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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캐리가 의도적으로 만들어 낸 스캔들이었을 뿐이야.”
“의도적으로 만들었다고?”
아영이 믿을 수 없다는 눈초리로 쳐다보자 그가 덧붙였다.
“몰래 기자를 불러서 교묘하게 사진을 찍은 다음 기사를 내게 한 거야. 5년 전 너와 터진 스캔들도 캐리가 일부러 터트린 거야. 내 입장 난처하게 해서 너와 헤어지게 할 심산으로.”
“그게 정말이야?”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 그가 그것 말고 더 있다는 듯 말을 이었다.
“그리고 캐리가 네가 임신한 걸 아는 협박범이 있다고 했지? 그런 건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어.”
“하지만 분명히 그 여자가 서준이 초음파 사진을 가지고 있었어.”
“너와 내가 보통 사이가 아니란 걸 알고 너 뒤에 사람을 붙인 모양이야. 그러다 네가 산부인과에 간 걸 알았고, 임신했다는 걸 눈치챈 거지. 그래서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초음파 사진을 뽑아서 너한테 협박했던 거야. 그 시기 사진은 다 비슷비슷하니까.”
아영은 그것도 모르고 그 여자 손에 놀아났다는 생각이 들자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리고 드라마에서나 보던 일이 제게 일어났다는 사실에 소름이 끼쳤다.
“어떻게 알았어?”
“캐리가 입원한 병원에 들렀다가 우연히 로라와 하는 얘길 들었어. 내가 무섭게 추궁했더니 그제야 사실대로 털어놓더라고.”
사람 일은 한 치 앞도 모른다더니. 그런 식으로 사실을 알게 될 줄은 전혀 몰랐다.
“만약 내가 그 얘길 듣지 않았다면 넌 평생 숨길 생각이었어?”
“……아마도.”
아영은 사실대로 말했다.
“이아영, 하나만 묻자.”
그녀가 말없이 돌아보자 그가 진지한 시선으로 마주 보았다.
“그때 나 때문에 떠난 거야?”
“이제 와서 그게 뭐가 중요해?”
“난 중요해. 그러니까 대답해. 만약 서준이를 임신한 게 아니었다면 날 떠나지 않았을 거야?”
그의 독촉에 아영은 긴 숨을 몰아쉰 뒤 천천히 입술을 뗐다.
“그래. 그땐 널 좋아했으니까. 나를 좋아하지 않는 너여도 그때는 너를 너무 좋아했어. 다 버리고 떠날 만큼.”
담담히 얘기하려 했지만 말끝이 떨리는 건 막지 못했다.
“무슨 이야기야? 나도 너를 좋아했어. 내가 그렇게 티를 냈는데도 설마 몰랐던 거야?”
태하는 어떻게 모를 수가 있냐는 듯 자신의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겼다.
아영의 두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놀라 커졌다가 이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는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저를 좋아한 게 아니라 제 몸을 좋아했다.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그가 만약 저를 좋아했다면 고백할 시간은 얼마든지 있었다. 하지만 그는 하지 않았다.
그래놓고 이제 와서 몰랐냐고 묻는 그가 아영은 어이가 없었다.
“아무 말도 해 주지 않았는데 내가 어떻게 알았겠어? 그리고 이미 지난 일이야. 나에게 지난 5년은 긴 시간이었어. 상황도 많이 변했고.”
자신의 고백에도 흔들림이 없는 그녀의 태도에 태하는 초조한 지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아니. 우리 다시 시작할 수 있어. 그때는 내가 상황을 알지 못해서 너를 힘들게 했지만 이제는 아니야. 다시 시작하자. 결혼해서 서준이까지 셋이서 같이 살자.”
아영은 간절한 그의 눈빛을 보고서야 깨달았다.
그가 갑자기 고백한 이유는 제 마음을 홀려서 서준이와 함께 살기 위함이라는 것을.
그녀가 그의 손을 차게 쳐내며 말했다.
