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아영은 바닥에 주저앉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너 왜 그래?]
“나중에 다시 전화할게.”
그는 갑자기 그녀의 모습이 창가에서 사라지자 걱정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아영은 그에게 제 상태를 들키기 싫어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그런 다음 크게 숨을 들이쉰 뒤 천천히 내쉬길 반복했다.
띵동. 띵동.
갑자기 울리는 초인종 소리에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아영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 시간에 찾아올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누구세요?”
“나야. 문 열어.”
그건 다름 아닌 태하 목소리였다.
당황한 아영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으로 걸어갔다.
문을 열자 계단을 뛰어온 것인지 태하가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안 갔어?”
“갑자기 전활 그렇게 끊는데 어떻게 가.”
그가 숨을 고르며 말했다.
당연히 집에 갔을 거라 생각한 그가 문 앞에 서 있자 아영은 당혹스러웠다.
“미안…….”
“됐어. 괜찮은 거 같으니 갈게.”
그녀의 상태를 확인한 그가 미련 없이 돌아섰다.
“잠깐, 들어왔다가 갈래?”
아영이 그를 불러세우자 그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그녀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어, 어차피 하려던 얘기도 있고…… 그렇다고 나가서 얘기하기도 뭐해서…….”
“괜찮겠어?”
아영은 고개를 끄덕인 뒤 잡고 있던 현관문을 놓고 뒤로 물러났다. 그가 안으로 들어오자 등 뒤로 현관문이 닫혔다.
밖에서 들리던 소음이 차단되자 외딴곳에 그와 단둘이 있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들어와.”
아영이 우두커니 서 있는 그에게 말했다.
벗은 신발을 가지런히 놓은 그가 거실로 들어서자 가뜩이나 좁은 집이 더 좁게 느껴졌다. 더구나 단출하기 그지없는 살림살이가 신경이 쓰였다.
아영은 괜히 그를 집으로 들였나 하는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서준이는?”
그가 집 안을 휘둘러보며 서준을 찾았다.
“아, 좀 전에 잠들었어.”
“아쉽네.”
그가 쓰고 있던 모자를 벗었다.
“뭐 좀 마실래?”
아영은 그와 단둘이 있는 게 처음도 아닌데 이상하게 긴장되었다.
“물이면 돼.”
“편하게 앉아 있어.”
아영은 몸을 돌려 주방으로 향했다. 냉장고에서 물병을 꺼내 투명한 유리잔에 따른 아영은 작은 쟁반에 받쳐 거실로 나왔다.
소파도 없는 바닥에 앉아 궁핍한 그녀의 살림을 구경하던 그가 고개를 돌렸다.
“마셔.”
“고마워.”
그녀가 건넨 물을 한 모금 마신 그가 컵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닫혀 있는 방문을 차례로 훑었다.
“서준이는 어디서 자?”
“안방에서 자고 있어.”
아영이 부엌 옆에 있는 방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렇군.”
그의 대답 후 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충동적으로 그를 집 안으로 들이긴 했지만, 막상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애꿎은 쟁반만 만지작거렸다.
그런데 그때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에 아영은 고개를 들었다.
“어제 기사 봤어.”
자신의 에이전시 대표에 관한 기사라는 걸 알아챈 것인지 그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너도, 알고 있었어?”
그의 안색을 살피던 아영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내가 터트렸어. 그 기사.”
“뭐? 네가? 설마…….”
“걱정하지 마. 난 아니니까.”
너무 놀라, 말을 잇지도 못하는 그녀를 보며 그가 안심하라는 듯 옅게 웃으며 덧붙였다.
“사실은 내 후배가 당한 일이야.”
아영은 놀란 숨을 삼켰다. 태하는 담담히 그동안 있었던 일을 그녀에게 털어놓았다.
“힘들었겠다.”
“쉽진 않더라.”
그가 이마를 문지르며 씁쓸하게 웃었다.
