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3화 (63/82)

63

사고 바로 다음 날, 별다른 이상이 없어 서준은 바로 퇴원할 수 있었다.

태하와 떨어지기 싫어 더 있겠다는 서준을 간신히 설득해 집으로 왔을 때 아영은 진이 다 빠졌다. 현성의 배려 덕분에 하루 더 쉴 수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아주머니와 수인을 제외하고는 먼저 다가간 적이 없을 만큼 낯가림이 있던 아이였다.

어렸을 때부터 봐 온 현성과 아직도 데면데면할 정도로 곁을 잘 주지 않는 아이가 진도 아주머니 말처럼 핏줄은 핏줄인지, 그에게만 유독 그러는 게 신기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마음이 무거웠다.

RRRRR. RRRRR. RRRRR.

서준이 낮잠 자는 사이 밀린 집안일을 하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액정을 확인하니 친구 수인이었다.

그제야 수인에게 잘 도착했다는 전화를 하지 않았던 게 떠올랐다.

공항에 도착했을 때 간당간당하던 배터리가 병원에 도착하고 얼마 뒤 방전되었고, 나중에 전화한다는 게 정신없어서 깜박 잊고 있었다.

아영은 수인이 난리 칠 걸 생각하고 미리 숙이고 들어갔다.

“수인아, 미안해. 걱정 많이 했지?”

[어? 어.]

“전화하려고 했는데 배터리가 방전돼서 못했어. 혹시 화 많이 났어?”

[아, 아니. 화는 무슨…… 그, 그럴 수도 있지.]

평상시라면 왜 전화를 안 했느냐부터 시작해서 내가 너 때문에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느냐, 전화는 장식으로 가지고 다니냐며 막 퍼부었을 수인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뭘 잘못 먹은 사람처럼 말을 더듬는 게 어딘가 이상했다.

“너 왜 그래?”

[저기, 아영아 혹시 병원에서 아무 일…… 없었어?]

감이 좋지 않았다.

어떤 상황이든 거침없이 말하던 수인이었다.

그런 수인이 이렇게 말을 더듬는다는 건 뭔 일을 저지른 게 분명했다.

“무슨 일?”

[그게 그러니까…….]

불안감이 엄습했다.

“한수인, 똑바로 말해. 대체 무슨 일이야.”

웃음기가 사라진 그녀의 어조에 수인이 울먹이며 입을 열었다.

[네가 싱글맘이라고 하니까 지수랑 석현이가 하도 어이없는 소리를 하길래 홧김에 서준이 태하 아들이라고 말해 버렸어.]

“뭐?”

[아영아, 미안해. 진짜 죽을죄를 지었어. 아무리 화가 나도 그러면 안 되는 거였는데. 나도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 흑흑.]

빨래를 널던 아영은 순간 휘청했다.

“태하도…… 알아?”

[좀 전에 석현이한테 전화 왔는데…… 그 새끼가 태하한테 말했나 봐.]

그 소리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서둘러 팔을 뻗어 벽을 짚었다. 하지만 다리에 힘이 빠져 결국 주저앉고 말았다.

[아영아, 괜찮아? 너 혹시 쓰러진 거야?]

쿵 소리에 놀란 수인이 소리쳤다.

“태하가…… 태하가 뭐라고 했대?”

[그걸 모르겠대. 술에 취해서 기억이 하나도 안 나나 봐.]

아영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최악이었다.

“……끊을게.”

[아영아, 아영아!]

아영은 그대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머릿속으로 항상 생각했었다.

죽을 때까지 밝히고 싶지 않지만, 꼭 밝혀야 하는 순간이 다가오면 제 입을 통해서 밝혀지길 원했다.

단연코 이렇게 어처구니없고, 어이없게 알려지길 원하지 않았다.

어떡하지. 어떻게 해야 할까.

지금이라도 전화해서 석현이가 잘못 말한 거라고, 술에 취해서 헛소리한 거라고 말해 볼까? 하지만 그럼 더 의심하지 않을까?

석현이 한 얘길 제가 나서서 변명한다는 자체가 그의 의심을 더 부추기는 것 같아 아영은 섣불리 행동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권태하는 뭐라고 했을까? 믿었을까? 아니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무시했을까?

