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5화 (65/82)

65

카페 근처 오름에서 축제가 시작되어서인지 아침부터 사람들로 붐볐다.

다른 때 같았으면 밥 먹을 시간도 없이 종일 커피를 내려야 하는 게 곤욕이었을 테지만, 오늘만큼은 다른 생각 할 시간이 없어 차라리 다행이었다.

하지만 퇴근 무렵 걸려 온 그의 전화에 아영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처음에는 당황해서 받지 못했고, 두 번째는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받지 못했다.

그러자 그는 곧바로 문자를 보내 왔다.

「설마 내 전화 피하는 건 아니지? 전화 줘.」

초조해진 아영은 입술을 물어뜯었다.

수인에게 이야기를 전해 들은 뒤 며칠이 지나도록 그에게선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처음에 안도했던 아영은 시간이 지날수록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게, 평상시 그라면 석현의 이야기를 믿었든, 믿지 않았든 제게 확인했을 성격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그런 와중에 오늘 아침 「물어볼 게 있어. 퇴근 후에 보자」라는 문자를 보내 오자 아영은 간담이 서늘해졌다.

이제 와서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보자는 건지 덜컥 겁이 난 아영은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그랬더니 퇴근 시간이 되자 시간 맞춰 전화를 한 것이다.

「내가 카페로 갈까? 아니면 네가 병원으로 올래?」

또다시 보내 온 그의 문자를 본 순간 아영은 전화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호음이 길게 울린 뒤 끊으려는 찰나 그가 전화를 받았다.

[내가 찾아갈까 봐 겁이 나긴 했나 봐. 바로 전활 하는 거 보니.]

열흘 만에 듣는 그의 목소리는 평상시와 똑같았다. 마치 석현에게 아무 얘기도 듣지 않았던 것처럼. 그래서 더 불안했다.

“무슨 일이야?”

[만나서 얘기해.]

“바빠. 할 얘기 있으면 전화로 해.”

[전화로 할 얘기 아니야.]

“대체 무슨 얘긴…….”

[내가 갈까? 네가 올래?]

전혀 물러설 생각이 없는 그의 완강한 태도에 아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더는 도망칠 수도, 도망갈 곳도 없었다.

“내가 갈게.”

전화를 끊은 그녀의 손끝이 잘게 떨렸다.

아영은 길게 심호흡했지만, 마음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

똑. 똑.

“들어오세요.”

드르륵. 아영이 VIP 병실 문을 열자 창가에 선 태하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붕대로 감겨 있던 팔은 반깁스로 바뀌어 있었다. 그래서인지 움직임이 전보다 수월해 보였다.

“드디어 오셨군.”

그녀가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문 앞에서 쭈뼛거리며 서 있자 그가 덧붙였다.

“우리 사이 소문낼 게 아니면 문 닫고 들어오지.”

그의 말에 병실 안으로 발을 들여놓은 아영은 그와 최대한 멀리 떨어진 곳에 섰다.

그녀의 의도를 눈치챘는지 그의 입꼬리가 비릿하게 올라갔다.

“할 얘기가 뭐야?”

방어적인 그녀의 모습을 빤히 쳐다보던 그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아무리 내가 미워도 다친 곳은 괜찮냐고 먼저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니야?”

“그래 주길 원해?”

“됐다.”

그녀의 말에 그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할 얘기 있으면 빨리해. 서준이 기다려.”

그녀의 입에서 서준의 이름이 나오자 순간 그의 눈빛이 반짝였다.

“서준이는 잘 지내지? 퇴원하고 한 번쯤은 서준이하고 병문안 올 줄 알았는데.”

물론 서준은 그가 있는 병원에 가겠다고 매일 졸랐다. 하지만 그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던 아영은 바쁘다는 핑계를 대며 피했다.

“병문안은커녕 연락 한번 없더라.”

“……바빴어.”

“날 피한 게 아니라?”

정곡을 찔린 아영은 숨을 삼켰다.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던 그가 나직하게 덧붙였다.