“서준이가 네 아들인 게 밝혀지면 네 모델 생활에 치명타가 될 수도 있어.”
“각오한 일이야.”
태하가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대답했다.
“난 원하지 않아. 서준이가 네 아들이라는 이유로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당하게 하고 싶지 않아. 과거에 내가 겪었던 고통을 서준이도 겪게 하고 싶지 않아. 그러니 조용히 살 수 있게 떠나 줘.”
아영의 간절한 표정 위로 더는 상처 받고 싶어 하지 않는 그녀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태하의 얼굴엔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아영은 그의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초조하게 그의 대답을 기다리는데 이윽고 긴 침묵 끝에 그가 입을 열었다.
“좋아.”
“진심이야?”
그녀의 두 눈이 놀라 커졌다.
“대신, 조건이 있어.”
안도하려던 찰나 덧붙인 그의 말에 가슴이 서늘해졌다.
“무슨 조건?”
“서준이에게 내가 아빠라는 사실을 밝혀 줬으면 해.”
“뭐?”
그녀의 미간이 대번에 구겨졌다.
“서준이가 내 아들인 걸 알게 된 이상 예전처럼 지낼 순 없어. 아빠 노릇 제대로 하고 싶어.”
“어차피 너는 미국으로 떠날 텐데 한국에 남을 서준이를 생각한다면 제발 이대로 조용히 떠나 줘.”
그의 입장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살 곳은 한국이 아니라 미국이었다. 서준이 그가 아빠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마자 헤어져야 한다는 뜻이었다.
자주 볼 수도 없는데 굳이 알려서 혼란만 가중하고 싶지 않았다.
“네 입장 충분히 알겠어. 서준이를 데려올 방법은 얼마든지 있지만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을게. 그러니까 서준이에게 내가 아빠라는 것만 알리게 해 줘.”
“권태하…….”
똑. 똑. 똑.
그녀가 막 반박하려는 찰나 들리는 노크 소리에 두 사람의 대화가 끊어졌다.
태하가 문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네. 들어오세요.”
문이 열리자 처음 보는 중년의 남자가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다 그녀를 보고 멈칫하던 남자는 이내 시선을 돌려 태하에게 깍듯이 인사했다.
“어서 오세요. 김 변호사님.”
변호사라는 말에 그녀는 흠칫 놀랐다.
변호사? 갑자기 변호사는 왜 부른 걸까? 설마, 서준이를 데려가려고 소송 준비하는 건 아니겠지?
아영은 왈칵 두려움이 일었다.
“혹시 더 할 얘기 남았어?”
그가 아영을 쳐다보며 물었다.
아영은 그가 왜 변호사를 불렀는지 알고 싶었다. 하지만 손목시계를 힐끔거리는 변호사를 보자 더는 있을 수가 없었다.
“아, 아니.”
“그럼 조심해서 가.”
그가 인사를 건네자 더는 있을 이유가 없어진 아영은 병실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문에 귀를 대고 엿듣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저를 힐끗거리고 있는 간호사를 보자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
이틀 뒤 퇴원한 그는 다시 게스트하우스로 돌아왔다.
그러더니 수시로 카페에 내려와 커피를 주문해서 마시기도 하고, 점심으로 간단하게 샐러드를 먹기도 했으며, 노트북을 가져와 카페 구석에 앉아 뭔가를 작업하기도 했다.
아영은 자꾸만 제 시야를 어지럽히는 그 때문에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가까스로 일을 마치고 퇴근하는데 뒷문 주차장에서 그가 기다리고 있었다.
검은색 벙거지를 깊게 눌러쓴 채 차체에 기대 있던 그가 그녀를 발견하고 몸을 세웠다.
한 손은 주머니에 있었고, 나머지 한 손은 외투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타.”
“어딜 가려고?”
“데려다줄게.”
“버스가 편해.”
아영이 그를 지나쳐 가려는데 그가 그녀의 팔목을 붙잡았다.
“어차피 목적지도 같은데 굳이 따로 갈 필요 없잖아.”