지금껏 그에게 아무런 연락이 없는 걸 보면 후자일 것 같지만, 뭐든 확실하게 하고 넘어가는 성격인 그가 되레 조용한 게 아영은 더 불안했다.

그렇다고 그에게 전화해서 확인할 자신도, 병원으로 찾아가 물어볼 용기도 없었기에, 아영은 숨죽이며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

하루가 1년처럼 더디게 갔다.

친자 확인 결과가 나오려면 아직 며칠이 더 남았는데도 불구하고 태하는 전화벨이 울릴 때마다 움찔 놀랐다. 바로 지금처럼.

RRRRR. RRRRR. RRRRR.

서둘러 액정을 확인한 태하는 익숙한 번호가 뜨자 낮은 한숨을 내쉬며 전화를 받았다.

“네. 김 변호사님.”

[몸은 좀 어떠십니까?]

“괜찮습니다. 혹시 뭐 나온 거 있습니까?”

[네.]

태하의 몸이 긴장감으로 굳어졌다.

“뭡니까?”

[조금 전, 인근 CCTV와 근처에 주차된 차 블랙박스 영상을 확인해 본 결과 뺑소니범을 잡았다고 합니다.]

역시 압력을 넣으니 수사가 빨리 진행되는군.

처음 사고 현장에 출동한 경찰은 사고 차량이 대포차라는 걸 알고 잡기 어려울 거라며 난색을 보였다. 그래서 태하는 태어나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부탁했다.

아들의 사고 소식에 화가 난 권 회장은 바로 친분이 있던 경찰청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누굽니까?”

[흥신소 직원이 몰던 차로 확인되었습니다.]

그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그 말은 누군가의 사주를 받았다는 겁니까?”

[네. 사고를 지시한 사람은 재미 교포 ‘캐롤라인 리’라는 여자로 밝혀졌습니다.]

“뭐라고요?”

태하는 제 귀를 의심했다.

[혹시 아시는 분입니까?]

그의 격앙된 목소리에 김 변호사가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증거는요?”

태하는 김 변호사의 질문을 무시하고 되물었다.

대답을 바라고 한 질문이 아니었는지 김 변호사는 바로 말을 이었다.

[나중에 협박용으로 사용할 계획이었는지 사무실을 압수 수색 한 결과 캐롤라인 리와 통화한 녹음 파일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캐롤라인 체포 영장은 언제 발부된다고 합니까?”

[지금 체포 영장이 나와서 이동하는 중이라고 합니다.]

“제가 먼저 이동할 테니 시간을 조금만 벌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태하의 손이 분노로 인해 부들부들 떨렸다.

믿을 수가 없었다.

우울증으로 인해 상식을 벗어난 행동을 가끔 저지르긴 했지만, 이 같은 범죄를 저지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아마 캐롤라인은 눈치챘을 것이다. 다른 여자들과 달리 아영을 향한 그의 마음이 심상치 않음을.

그래서 이런 무모한 짓을 저지른 게 분명했다.

그동안 그녀가 무슨 짓을 저질러도 눈감아 주었던 건 로라 때문이었지만, 어린 나이에 캐롤라인이 받아야 했던 상처가 불쌍하고 안타까웠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건 선을 넘었다. 자신이 조금만 늦었다면 서준이 죽었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생각하자 캐롤라인에게 남아 있던 일말의 동정이 순식간에 증발하면서 그 자리에 살기만 남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태하는 캐롤라인이 입원해 있는 병원으로 향했다.

***

“대니에게 갈 거야!”

“안 돼. 너 지금 외출 금지야.”

캐롤라인이 제 팔에 있는 링거 줄을 뽑으려 하자 로라가 재빨리 막아섰다.

“싫어! 이대로 대니 놓치면 엄마가 책임질 거야?”

“대니 안 놓쳐. 재활만 받고 바로 오겠다고 엄마랑 약속했다니까.”

로라가 팔을 잡고 움직이지 못하게 하자 캐롤라인이 발버둥 치며 소리쳤다.

로라는 저보다 키가 큰 딸의 팔을 악착같이 붙잡으며 달래려 애썼다.

“엄만 그 말을 믿어?”