“뺑소니범 찾았어.”

“어디서 어떻게?”

태하는 그동안 있었던 이야기를 모두 그녀에게 들려주었다.

충격을 받은 아영이 휘청하자 재빨리 그가 다가섰다.

가까스로 창틀을 잡은 아영은 손을 뻗어 그가 오지 못하도록 막았다.

그녀에게 가려던 그가 걸음을 멈췄다.

“정말 그 여자가 이 모든 일을 시켰다는 거야?”

아영이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묻자 태하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왜 아무 죄 없는 서준이에게 그런 짓을 벌인 거야?”

“너와 내가 다시 가까워지는 게 두려웠겠지.”

아영은 마치 저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 같아 서준에게 너무 미안했다.

엄마로서 지켜 줘야 하는데 되레 위험에 빠트린 것 같아 깊은 죄책감이 일었다.

“그 여잔 어떻게 되는 거야?”

“지금 심신 미약을 주장하고 있어.”

TV에서 흔히 듣던 말이었다. 아영은 답답한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럼, 아무런 처벌도 안 받고 미국으로 출국할 수도 있다는 거야?”

그녀의 목소리가 격앙되자 태하가 덧붙였다.

“진정해. 심신 장애가 있다고 해서 무조건 책임을 감경하거나 면제해 주는 건 아니야. 그러니 이번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절대 빠져나가지 못하게 할 거야. 내가 그렇겐 안 둬.”

태하는 기필코 그렇게 하고 말겠다는 듯 강경한 어조로 말했다.

“넌 괜찮아?”

“뭐가?”

“그 여자가 그런 짓을 벌였다는 게.”

순간 그의 눈동자에 푸르게 날이 섰다.

“그래서 더 용서가 안 돼. 감히 내가 아끼는 사람을 다치게 했으니까.”

아끼는 사람이라고?

설마, 서준이에 대해서 알게 된 건 아니겠지?

아니야. 아닐 거야.

불안감이 엄습한 아영은 어서 이곳을 빠져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알려 줘서 고마워. 할 얘기 끝난 것 같은데 난 그만 가 볼게. 몸조리 잘해.”

아영이 들고 있던 가방을 어깨에 메며 서둘러 말했다.

급한 마음에 그의 인사도 듣지 않고 돌아서는데.

“아직 내 얘기 안 끝났어.”

그의 말에 그녀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아영이 천천히 몸을 돌려 그를 쳐다보자 그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얼마 전에 석현이에게 전활 받았어.”

아영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드디어 올 게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자 아득해졌다. 서준의 얘길 꺼낼 게 분명했다.

아영은 각오하고 왔음에도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하지만 정신 차려야 했다. 그의 페이스에 말려들지만 않는다면 이 난관을 극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영은 떨리는 숨을 몰아쉰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수인이한테 들었어. 석현이가 너한테 전화해서 주사 부렸단 얘기.”

“주사라고?”

“그래.”

담담함을 가장하며 말했지만, 입술 끝이 경련하듯 떨리는 건 어쩌지 못했다.

아영은 서둘러 입술 끝에 힘을 주며 말을 이었다.

“넌 한 번도 피임 없이 그냥 한 적 없었으니까.”

“정확해?”

“무슨, 뜻이야?”

“네 기억이 정확하냐고.”

저를 꿰뚫듯 쳐다보는 그의 시선에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나도 처음엔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무시하고 넘기려고 했지.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딱 하루, 내가 피임 없이 널 안은 적이 있다는 게 떠올랐어.”

설마 그도 기억해 낼 줄 몰랐던 아영은 당황해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아니. 그, 그런 적 없어.”

“날짜까지 말해 줘?”

확신에 찬 그의 어조에 아영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만약 네 말대로 있었다고 쳐. 설마, 그 하루 때문에 서준이가 네 아이라고 착각하는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

태연하게 내뱉은 그가 그녀에게 서류 봉투를 내밀었다.

