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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지냈어?”
“네! 아저씨 병원 나왔어요?”
“응. 이제 병원 안 가도 돼.”
서준이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묻자 그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와! 그럼 또 비행기 태워 주세요!”
“지금 태워 줄까?”
“네!”
좋아서 방방 뛰는 서준의 허리를 오른팔로 감싼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회전하듯 빙글빙글 돌았다.
“꺄! 비행기다!”
그의 팔에 매달린 서준은 꺅꺅거리면서 즐거운 웃음을 터트렸다.
아영은 멍한 얼굴로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두 사람이 언제 이렇게 친해진 것인지 어안이 벙벙했다. 저 모르게 자주 찾아왔다더니 멀리서 얼굴만 보고 가는 게 아니었단 건가?
“서준이 엄마는 처음 보지?”
아영이 입을 벌린 채 넋을 놓고 쳐다보자 옆에서 두 사람의 모습을 흐뭇하게 쳐다보던 진도 아주머니가 물었다.
“아주머니는 알고 계셨어요?”
그녀의 눈치를 보며 고개를 끄덕인 진도 아주머니가 말을 이었다.
“올 때마다 서준이랑 한두 시간씩 놀아 주고 갔어.”
아영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에너지가 많은 서준과 놀 때마다 아영은 채 한 시간도 안 돼서 지치기 일쑤였으니까.
“왜 제게 말씀 안 하셨어요?”
“사실은 서준이 아빠가 서준이 엄마한테 말하면 못 오게 할 거라면서 비밀로 해 달라고 부탁했거든. 그래도 말했어야 했는데, 서준이 노는 모습 보니까 너무 행복해 보여서 차마 말 못 하겠더라고. 주제넘게 굴어서 미안혀.”
아주머니 잘못이 아니란 건 알고 있지만 저만 소외된 것 같은 이 기분은 가히 좋지 않았다.
지금까지 서준에게 우선순위는 항상 자신이었다.
멀리서 제 얼굴만 보면 달려와 안기던 서준이 오늘은 제가 아닌 태하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하게 웃었다.
그 모습을 보는 그녀는 혼란스러웠다.
“아저씨, 또 태워 주세요!”
“그럴까?”
서준이 땅에 발이 닿자마자 또 해 달라고 성화였다. 그러자 그가 싫은 기색 하나 없는 얼굴로 말했다.
그 순간 아영이 서준에게 다가갔다.
“이서준, 그만.”
“내 걱정 하는 거라면 괜찮아.”
그만하라는 그녀의 말에 서준이 울상을 짓자 그가 끼어들었다. 하지만 아영은 그의 말은 못 들은 척 서준에게 말했다.
“서준아, 아저씨 팔 다쳐서 또 병원에 갔으면 좋겠어?”
“아니.”
서준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럼 오늘은 이 정도만 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알았어.”
서준이 입술을 불퉁하게 내밀며 대답했다.
아영은 잘 생각했다는 듯 등을 토닥인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저씨가 내일 또 태워 줄게.”
“와! 신난다!”
서준이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좋아서 방방 뛰는 모습에 아영이 고개를 홱 돌려 그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태하는 뭐가 문제냐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아영이 그에게 다가가 입술은 거의 움직이지 않은 채 속삭이듯 물었다.
“서준이한테 내일 못 온다고 해.”
“싫은데?”
그는 그렇게 대답한 뒤 태연하게 아주머니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셨어요.”
“언제 퇴원했어요?”
진도 아주머니가 반가운 얼굴로 물었다.
“오늘 아침에 했습니다.”
“아니, 오늘 퇴원했는데 그렇게 움직여도 돼요?”
“네. 이 정도는 괜찮습니다.”
그가 다친 팔을 움직여 보이며 말했다.
“다행이네요. 서준이 구하다 그리돼서 내내 마음 쓰였는데.”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벌써 가시게요?”
