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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아영은 연락처가 적힌 메모지를 보며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3대 독자인 민우를 떠받들듯이 키운다는 민우 엄마는 어린이집 엄마들 사이에서 소문이 자자했다.
친구랑 놀면서 다치거나 넘어질 수도 있는데 민우 엄마는 그럴 때마다 어린이집 선생님을 이 잡듯 잡는다고 들었다.
그리고 하루에 세 번씩 민우가 오늘은 뭘 먹었는지, 컨디션은 어떤지, 혹시 누가 괴롭히지 않는지 확인 전화를 할 정도로 유난한 성격이라 했다.
그런 민우 엄마의 소문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아영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무난한 성격의 서준이었기에 문제 될 일은 생기지 않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 때문이었다. 서준을 믿기도 했고.
전화를 걸기 전 아영은 크게 심호흡을 한 뒤 천천히 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이 끊어질 즈음 전화가 연결되었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민우 어머니 되시나요? 서준이 엄마입니다.”
[내가 안녕하게 생겼어요? 아니, 애를 어떻게 키웠길래 어린 게 벌써 폭력을 써요. 폭력을!]
“죄송합니다.”
아영은 전화를 받자마자 쏟아 내는 민우 엄마의 원성을 고스란히 들은 뒤 마치 눈앞에 민우 엄마가 있는 것처럼 고개 숙여 사과했다.
그런데도 민우 엄마는 화가 풀리지 않는지 계속해서 퍼부어 댔다.
[이게 어디 죄송하다고 될 일이에요?]
“다음부터는 이런 일 없도록 잘 타이르겠습니다.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이게 타일러서 될 일이에요? 따끔하게 혼을 내도 모자랄 판에! 이러니 아빠 없는 집 애들은 버릇이 없다니까.]
아영은 민우 엄마가 나직이 덧붙인 소리에 저도 모르게 울컥 올라왔다.
“민우 어머님, 저 서준이 버릇없이 키운 적 없습니다.”
[그런 애가 아무 잘못 없는 우리 민우를 때렸다는 거예요?]
“아빠 없다고 먼저 놀린 건 민우라고 들었습니다.”
[아니, 아빠가 없으니까 없다고 말한 게 어떻게 놀린 거예요?]
“서준이 아빠 있습니다.”
[당연히 있겠죠. 서준이를 혼자 만든 건 아닐 테니. 암튼, 애 똑바로 키우세요. 또 한 번 우리 민우 몸에 상처라도 나는 날엔 바로 고소할 테니까 명심하세요!]
그녀의 말에 콧방귀를 뀌던 민우 엄마는 그렇게 제 할 말만 하고 전화를 끊어 버렸다.
아영은 불이라도 난 듯 가슴이 뜨거웠다.
자신이 욕먹는 건 상관없었다. 하지만 제 아이가 저로 인해 문제아 취급받자 더 비참했다.
지금까지 서준을 혼자 키우면서 힘든 적은 많았지만 제 선택에 대해서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아영은 오늘 처음으로 제 선택을 후회했다.
제 멋대로 서준이에게 아빠를 빼앗은 것 같아서.
서준을 데리러 가는 그녀의 마음이 무거웠다.
하지만 민우와의 일 때문에 속상했을 서준에게 우울한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아 아영은 억지로 입가를 끌어올린 뒤 어린이집 문을 열었다.
“어머, 어머니 오셨어요?”
그녀가 안으로 들어가자 서준의 담임 선생님이 그녀를 발견하고 먼저 인사를 해 왔다.
아영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눈인사를 했다.
“저기 민우 어머님이랑은 말씀 잘 해 보셨어요?”
“네. 전화해서 사과드렸습니다.”
“별일, 없으셨어요?”
“네. 다행히 사과 받아 주셨어요.”
서준의 담임 선생님이 그녀의 안색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영은 선생님이 뭘 걱정하는지 알기에 결과만 이야기했다.
“정말 다행이네요.”
눈에 띄게 안도하는 선생님을 보며 아영은 흐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서준이는 괜찮나요?”
