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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아저씨!”
“안녕?”
그가 어색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네자 서준이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아저씨가 왜 우리 집에 있어요?”
안방에 있던 아영은 난감함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순간 그가 재치 있게 받아넘겼다.
“서준이 보러 왔지.”
“정말요?”
서준이 기쁜 얼굴로 되물었다.
고개를 끄덕인 태하는 이내 몸을 낮추더니 서준과 눈높이를 맞췄다.
“어제 온다고 약속했잖아.”
“안 와서 까먹은 줄 알았어요.”
“아저씬 서준이와 한 약속 절대 안 잊어.”
그의 말에 기분 좋은지 씩 웃던 서준이 갑자기 얼굴을 찌푸렸다.
“서준이 왜 그래?”
“아, 쉬 마려워서요.”
잠시 잊고 있던 생리적 활동이 급해졌는지 서준이 다리를 꼬며 말했다.
태하가 푸스스 웃으며 덧붙었다.
“참지 말고 다녀와.”
“가면 안 돼요. 알았죠?”
“그래. 기다릴게.”
그제야 안도한 서준은 서둘러 바지춤을 잡고 화장실로 뛰어갔다.
그사이 안방에 있던 아영이 쭈뼛거리며 거실로 나왔다. 하지만 좀 전의 일이 떠올라 그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볼 수 없어 시선을 모로 틀었다.
“서준이 나오기 전에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아.”
“왜?”
“안 그러면 오늘 못 가게 할지도 몰라.”
“그럼 자고 가면 되겠네.”
“뭐?”
무심한 어조로 툭 던진 그의 말에 놀란 그녀의 목소리가 순간 커졌다. 그러다 화장실에 있는 서준을 떠올린 아영은 재빨리 숨을 죽인 채 그를 힘껏 노려보았다.
“걱정하지 마. 인사만 하고 갈 거니까.”
그녀의 얼굴에 안도의 기색이 스치는 걸 본 그의 입꼬리가 삐딱해졌다.
“그런데 아쉽네.”
그녀가 무슨 뜻이냐는 듯 빤히 쳐다보자 그가 느릿하게 입술을 뗐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나한테 흥분했던 이아영이 다시 숨어 버린 것 같아서.”
아영이 쓸데없는 말 하지 말라며 반박하려는 순간, 달칵 소리와 함께 서준이 화장실 문을 열고 나왔다.
그가 아직 거실에 있는 걸 본 서준이 달려와 다시 품에 안겼다. 태하는 그런 서준의 등을 다정히 토닥여 주었다.
“아까 아저씨가 우리 집에 있는 거 보고 꿈인 줄 알았어요.”
“그랬어?”
그의 품에 안겨 있던 서준이 문득 뭔가 떠올랐는지 흥분한 얼굴로 말했다.
“아, 맞다. 아저씨, 저 아빠 만날지도 몰라요!”
“아빠?”
“네! 엄마가 아빠한테 전화한댔어요.”
“그래?”
태하가 서준이 뒤에 서 있던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
서준이 아빠 얘길 꺼낼 줄 몰랐던 그녀의 얼굴은 당혹스러움으로 물들었다.
다시 서준과 눈을 마주친 그가 입을 열었다.
“서준이 아빠 한 번도 본 적 없지?”
“네.”
“그동안 안 궁금했어?”
태하의 질문에 서준이 힐끗 아영을 돌아보았다. 그러더니 이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요.”
아영은 제 눈치를 보는 서준을 보자 미안하면서도 마음이 아팠다.
서준은 또래보다 속이 깊은 아이였다.
그동안 아빠가 보고 싶었을 텐데도 아빠 얘기가 나오면 표정이 어두워지는 엄마의 모습을 보고 깨달았는지 그 뒤로는 다시 꺼내지 않았다.
아영은 그런 서준에게 미안해 아빠의 빈자리가 느껴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서 사랑했다.
그런데도 서준에게 아빠는 그리움의 대상이었던 듯했다. 그에게 자랑하듯 말하는 걸 보면.
“서준이는 아빠가 어떤 아빠였으면 좋겠어?”
“음, 아저씨 같은 아빠요.”
그의 질문에 서준이 골똘히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내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아저씨 같은 아빠가 어떤 아빠인데?”
서준의 대답에 당황함을 감춘 그가 되물었다.
“음, 같이 그네도 타고, 목마도 태워 주고, 로봇 놀이도 하고 또 맛있는 것도 사 주고 또…….”
“그게 좋았어?”
“네!”
서준은 그동안 태하와 했었던 일들을 나열하기 시작했다.
서준의 뜻밖의 대답에 당황한 건 그만이 아니었다. 아영은 짧은 시간 동안 그와 서준이 함께한 추억이 이렇게나 많을 줄은 몰랐다.
그녀의 가슴이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서준아, 아저씨가 진짜 아빠면, 어떨 것 같아?”
“권태하!”
놀란 아영이 다급히 숨을 삼키며 그를 불렀다.
하지만 태하는 그녀의 목소리를 못 들은 것인지 아니면 못 들은 척하는 건지 서준에게서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그런 두 사람의 상황을 눈치채지 못한 서준이 해맑은 얼굴로 말했다.
“엄청 좋을 것 같아요!”
“다행이네.”
나직하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태하는 서준의 볼을 쓰다듬었다. 그러고는 이내 조심스럽게 덧붙었다.
“서준아, 아저씨가 할 말이 있는데 잠깐 앉아 볼래?”
“네.”