그가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며 뒤로 물러나자 진도 아주머니가 서운한 얼굴로 되물었다.
“저 때문에 불편해하는 사람이 있어서요.”
그녀를 염두에 둔 듯한 그의 말에 아영은 못 들은 척 시선을 돌렸다.
태하는 서준에게 내일 오겠다고 약속한 뒤, 차를 타고 돌아갔다.
“볼수록 괜찮은 사람이야.”
“외모에 속고 계시는 거예요.”
멀어지는 그의 차를 보며 진도 아주머니가 내뱉은 말에 아영은 차갑게 응수하며 돌아섰다.
***
게스트하우스로 돌아온 그는 깁스한 팔이 물에 닿지 않도록 조심하며 샤워를 했다.
평상시보다 두 배나 걸려 샤워를 끝낸 태하는 한 손으로 가운 끈을 묶을 수 없어 그냥 풀어헤친 채 거실로 나왔다.
목이 말라 냉장고로 걸어간 그는 생수를 꺼내 벌컥벌컥 들이켰다. 뒤로 젖힌 목 위로 툭 튀어나온 목울대가 남자답게 움직였다.
RRRRR. RRRRR. RRRRR.
핸드폰이 울리자 태하는 반쯤 남은 생수병을 내려놓고 소파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고는 테이블 위에 올려 둔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액정을 확인한 그의 미간이 꿈틀거리더니 이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대니, 메일 보낸 거 뭐야? 설마, 잘못 보낸 거지? 그렇지?]
마음이 급했는지 로라가 인사도 생략한 채 앙칼진 목소리로 따지듯 물었다.
“제대로 간 거 맞습니다.”
[정말 계약 파기하겠다는 거야?]
“네.”
[지금 뭔가 착각하나 본데. 우리 에이전시와 전속 계약 기간 아직 3년이나 남았어.]
“압니다.”
단호한 그의 대답에 로라는 당황한 듯 목소리가 떨렸다.
[그럼 중간에 파기했을 때 위약금이 몇 배인지도 잘 알겠네?]
로라가 떨림을 감추며 지적했다. 그러자 태하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그 위약금은 제가 아니라 대표님이 지급하셔야죠.”
[뭐라고? 계약 파기하겠다는 사람은 넌데 위약금을 왜 내가 지급해?]
로라가 격분해 소리쳤다. 하지만 그럴수록 태하는 더욱 냉정해졌다.
“계약서 조항을 위배하셨으니까요.”
[뭐?]
“메일로 보내드렸다시피 제3조 5항에 ‘‘을’은 계약 기간 중 ‘갑’의 허락 없이 사생활을 간섭하지 않는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대표님께서 허락 없이 제 사생활을 간섭하시는 바람에 제가 막대한 피해를 봤으니 계약 파기는 물론, 수십 배에 해당하는 위약금도 대표님께서 내셔야죠. 안 그렇습니까?”
[지금 나 협박하는 거야?]
“이게 협박으로 들리십니까?”
그의 입에서 조소가 샜다.
[아니면 뭐 하자는 건데?]
“전 원칙대로 움직였을 뿐입니다.”
[캐리를 그렇게 구속한 것도 모자라 지금 감히 날 배신하겠다는 거야?]
교통사고를 사주한 일로 결국 딸이 구속되자 가뜩이나 그 일로 악에 받쳐 있던 로라의 목소리가 표독스러웠다.
“배신이라뇨. 제 인생 가지고 장난치신 분이 할 얘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말했잖아!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라고!]
그의 눈빛에 경멸이 일었다.
“알면서 묵인한 것도 동조한 거나 마찬가집니다.”
[그래! 어디 네 마음대로 해 봐! 난 절대 파기 못 해 주니까!]
분을 못 이긴 로라가 사납게 쏘아붙이더니 그대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끝까지 가겠다면 어쩔 수 없지.
태하는 핸드폰에서 김 변호사의 번호를 찾아 눌렀다.