“이게 뭐야?”

“보면 알아.”

아영이 그가 내민 서류 봉투를 빤히 쳐다보며 되묻자 그가 한쪽으로 얼굴을 기울이며 말했다.

“궁금할 거 아니야. 내가 뭘 믿고 우기는지.”

그를 탐탁지 않은 시선으로 쳐다보던 아영은 이내 그의 손에 들린 봉투를 열어 그 안에 든 종이를 꺼냈다.

그러다 맨 첫 줄에 적힌 ‘친자 확인 검사 결과 보고서’라는 글자를 본 순간 종이를 쥔 그녀의 손이 격렬하게 떨렸다.

빠르게 서류에 적힌 내용을 읽어 내려간 아영은 마지막 줄에 적힌 ‘권태하와 이서준은 99.9% 확률로 부자 관계가 성립합니다’라는 문장을 확인하자마자 얼굴이 희게 질리더니 이내 휘청했다.

재빠르게 다가온 그가 오른손으로 그녀의 팔을 움켜쥐었다.

아영이 그의 팔을 강하게 쳐내며 말했다.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서준이를 처음 봤을 때부터 이상했어. 분명 처음 본 게 맞는데도 낯설지가 않았거든. 나중에 내 어린 시절이랑 놀랍도록 많이 닮았다는 걸 깨달았을 때 난 내가 미친놈이라고 생각했어. 왜냐하면 서준이가 내 아들일 리가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아영은 곧 쓰러질 것 같은 얼굴로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태하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석현이의 전활 받고 나자 어쩌면 내 의심이 사실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래서 병원에 입원했을 때 서준이의 손톱과 머리카락을 채취해서 보냈어. 서준이 내 아들이라는 확실한 증거가 필요했거든.”

생각도 하지 못했다. 저 모르게 이런 일을 진행하고 있을 줄은.

석현의 얘길 듣고 그답지 않게 조용할 때 알아챘어야 했는데, 아영은 뼈아픈 후회가 밀려왔다.

“머, 멋대로 이러는 게 어디 있어?”

“그건 내가 할 소리야. 내 아일 가져 놓고 왜 나에겐 한마디도 하지 않았던 거지?”

당장이라도 그녀를 잡아먹을 듯 사납게 으르렁거리는 그를 보자 아영은 마른침을 삼켰다.

수없이 이런 상황을 떠올렸었다. 담담하고 차분하게 상황을 설명하고 싶은 마음과 달리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말해.”

“…….”

“말하라고. 왜 숨겼는지!”

“하려고 했어. 했는데…….”

“했는데 뭐?”

아영이 머뭇거리자, 그가 다그치듯 되물었다.

“네가 아일 싫어한다는 말을 듣고, 차마 할 수가 없었어.”

그녀의 말에 짐작이 가는 사람이 있는지 그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캐리가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했는지 모르지만, 나는 그냥 아이를 좋아하지 않을 뿐이었어. 그렇다고 내가 내 아이를 싫어할 리가 없잖아.”

“그럼 그 여자가 거짓말을 했다는 거야? 나는 네가 그 여자와 깊은 관계라서 그런 얘기까지 다 한 줄 알았어.”

아영은 당황스럽다 못해 당혹스러웠다. 그가 머리를 거칠게 쓸어넘기며 덧붙였다.

“캐리는 오랫동안 날 쫓아다녔어. 하지만 난 캐리에게 동생 이상의 감정을 단 한 번도 느껴 본 적이 없어. 그래서 캐리에게 몇 번이나 내 마음을 전달했지만 곧이듣지 않았어.”

“하지만 얼마 전에 그 여자와 스캔들도 났었잖아.”

두 사람의 모습이 찍힌 사진을 보고 얼마나 가슴 아파했던가. 덕분에 몸살이 심해져 병원에 실려 가기까지 했었다.

“그건 캐리가 의도적으로 만들어 낸 스캔들이었을 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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