“목적지가 같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아영이 빠르게 주위를 살핀 뒤 그의 팔을 뿌리치며 되물었다.
“서준이 보러 갈 참이었거든. 이제 퇴원했으니 시간 나는 대로 서준이와 함께 보낼 생각이야.”
“아직 서준이에게 말 못 했어.”
“지금 가서 하면 되겠네.”
태하는 뭐가 문제냐는 듯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뭐? 서준이가 받을 충격은 생각 안 해?”
놀란 그녀가 언성을 높이자 주차장에서 차를 세우고 카페로 향하던 두 남녀가 돌아보았다.
그러자 태하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언젠가 알아야 할 일이야.”
“그렇다 하더라도 지금은 아니야.”
“말할 생각이 없는 건 아니고?”
정곡을 찔린 아영은 움찔했다.
“일단 타. 가면서 얘기해.”
때마침 카페에서 나온 일행들이 주차장으로 걸어오자 그가 조수석 문을 열며 말했다.
아영은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고집부렸다가 사람들 눈에 띄어 괜한 스캔들에 휘말리고 싶지 않아 마지못해 올라탔다.
조수석 차 문을 닫은 뒤 긴 다리로 성큼 걸어온 그가 운전석에 올라탔다.
그러고는 그가 불편하게 한 손으로 안전벨트를 당겨 매는 모습을 보고서야 깨달았다. 그가 왼쪽 팔을 다쳤다는 걸.
외투에 가려져 깜빡 잊고 있었다.
“운전 어떻게 하려고.”
“다치기 전에도 한 손으로 했어.”
시동을 켠 그가 한 손으로 핸들을 돌리며 문제없다는 듯 말했다.
차가 자갈을 튕기며 빠르게 주차장을 벗어나더니 그가 내비도 켜지 않고 그녀의 집 방향으로 차를 몰았다.
아영은 놀라 그를 돌아보았다.
“우리 집 가는 길을 어떻게 알아?”
“자주 갔었으니까.”
“뭐?”
태하가 앞만 보며 툭 내뱉은 말에 아영이 놀라 되물었다.
“서준이가 눈에 밟혀서 자주 갔었거든.”
아영은 저 모르게 그가 왔었다는 얘기에 한마디 하고 싶었지만, 그가 아빠라는 사실이 들통난 상황이었기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잠시 뒤 그의 차는 익숙하게 그녀의 집 근처 공터에 주차했다.
“잠깐만.”
그가 안전벨트를 풀고 내리려 하자 아영은 다급하게 그의 팔을 붙잡았다.
운전석 문을 열고 나가려던 그가 다시 차 문을 닫으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왜.”
“……시간을 줘.”
“무슨 시간?”
“지금 당장 서준이에게 네가 아빠라고 말하면 아마 충격받을 거야. 그러니까 시간을 갖고 천천히…….”
“서준이에게 아빠에 대해서 뭐라고 말했어?”
그녀의 말을 끊은 그가 되물었다.
“미국에…… 가 있다고 했어.”
“다행이네. 혹시 죽었다고 했을까 봐 걱정했는데. 좋아. 네 말대로 오늘은 얼굴만 보고 돌아갈게.”
“보고 가겠다고?”
“그럼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돌아가라고?”
“하지만…….”
똑똑.
그때 차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두 사람의 대화가 끊겼다.
아영이 놀라 고개를 돌리자 차창 밖으로 진도 아주머니와 서준이 보였다.
당황한 아영이 그를 돌아보자 그는 벌써 안전벨트를 풀고 운전석에서 내리고 있었다. 아영도 따라 내릴 수밖에 없었다.
“아저씨─.”
그가 차에서 내리자 그를 발견한 서준의 두 눈이 놀라 커지더니 아주머니 손을 뿌리치고 달려갔다.
서준이 달려오는 걸 본 태하가 무릎을 굽혀 오른팔을 펼치자 서준이 그의 품에 쏙 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