평소와 다른 진지한 그의 표정에 서준이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멀찍이 서 있는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아영, 너도 이리 와서 앉아.”
그가 무슨 얘길 꺼낼지 짐작한 아영은 불안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같이 얘기해.”
그녀가 꼼짝도 하지 않자 그의 시선에 힘이 들어갔다.
그가 절대 물러나지 않을 거라는 걸 눈치챈 아영은 터져 나오려는 숨을 삼키며 천천히 서준의 옆에 앉았다.
그녀가 자리에 앉자 태하는 서준의 눈을 깊이 들여다보며 입을 열었다.
“서준아, 지금부터 아저씨가 하는 말 잘 들어야 해.”
서준이 똘망똘망한 눈으로 고개를 크게 주억거렸다.
아영은 다가올 상황이 긴장돼 숨조차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태하는 결심한 듯 입술을 뗐다. 서준이 놀라지 않도록 천천히.
“사실은…… 아저씨가 서준이 아빠야.”
“아저씨가 내 아빠라고요?”
서준이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그러자 태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 엄마가 아빠는 미국에 있다고 했는데.”
그런 아빠가 한국에 있다는 게 혼란스러운 모양이었다.
“맞아. 엄마 말씀대로 미국에 있다가 얼마 전에 온 거야.”
“그런데 왜 서준이한테 말 안 했어요? 아저씨가 아빠라는 거?”
아무것도 모르는 서준의 질문에, 그러쥔 그녀의 손바닥에 손톱이 깊이 박혔다.
이젠 그동안 숨겨 왔던 사실을 밝혀야 할 때가 다가왔음을 깨달은 아영은 이내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서준아, 그건 엄…….”
“아빠가 미안해.”
그 순간 그가 그녀의 대답을 가로챘다.
아영이 돌아보자 그는 가만히 있으라는 듯 쳐다보더니 이내 서준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빠랑 떨어져 있던 시간이 길어서 서준이가 어색해할까 봐 익숙해질 시간을 주고 싶었어. 그래서 바로 말 못 했던 거야.”
“정말 아저씨가 서준이 아빠 맞아요?”
믿고 싶지만, 여전히 믿어지지 않는지 서준이 되물었다.
그런 서준을 눈에 담은 태하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서준은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을 하려는 듯 여러 번 눈을 깜빡였다.
“아빠가 늦게 와서 미안해.”
“아빠─.”
그의 진심 어린 사과를 들은 서준의 커다란 눈망울에 눈물이 그렁그렁 차오르더니 이내 버티지 못하고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태하가 서준의 볼에 흐른 눈물을 천천히 닦아 주자 그 순간 서준이 그의 품속으로 와락 파고들었다.
태하는 처음 듣는 아빠라는 소리에 놀랐는지 고장 난 로봇처럼 굳어 버렸다. 그러다 이제야 찾아온 아빠가 서운했는지 울음을 터트린 서준을 뒤늦게 품에 안고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감은 두 눈 사이로 얼핏 투명한 게 비쳤다.
두 사람을 지켜보던 그녀의 마음은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다. 저로 인해 두 사람이 마땅히 누렸어야 할 행복을 망가트린 것 같아서.
한참을 그의 품에 안겨 울던 서준이 진정되었는지 그의 품에서 떨어져 나왔다.
서준이 빨개진 코를 훌쩍이며 입을 열었다.
“왜 서준이 보러 안 왔어요?”
그동안 왜 한 번도 저를 보러 오지 않았는지 궁금한 눈빛이었다.
“사실은 아빠가 엄마한테 상처를 주는 바람에 엄마가 떠날 수밖에 없었어. 그래서 바로 서준이를 보러 오지 못한 거야.”
그는 마치 이 상황을 미리 준비라도 한 것처럼 머뭇거리지도 않고 대답했다.
“아빠가 잘못한 거예요?”
“응. 아주 많이. 그러니까 이제야 찾아온 아빠를 용서해 줄래?”
서준이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이내 작은 머리로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다.”
“그럼 이제 아빠랑 같이 사는 거예요?”
“서준아, 그건…….”
“엄마가 허락만 한다면.”
이야기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자 당황한 아영이 불쑥 끼어들었다. 그러자 태하가 그녀의 말을 자르며 덧붙였다.
저를 난처한 상황으로 내몬 그를 아영이 힘주어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는 흔들림 없는 눈동자로 그녀를 쳐다볼 뿐이었다.
“엄마, 허락해 주세요. 네?”
아빠와 같이 살 수 있다는 말에 언제 울었냐는 듯 표정이 한껏 밝아진 서준이 아영의 손을 잡고 채근하기 시작했다.
“서준아, 그건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야.”
“왜 안 돼요?”
“아빠 곧 미국으로 돌아가야 해.”
그녀도 그와 또다시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를 붙잡을 힘이 그녀에겐 없었다.
“정말이에요?”
아빠가 곧 미국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말에 다시금 서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러자 그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 서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서준이가 가지 말라고 하면 안 갈게.”
“미국 가지 마요. 서준이랑 엄마랑 여기서 같이 살아요.”
“서준이가 원한다면 그렇게 할게.”
“정말요?”
“그래.”
“우와! 신난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서준이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그렇게 좋아?”
“네!”
서준이 세상을 다 가진 표정으로 대답했다.
“서준아, 아빠랑 사는 게 왜 좋아?”
“이제 친구들한테 아빠 자랑할 수 있어서요.”
해맑은 서준의 대답에 그도 그녀도 먹먹해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