몇 시간 뒤 언론사, 잡지사 할 것 없이 로라의 기사로 도배가 되었다.
「세계적인 모델 대니얼 권을 발굴한 UTA 에이전시 로라 헤리어트에게 성추행을 당했다는 모델들의 고소장이 미국 검찰에 접수됐다고 보도했다.
피해자 측이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로라 헤리어트가 16세 미성년자 모델을 포함해 총 5명을 자신의 집으로 불러들여 성추행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피해자 측은 이어, 모델계에 막강한 파워를 가지고 있던 로라 헤리어트가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신인 모델들을 성공시켜 주겠다는 말로 현혹해 자신의 욕구를 해소했다고 폭로했다.」
기사를 확인한 태하는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처음 로라에 관한 소문을 들었을 때 그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라고 치부했다.
남성 편력이 심하긴 했지만 미성년자들을 건들 정도로 형편없는 인성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소문은 점점 구체적으로 변해 갔다.
결정적으로 그가 한국으로 오기 얼마 전, 그를 형처럼 따르던 열여섯 살 크리스 레인이 로라에게 성추행을 당했다고 힘들게 고백했을 때에야 떠도는 소문이 진실이라는 걸 깨달았다.
자신의 친구이자 스승이라고 여긴 그녀가 추악한 인간이었다는 걸 알게 된 그는 충격에 휩싸였다.
하지만 10년을 알고 지낸 그녀였기에 이성적인 판단이 되지 않았다.
형처럼 따르던 그에게서 아무 도움도 받지 못하자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던 크리스는 자살 시도를 했다.
다행히 친구에게 발견되어 가까스로 목숨은 건졌지만, 자신의 무책임한 행동으로 인해 친구를 잃을 뻔했다는 생각이 든 태하는 크리스와 함께 변호사를 찾아갔다.
그러던 와중에 추가 피해자가 크리스 말고 더 있다는 걸 알게 된 그는 깊은 분노를 느꼈다.
그동안 증거와 증언을 모아 온 그는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나이 어린 미성년자들을 무참히 짓밟은 파렴치한 로라가 다시는 같은 짓을 벌일 수 없도록 그녀의 범행을 폭로했다.
이제 로라 헤리어트의 몰락은 시간문제였다.
***
카페에서 퇴근을 준비하던 아영은 어린이집 선생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다름이 아니라 서준이 친구와 싸웠다는 것이다.
어린이집 다니고 처음 있는 일이라 아영은 어안이 벙벙했다.
아영이 놀란 마음을 쓸어내리며 이유가 뭐였냐고 묻자 어린이집 선생님은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친구 민우가 서준이에게 아빠가 없다고 놀렸나 봐요. 그래서 화가 난 서준이가 민우를 밀쳤어요.]
“우리 서준이가요?”
아영은 듣고도 믿어지지 않았다. 밝은 성격인 서준은 성격이 좋아 주위에 친구가 많았다. 더구나 친구들이 싸우면 되레 말리는 아이였다.
그런 서준이 친구와 싸운 것도 모자라 밀치기까지 했다니.
[저도 처음 보는 서준이 모습이라 좀 놀랐어요.]
아영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저에게만 없는 아빠의 부재가 서준에게 상처가 될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것 때문에 친구와 싸우게 될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혹시 그 민우라는 아이 많이 다쳤나요?”
[세게 밀치진 않았는데 하필 넘어지면서 뒤에 있던 서랍에 찍히는 바람에 피가 조금 났어요.]
“크게 안 다쳐서 천만다행이네요.”
[네네. 그런데 제가 연락드린 이유는…… 민우 어머니께서 사과를 받고 싶다고 하셔서요.]
“친구 때린 건 서준이 잘못한 거니 당연히 사과드려야죠. 연락처 알려 주세요.”
혹시 그녀가 거절할까 봐 내심 걱정했는지 연락처를 알려 달라고 말하자 담임 선생님 목소리가 한결 밝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