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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해. 약속하란 말이야! 그 여자 없애 주겠다고!”
로라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눈물만 흘리자 캐롤라인이 눈을 희번덕 뜨며 흥분해 소리쳤다.
“캐리…….”
“엄마도 그 여자랑 한통속이지? 그래서 나 못 나가게 하는 거지? 그렇지?”
“캐리,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비켜! 이번엔 그년 가만 안 놔둘 거야. 두 번 다시 대니 앞에 얼쩡거리지 못하게 할 거야.”
“안 돼! 캐리! 캐리!”
로라는 어떻게든 딸의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양손을 펼쳐 진정시키려 했다.
하지만 캐롤라인은 이미 정신이 나간 듯 중얼거리더니 제 팔에 있는 링거 줄을 뽑아 던지고는 침대에서 뛰어내렸다. 그러고는 저를 막으려는 로라의 손을 피해 문 쪽으로 뛰어갔다.
벌컥. 문을 연 캐롤라인은 그 자리에 얼음처럼 굳어 버렸다.
곧바로 뒤따라간 로라 역시 문 앞에 선 사람을 보자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태하가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제가 들은 얘기 모두, 사실입니까?”
그의 섬뜩한 눈빛에 캐리는 부들부들 떨었고, 로라는 목이 졸린 사람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병실 안으로 저벅저벅 들어온 그가 문을 닫았다. 그런 뒤 한쪽 무릎을 굽혀 바닥에 주저앉은 캐리의 팔을 움켜쥐었다.
“읏. 아파.”
“캐리, 네가 벌인 일이니까 네 입으로 말해.”
으스러질 것 같은 고통에 캐롤라인이 신음을 흘렸지만, 태하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그의 매섭고 섬뜩한 시선에 겁이 난 그녀가 옆에 있는 로라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자 보다 못한 로라가 불쑥 끼어들었다.
“대니, 내, 내가 설명할게.”
“아니요. 캐리 입으로 직접 듣겠습니다.”
“하지만 지금 캐리 상태가…….”
로라의 뒷말은 그의 살벌한 시선에 삼켜졌다.
다시 캐롤라인에게 고개를 돌린 그가 얼음이 뚝뚝 떨어질 듯 차가운 어조로 물었다.
“캐리, 똑바로 말해. 이아영한테 무슨 짓을 벌인 건지.”
“나, 난 몰라. 그냥 그 여자 혼자 도망간 거야!”
“아니. 네 거짓말에 속아 도망가게 했겠지.”
“아니야! 으윽!”
그가 다치지 않은 쪽 손으로 캐리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손등의 핏줄이 툭툭 불거질 정도로 그가 힘을 주자 캐롤라인의 얼굴이 일그러지면서 고통에 찬 신음을 흘렀다. 그런데도 그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그런데 그것도 모자라 감히 아이까지 건드려?”
“뭐?”
그녀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하더니 동공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오늘 네가 사주한 놈이 다 불었어.”
“그게 무슨 말이야? 캐리가 누구에게 뭘 사주했다는 거야?”
물어보는 로라의 목소리 파르르 떨렸다.
“캐리 때문에 사람이 죽을 뻔했습니다.”
“뭐?”
로라의 얼굴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아니야, 엄마 난 그런 적 없어! 대니 말 믿지 마!”
“이게 그 증겁니다.”
뻔뻔한 캐롤라인의 거짓말에 태하는 비소를 날리더니 이내 자신이 입수한 녹음 파일을 재생했다.
지지직 잡음이 들리더니 이내 낯선 음성이 들렸다.
[여보세요.]
[거기가 용호기획인가요?]
[네. 고객님.]
[‘더 파인드’에서 소개받고 전화했어요.]
[아, 그러시군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정말 시키는 건 뭐든 가능해요?]
[그럼요. 말씀만 하세요.]
[사람 손 좀 봐주세요.]
[손이라면 어느 정도를 말씀하시는 건지.]
[죽지 않을 정도면 돼요.]
[원하시는 방법이 있을까요?]
[눈치채지 않게 교통사고로 해 주세요.]
[그건 위험수당이 붙습니다만.]
[금액은 원하는 대로 드리죠.]