10년 넘게 존경해 왔던 사람의 추악한 모습을 알게 됐을 때 그가 받았을 충격이 얼마나 컸을지 아영은 감히 상상도 할 수가 없었다. 그가 얼마나 힘들었을지도.
아영은 그를 위로해 주고 싶지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아랫입술만 잘근잘근 씹었다.
“그러지 마.”
아영이 무슨 소리냐는 듯 쳐다보자 그가 가만히 덧붙였다.
“위로 안 해 줘도 되니까 입술 깨물지 말라고.”
습관적으로 입술을 깨물던 아영은 그의 짙은 시선이 제 입술로 향하자 당황해 저도 모르게 입술을 말았다.
깨물지 말라는 제 아예 보이지도 않게 삼켜 버린 그녀의 모습에 태하가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의 의미가 뭔지 몰라 그녀의 목덜미가 확 붉어졌다.
쌀쌀하던 거실 공기가 순간 덥게 느껴졌다.
아영은 손부채질이라도 해서 얼굴의 열기를 식히고 싶었지만, 그의 시선이 집중될까 봐 그럴 수도 없었다.
민망함을 덜기 위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더운 열기가 가라앉길 기다리고 있는데 그가 툭 내뱉었다.
“할 얘기 있다며.”
“뭐?”
“좀 전에 통화했을 때 그랬잖아.”
“아.”
잠시 잊고 있었다.
“어, 그게…….”
아영은 막상 말하려고 하니 무슨 말부터 어떻게 말해야 할지 말문이 막혔다.
태하는 재촉하지 않고 그녀가 말하길 조용히 기다렸다.
아영은 마른침을 삼킨 뒤 천천히 입술을 뗐다.
“서준이한테 너에 대해 말할까 해.”
“드디어 결심이 선 거야?”
아영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말인데 너한테 부탁할 게 있어.”
“뭔데?”
“시간 되면 서준이 다니는 어린이집에, 같이 가 줄 수 있어?”
“내가?”
그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싫으면…….”
“싫어서가 아니라 뜻밖이라 그래. 나와의 관계 숨기고 싶었던 거 아니었어?”
“이젠 이기적으로 굴지 않으려고.”
“그게 무슨 말이야?”
그가 찬찬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서준이를 혼자 키우겠다고 결심했을 때 내가 아빠 몫까지 열심히 사랑해 주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오늘 서준이가 아빠 없다고 놀리는 친구랑 싸웠다는 얘길 듣고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어. 내가 아무리 사랑을 많이 줘도 아빠의 빈자리는 절대 메꿀 수 없다는 걸.”
자조하듯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처연하게 들렸다.
“그래서 밝히기로 마음을 바꿨어. 여기서 더 늦으면 안 될 것 같아서.”
“고맙다.”
“뭐가?”
아영이 뜨악한 얼굴로 반문했다.
“지금이라도 마음 바꿔 줘서.”
“……고마운 건 나야.”
그녀의 대꾸에 그가 의외라는 듯 쳐다보았다.
“그동안 아빠 자격 강요할 수 있었는데도 묵묵히 기다려 줘서 고마워.”
“고마울 거 없어. 너와 서준이에게 날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그녀의 진심 어린 고백에 태하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드리워졌다.
긴장과 초조함으로 팽팽하게 당겨졌던 그녀의 신경이 조금 느슨해졌다.
“그럼 가 줄 수 있어?”
“물론.”
“……소문이 날 수도 있어.”
“그건 진작부터 각오한 일이야. 그러는 넌 소문 나도 괜찮아?”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겁이 안 난다면 거짓말이다. 그와의 관계가 알려졌을 때 돌아올 후폭풍이 얼마나 거셀지 이미 경험한 적이 있었으니까.
어쩌면 그때보다 더 큰 타격을 입을 수도 있었다.