“민우랑 싸운 뒤 계속 기분이 안 좋았다가 엄마 오고 있다는 말에 지금은 좀 풀렸어요. 지금 가서 데려올게요.”
서준이 담임 선생님은 가벼운 걸음으로 서준의 반이 있는 2층으로 올라갔다.
잠시 후 서준이 선생님과 내려오다 그녀를 발견하더니 시무룩했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엄마─.”
아영이 무릎을 굽혀 양팔을 펼치자 서준이 달려와 그녀 품에 안겼다. 아영은 제 품에 쏙 들어오는 서준을 꼭 안아 주었다.
한참을 그렇게 안아 준 아영은 서준을 품에서 떼어 낸 뒤 선생님께 인사했다.
“서준아, 내일 보자.”
“안녕히 계세요.”
선생님이 손을 흔들자 서준이 90도로 인사했다.
어린이집을 나오는데 서준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아영이 제 손에 들어온 고사리 같은 서준의 손을 꼭 맞잡으며 씩 웃자 그늘진 서준도 따라 웃었다.
아영은 모른 척 서준에게 질문을 던졌다.
“서준아, 오늘 어린이집에서 잘 놀았어?”
다른 때 같으면 묻기도 전에 종알종알했을 서준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늘은 말하고 싶지 않구나?”
서준이 침울한 얼굴로 고개만 끄덕였다.
“알았어. 그럼, 말하고 싶을 때 말해.”
아영은 괜찮다는 듯 가벼운 어조로 말한 뒤 서준과 잡은 손을 앞뒤로 흔들며 걸었다. 그러다 무언가를 발견한 아영의 두 눈이 반짝였다.
“서준아, 솜사탕 먹을래?”
“응?”
갑자기 자신이 좋아하는 솜사탕 얘기가 나오자 서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기 솜사탕 할아버지 나오셨는데. 먹으러 갈까?”
서준이 우울한 얼굴을 털고 고개를 크게 주억거렸다.
역시 먹는 것만큼 기분을 빨리 바꾸는 건 없는 것 같다. 아영은 서준이 손을 잡고 솜사탕 가게로 향했다.
얼굴만 한 솜사탕을 한입 베어 물자 서준의 입가에 파란색 설탕 덩어리가 묻어났다. 서준은 그것도 모른 채 솜사탕을 또 베어 먹었다.
“맛있어?”
“응!”
순식간에 얼굴만 한 솜사탕을 해치운 서준의 입가를 물티슈로 닦아 주는데 그런 그녀를 빤히 쳐다보던 서준이 불쑥 말했다.
“엄마, 왜 나는 다른 친구들처럼 아빠랑 같이 안 살아?”
“어?”
아영은 순간 당황하고 말았다.
“나도 다른 애들처럼 아빠랑 살면 안 돼?”
“오늘 어린이집에서 무슨 일 있었어?”
뒤늦게 정신이 돌아온 아영이 놀란 표정을 지우며 되물었다.
“오늘 민우랑 싸웠어.”
“왜?”
아영은 알면서 모른 척 물었다.
“나보고 아빠 없다고 놀려서 화가 나서 밀어 버렸어.”
“그랬구나. 그래서 우리 서준이 속상했구나?”
자신의 마음을 헤아려 줘서 울컥하는지 서준이 커다란 눈망울에 눈물을 매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눈물이 툭 서준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아영은 조용히 서준의 눈물을 닦아 주며 덧붙였다.
“하지만 서준아, 아무리 화나도 친구를 밀면 안 돼. 그건 나쁜 행동이야.”
“으아아앙!”
그녀의 말이 서운했는지 결국 서준이 눈물을 터트렸다.
아영은 그런 서준을 품에 안아 작은 등을 한참 동안 어루만져 주었다.
얼마나 울었을까. 들썩이던 서준의 등이 차츰 잦아들더니 이내 훌쩍임으로 바뀌자 아영은 조심히 서준을 제 품에서 떼어 냈다.
서준이 젖은 눈망울로 코를 훌쩍이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서준아.”