[좋습니다. 손보고 싶은 사람 신상 알려 주시죠.]
태하는 거기서 재생을 종료했다. 그 뒤는 다시 듣고 싶지 않았다.
“이래도 못 믿으시겠습니까?”
녹음을 들은 로라의 얼굴이 충격으로 얼어붙었다.
“……캐리, 아니지? 지, 지금 내가 들은 얘기 저, 전부 사실 아니지?”
“아악악악! 아니야! 난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 난 모르는 일이라고!”
자신과의 대화 내용이 녹음되고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캐롤라인은 모든 게 탄로 나자 갑자기 귀를 틀어막으며 울부짖기 시작했다.
미친년처럼 병실을 날뛰는 딸의 모습에 로라는 철퍼덕 바닥에 주저앉았다.
***
“캐리는 잠들었습니까?”
“진정제 두 번 맞고.”
로라가 붉게 충혈된 눈으로 그의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캐롤라인은 그가 계속 막다른 길로 몰아넣자 발작을 일으켰다.
제 머리를 쥐어뜯으며 소리를 지르더니 갑자기 병원 안 집기들을 마구잡이로 집어 던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난동에 간호사들이 뛰어왔다. 세 사람이 달라붙어 진정시키려 했지만, 정신이 나간 그녀의 힘을 감당하지 못했다.
결국, 남자 간호사 두 명이 와서 캐롤라인의 양팔과 두 다리를 붙잡았다.
침대에 강제로 눕힌 간호사는 그녀에게 진정제를 투여했다. 그런데도 발버둥을 멈추지 않자 진정제를 또 추가했다.
캐롤라인을 체포하기 위해 왔던 경찰은 체포 영장 집행을 미루고 돌아갔다.
게거품을 물며 병든 동물처럼 축 늘어진 딸의 모습에 로라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대니, 일이 이렇게 돼서…….”
“아영이 일은 언제 아셨던 겁니까?”
사과할 틈도 주지 않고 몰아붙이는 그의 질문에 로라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헐어 버린 눈가가 쓰라려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로라는 천천히 감은 눈을 떴다.
“……미안해.”
“처음부터 알고 계셨다는 뜻이군요.”
그의 입에서 차가운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내가 알았을 때는…… 이미 일이 벌어진 뒤였어.”
“그때라도 말씀하셨어야죠!”
태하가 참지 못하고 언성을 높였다.
처음 듣는 고성에 놀란 로라가 움찔하자 태하는 치밀어 오르는 화를 삭이기 위해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대표님은 제가 그 여자를 얼마나……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고 계셨잖아요.”
“……그래서 더 말 못 했어.”
“뭐라고요?”
이를 갈듯 내뱉은 그의 말에 로라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그의 눈썹이 사납게 치켜 올라갔다.
“사실대로 말하면, 네가 우릴 버리고 떠날 것 같았거든.”
양손을 초조하게 감싸며 내뱉은 로라의 말을 들은 그의 입에서 하, 하고 조소가 샜다.
“지금 두 사람의 이기심 때문에 아영이와 날 헤어지게 했다는 겁니까?”
“그땐 그럴 수밖에 없었어. 너도 알잖아. 캐리가 널 얼마나 의지하고 필요로 했…….”
“캐리! 캐리! 제가 언제까지 캐리를 위해서 희생해야 합니까?”
“희생이라니. 네가 원해서 한 거잖아?”
로라의 변명에 그가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그러자 로라가 양팔을 들어 올리며 당황스럽다는 얼굴로 따지듯 말했다.
“내가 원해서 했다고요? 아니요. 당신이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죠.”
“뭐?”
“캐리의 요구대로 하지 않으면 제게 들어온 쇼나 광고를 일방적으로 다른 모델로 대체한 거, 제가 모른 줄 아셨습니까?”
“내, 내가 언제?”
당혹스러움으로 물든 로라의 눈이 빠르게 깜빡였다.
“그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건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캐리와 겉으론 성공한 사업가지만 딸에게 휘둘려 사는 당신이 안쓰러워서였습니다. 그런 내 등에 칼을 꽂은 것도 모르고 당신이 부르면 바보 병신처럼 꼬리를 흔들며 달려간 저를 보며 즐거우셨습니까?”