결혼도 안 한 처녀가 그의 아이를 몰래 키우고 있었다는 게 세상에 알려지면 사람들이 좋게 볼 리 없을 테니까.
하지만 아영은 이제 용기를 내 보려 했다. 서준을 지켜 줄 그가 있기에.
“서준이한텐 언제 말할 생각이야?”
“내일 하려고.”
“막상 말한다고 하니 긴장되네.”
“왜?”
그녀가 의아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내가 아빠인 게 마음에 안 들 수도 있잖아.”
“그렇진 않을 거야. 널 좋아하니까.”
“그건 내가 아빠인 걸 몰랐을 때 얘기지. 필요할 때 곁에 있어 주지 못한 나를 원망할 수도 있는 거니까.”
“오해 없도록 잘 설명할게.”
“그래.”
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젠 해야 할 말도 끝났으니 그만 일어나야 했지만 그도 그녀도 미적거리고 있었다.
조용한 방 안에 서로의 시선이 갈 곳을 잃은 듯 둥둥 떠다녔다.
툭. 투둑.
그때 창가를 때리는 소리에 두 사람이 고개를 돌렸다. 빗방울이 유리에 사선을 긋듯 툭 툭 맺혀 흘러내렸다.
“어? 비 온다.”
“그러게.”
태하가 탐탁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비가 오는 게 달갑지 않은 것인지, 이제 그만 가야 하는 게 달갑지 않은 것인지 그의 표정을 봐서는 알 수가 없었다.
비까지 오니 더는 그를 붙잡아 둘 수 없어 아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연락할게.”
그녀가 엉거주춤 일어나자 그도 마지못해 일어났다.
“우산 빌려줄게.”
“괜찮아. 많이 안 오니까 뛰어가면 돼.”
“그래도…….”
쏴아아아!
그때 그의 말을 비웃기라도 하듯 본격적으로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태하가 어이없는 표정을 짓자 아영이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가 웃는 걸 보며 그도 따라 웃었다.
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방 안을 채웠다.
순간 빗소리가 아득해지더니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마주친 시선이 길어지자 두 사람의 입가에 맺혀 있던 미소가 서서히 옅어졌다.
그러자 두 사람을 감싸던 공기가 팽팽하게 당겨졌다.
아영을 향해 있던 그의 시선이 짙게 가라앉는 건 그 순간이었다.
태하가 한 걸음 다가왔다.
아영은 입술이 말라 왔다. 혀로 입술을 축이고 싶지만, 그가 저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어 그럴 수가 없었다.
그가 다시 한 걸음 다가왔을 때 발끝에 힘이 들어갔다.
도망가고 싶은지 다가가고 싶은지 저조차도 알 수 없었다.
또다시 한 걸음. 이젠 그와의 거리가 채 30센티도 떨어져 있지 않았다.
그의 숨소리가 들리고, 그의 열기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녀의 머릿속에 위험을 알리는 경고등이 울렸다.
그의 얼굴이 천천히 다가오자 아영은 숨을 삼켰다.
“엄마아아아─.”
때마침 안방에서 들리는 서준의 목소리에 차가운 물을 뒤집어쓰기라도 한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황급히 그의 가슴을 밀친 아영은 안방으로 뛰어갔다.
혼자 남은 태하는 허탈한 표정으로 그녀의 뒷모습을 좇았다.
그녀가 안방으로 들어가자 잠에서 깬 서준이 눈을 비비고 있었다. 아영은 서둘러 서준의 곁에 앉았다.
“서준이 깼어?”
서준이 잠이 덜 깬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 어디 갔었어?”
“거실에.”
아영이 당황함을 감추며 말했다. 그때 서준이 이불을 걷어내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어디 가려고?”
“서준이 쉬 마려워.”
그러더니 그녀가 붙잡을 사이도 없이 밖으로 나갔다.
그러다 거실에 서 있는 그를 발견하고 걸음을 우뚝 멈췄다. 서준의 눈이 왕방울만큼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