“믿어. 대니는 본인이 한 약속은 반드시 지키는 사람이니까.”

확고한 로라의 어조에 씩씩거리던 캐롤라인의 어깨가 잦아들었다. 그걸 눈치챈 로라가 부드러운 어조로 덧붙였다.

“너도 알잖아. 대니가 얼마나 무대에 서는 걸 좋아하는지. 이대로 한국에 눌러앉을 사람 아니야. 그래서도 안 되고.”

“대니가 여기 있는 한 난 한 발자국도 안 움직일 거야!”

“캐리, 넌 엄마랑 돌아가서 치료받기로 약속했잖아.”

“약속을 먼저 어긴 건 엄마야!”

“그건! 하아…….”

고집스러운 딸의 말에 답답함이 치밀어 오른 로라는 자신의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겼다. 그러자 완벽하게 세팅된 머리가 흐트러지며 필러로 팽팽하게 땅긴 얼굴 위로 흘러내렸다.

도돌이표처럼 같은 상황이 계속 되풀이되고 있었다.

점점 제 통제를 벗어나는 딸이 로라는 버겁게 느껴졌다.

“아니면 엄마가 그 여자 좀 치워 줘.”

“뭐?”

캐롤라인이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그 눈빛에 서려 있는 살기에 로라는 두려움이 일었다.

“저번에 내가 했던 것처럼 돈으로 매수하든, 협박하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여자만 치워 줘. 그러면 미국 가서 치료 잘 받을게. 입원하라고 하면 할게. 엄마가 하란 대로 다 할 테니까 제발 그 여자만 없애 줘. 응? 내가 이렇게 빌게.”

“캐리…….”

침대 위에서 무릎을 굽히며 비는 딸의 모습을 보자 로라는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캐롤라인은 고등학교 때부터 우울증을 앓아 왔다. 그 원인은 세 번째 결혼한 남편의 성추행 때문이었다.

1년간 지속된 성추행은 밝았던 성격의 캐롤라인을 집에만 갇혀 있는 우울한 아이로 만들었다.

이유를 알지 못했던 로라는 그런 딸을 이해할 수 없었다.

저만 보면 짜증과 화만 내는 캐롤라인을 보며 저맘때 으레 그렇듯 사춘기라고 생각하며 넘겼다. 때마침 U.T.A 에이전시가 한창 바쁠 때라 신경 쓸 여력 또한 없었다.

결국, 혼자서 감당이 되지 않았던 캐롤라인은 자해를 했고, 그제야 모른 사실을 알게 된 로라는 그 자리에서 까무러쳤다.

로라는 곧바로 세 번째 남편을 경찰에 신고했고, 이혼 신청을 했다.

세 번째 남편이 구속되었지만 캐롤라인은 예전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여전히 우울해했고, 집에만 있으려고 했으며 매사에 비관적이었다.

캐롤라인이 그렇게 된 게 제 탓이라고 생각한 로라는 그때부터 딸을 위한 삶을 살았다.

해 달라는 걸 해 주었고, 사 달라는 걸 사 주었으며, 싫다는 건 일절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라도 딸의 불안을 잠재우고 싶었다.

그러나 그때뿐 그녀는 나아지지 않았다.

그런데 태하를 만난 순간 풋풋하고 활달했던 고등학생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로라는 너무 기뻤다. 잃어버린 제 딸을 찾게 된 것 같아서.

하지만 점점 태하를 향한 집착이 강해지면서 캐롤라인은 선을 넘은 행동을 했다. 태하의 집에 무단침입을 하고, 그의 물건을 함부로 가져갔다.

제일 심각한 건 태하를 자신의 애인으로 말하고 다닌다는 거였다.

그러나 로라에게 캐롤라인의 상황을 전해 들은 태하는 그런 그녀를 안쓰러워했고, 이해하려 애썼다.

무엇보다 제게 받았던 도움을 그렇게라도 갚으려고 했다.

로라는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태하가 뻗은 손길을 거절하지 않았다. 오히려 일이 생길 때마다 그에게 의지했다.

그래선 안 된다는 건 알고 있지만 제 딸을 지키기 위해 로라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었다.

그러다 상황이 이 지경까지 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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