침에 뭔가를 먹겠다고 하는 게 신기했다.
아영은 손부터 씻고 오라는 말을 덧붙이고는 부엌으로 향했다.
커피포트에 물을 올리고 전원을 켠 뒤 냉장고에서 서준이 마실 우유를 꺼냈다.
서준과 태하가 손을 씻고 나오자 물이 끓었다. 아영은 머그잔에 태하와 자신이 마실 커피를 타고, 미리 따라 놓은 우유와 함께 쟁반에 받쳐 거실로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