아영이 다정한 목소리로 부르자 서준이 가만히 눈을 맞추었다.
“아빠 보고 싶어?”
서준이 빨개진 눈으로 고개를 크게 주억거렸다.
아영은 저릿한 가슴을 지그시 누르며 천천히 입을 뗐다.
“그럼, 아빠한테 말해 볼게. 서준이 보러 와 줄 수 있냐고.”
“정말?”
서준이 언제 울었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묻자 아영은 울렁이는 마음을 꾹 누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
서준이 잠든 걸 확인한 아영은 발소리를 죽이며 거실로 나왔다. 그러고는 이내 결심한 듯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번호를 누를 때마다 심장이 뛰는 속도가 빨라졌다.
후…….
[여보세요.]
내뱉은 숨을 채 들이켜기도 전에 그가 바로 전화를 받자 아영은 다급히 숨을 삼켰다.
“…….”
[여보세요?]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가 다시 불렀다.
“……나야.”
[왜 그래. 서준이한테 무슨 일 있어?]
호흡이 흐트러지면서 목소리가 눌려서 나왔다. 평소와 다른 그녀의 목소리에 그의 목소리가 바로 심각해졌다.
“어?”
아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서준 때문인지 그가 어떻게 안 건지 당황해 말을 잇지 못했다.
[너 괜찮아?]
그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되물었다.
“난 괜찮아.”
[다행이다.]
괜찮다는 그녀의 말에 안도하는 그의 목소리를 듣자 아영은 왠지 모르게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때 밖에서 사이렌 소리가 울렸다.
그 소리가 지나가길 기다리는데 때마침 그의 전화에서도 똑같은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아영은 문득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 지금 어디야?”
[밖이야.]
동시에 사이렌 소리가 멈췄다.
“그러니까 어디냐고.”
[갑자기 그건 왜?]
대답을 피하는 게 수상했다.
아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창문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창문을 열어 밖을 내다보는데 집 앞 가로등 밑에 서 있는 그가 보였다.
야구 모자를 깊숙이 눌러쓰고 있었지만, 아영은 한눈에 알 수가 있었다. 그 같은 피지컬은 이 동네엔 없었으니까.
“거기서 뭐 해?”
갑자기 목소리가 가까이 들린다고 생각했는지 그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들켰네.]
창문을 내다보고 있는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그가 피우고 있던 담배를 껐다.
“언제 왔어?”
[좀 전에.]
그러기엔 그의 발밑에 흩어진 담배꽁초가 여러 개였다.
“갑자기 여긴 왜 온 건데?”
[어제 서준이에게 간다고 약속했는데 갑자기 일이 생기는 바람에 늦었어. 잠깐 얼굴이라도 보려고 왔는데 너무, 늦었지?]
서준이와 지나가듯 한 약속을 지키려고 이 시간에 여기까지 왔다고?
“서준이 방금 잠들었어.”
[그렇구나.]
목소리에 아쉬움이 가득했다.
[쉬어. 갈게.]
“잠깐 시간 돼?”
그가 전화를 끊으려고 하자 아영이 다급히 말했다.
[시간?]
“서준이에 대해서 할 말이 있어.”
[이제야 말할 결심이 선 거야?]
“어. 그런데 어떻게 말해야 할지…….”
빠아앙!
그때 차가 경적을 울리며 빠른 속도로 달려왔다.
“조심해!”
골목길에 서 있던 그를 보고도 차가 속도를 줄이지 않자 아영이 놀라 소리쳤다.
그 소리에 태하가 재빨리 몸을 뒤로 물렀다.
간발의 차로 그를 스쳐 지나갔다. 그가 빠르게 멀어지는 차를 향해 나직이 욕설을 퍼부었다.
“괜찮아?”
[어.]
하마터면 그가 치일 뻔한 상황에 놀란 아영은 그제야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좀처럼 진정이 되지 않았다.
얼마 전 그가 비슷한 차 사고를 당해서인지 심장이 비정상적으로 빨리 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