“…….”
그의 눈동자에 깊게 밴 상처에 로라는 선뜻 말을 하지 못하고 입만 달싹였다.
“그 여자를 잃어버린 지난 5년이 제게 얼마나 지옥 같았는지 누구보다 잘 아셨던 대표님이 어떻게 제게 그러실 수 있습니까?”
상처받은 짐승이 포효하듯 울부짖는 그를 보며 로라의 턱 끝이 파르르 떨렸다.
“대니, 진심으로 미안해. 일부러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었어. 캐리에게 처음 그 얘기를 들었을 때 너한테 사실대로 터놓을 생각이었어. 하지만 캐리가 너한테 말하면 죽어 버리겠다고 협박하는 바람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어. 무릎 꿇고 빌라고 하면 빌게. 그렇게 해서라도 대니의 화가 풀린다면.”
안 봐도 어떤 상황이었을지 짐작이 갔다.
캐롤라인은 매번 제 요구 사항을 들어주지 않으면 자살하겠다고 협박했다. 그리고 제 협박이 먹히지 않으면 거리낌 없이 실천했다.
그럴 때면 로라는 하나뿐인 제 딸이 행여나 죽을까 봐 벌벌 떨며 캐리의 말대로 움직였다.
매번 악순환이 되풀이되었다.
“당신은 캐리를 지킨 게 아니라 오히려 병을 키운 겁니다.”
“그래. 이제야 깨달았어. 그동안 내가 딸을 잘못 키웠다는 걸. 미국으로 돌아가면 캐리 바로 정신 병원에 입원시킬 생각이야. 그러니 마지막으로 한 번만 용서해 줘.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할게. 그러니 제발 경찰에게만 넘기지 말아 줘. 내가 이렇게 빌게.”
자신의 사과에도 그가 꿈쩍도 하지 않자 로라는 눈물로 호소했다.
한 올 한 올 섬세하게 올린 마스카라가 눈물에 번져 검은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 모습을 보는 태하의 눈빛엔 안쓰러움 따윈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빌어야 할 사람은 제가 아니라 아영이와 아이예요.”
“알았어. 지금 당장이라도 그 여자 찾아가서 무릎 꿇고 빌게. 그 여자가 발이라도 핥으라면 핥을게. 그러니 제발 합의만 할 수 있게 도와줘. 응?”
“그건 힘들 것 같습니다.”
그의 단호한 거절에 로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럼 캐리가 구속되도록 두겠다는 거야?”
“잘못했으면 대가를 치러야 하는 건 당연합니다. 그게 캐리가 됐든, 당신이 됐든.”
“난 이 일과 무관해.”
그가 캐리의 일에 자신까지 끌어들이자 로라는 선을 그었다.
그러자 그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이 일과 무관하다 하더라도, 가슴에 손을 얹고 당신도 깨끗하다고 장담할 수 있습니까?”
“그게 무슨 뜻이야?”
서늘한 그의 시선에 로라의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흔들렸다. 하지만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재빨리 표정을 갈무리하며 되물었다.
“그건 당신이 더 잘 알겠죠.”
그의 말에 로라는 뭔가 짚이는 게 있는지 눈가가 가늘어졌다.
“설마, 나에 대한 소문 듣고 이러는 거야?”
태하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다만 쓰게 웃을 뿐.
그의 냉소적인 태도에 로라는 입 안이 바짝 말라 왔다.
“오, 대니, 그건 사실이 아니야. 날 시기 질투하는 것들이 악의에 차서 떠들어 대는 거짓일 뿐이야. 설마 그 말을 믿는 건 아니겠지?”
로라의 항변에도 그의 표정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곧 알게 되겠죠.”
“고, 곧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그의 눈빛에서 로라는 뭔가를 느꼈는지 목소리가 격앙되었다.
“죄는 하늘에 가려지지 않습니다. 언젠가 기필코 나타나죠.”
태하는 그 말을 남기고 빠르게 멀어져 갔다.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야.
로라의 새빨간 입술 끝이 파르르 떨렸다.
다음 날, 캐롤라인은 체포되었다. 자신의 불안이 현실이 되자 그때부터 로라는 두려움에 휩싸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