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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아영은 소리를 죽이며 병실 문을 열었다.
태하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자고 있던 건 아니었는지 날아오는 시선이 또렷했다.
“아주머니는 가셨어?”
“어.”
그녀가 병실 안으로 들어가자 그의 시선이 조용히 따라붙었다.
아영은 곤히 잠들어 있는 서준을 살폈다. 잠결에 배 아래로 내려간 이불을 가슴까지 올려 주고는 그 옆에 앉았다.
조용한 병실에 팽팽한 침묵이 감돌았다.
그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먼저 입을 연 건 그녀였다.
“팔 다친 거, 서준이 때문이라며.”
잠시 뜸을 들인 그가 되물었다.
“아주머니가 그래?”
“왜 사실대로 말 안 했어?”
아영은 대답 대신 질문을 던졌다.
“네 말이 틀리지 않아서. 내가 찾아가지 않았다면 서준이가 나를 보고 달려오는 일도 없었을 거고, 또 차에 치이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테니까.”
“그러게 왜 찾아와서는…….”
아영은 그에게 화를 낼 수도, 그렇다고 원망할 수도 없는 이 상황이 무척이나 난감했다.
“난 신경 쓰지 마.”
“어떻게 신경 안 써? 모델이 팔을 다쳤는데.”
“자업자득이지 뭐.”
그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갔다. 아영은 자꾸만 치솟는 화를 애써 누르며 되물었다.
“처치는 잘, 된 거래?”
“다행히.”
아영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경찰은 뭐래?”
“내일 참고인 조사 때문에 너한테 전화 갈 거야.”
아영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뺑소니 차는 찾을 수 있을 것 같아?”
“걱정하지 마. 무슨 수를 써서라도 찾아낼 테니까.”
그렇게 말하는 그의 새카만 눈동자가 살기를 띠자 아영은 움찔 떨었다.
“암튼, 서준이는 특별한 증상 없다고 하니까 내일 바로 퇴원하면 돼.”
“넌?”
“뭐가.”
“넌 언제 퇴원하는데?”
아영이 무표정한 얼굴로 가장하며 되물었다.
“일주일 뒤에.”
서준 때문에 다쳤는데 먼저 퇴원하는 게 미안했다. 그래서 혼자 있을 그가 신경 쓰였다.
“간병인은 구했어?”
“필요 없어.”
아영은 미간을 좁혔다.
“필요 없다니. 혼자 뭘 어떻게 하려고.”
“그럼 네가 간병해 줄래?”
“뭐?”
당황한 그녀의 눈동자가 놀라 커졌다.
“농담이야.”
그가 피식 웃었다.
낯선 사람이 제 공간에 들어오는 걸 싫어한다고 했던 여자의 말이 문득 떠올랐다. 그래서일까.
아무리 그래도 저 팔로 어떻게 혼자 지내겠다는 건지.
붕대에 감긴 그의 팔을 보자 아영은 심란해졌다.
“피곤할 텐데 그만 자.”
그가 제 침대 머리맡에 있던 취침 등을 끄며 말했다. 그러자 병실에는 TV 위 간접 등만 남았다.
아영은 서준의 옆에 있는 간이침대에 몸을 누였다.
간이침대긴 해도 넓어서 불편하진 않았지만, 그가 바로 옆 침상에 있다는 게 신경이 쓰였다.
아영은 눈을 감았다. 그러고는 잠이 오길 기다렸다.
하지만 이미 멀리 달아난 잠은 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감은 눈을 떴다.
창백했던 천장에 나뭇가지 그림자가 어른어른 비쳤다.
고요한 병실에 서준이 내쉬는 숨소리만 둥둥 떠다녔다.
아직 아침이 되려면 한참이나 남았다.
***
서준이 퇴원하고 병실에 혼자 남으니 태하는 쓸쓸함이 밀려오는 듯했다.
고작 하룻밤 같이 있었을 뿐인데도 서준의 얼굴이 뇌에 박힌 듯 떠나지 않았다.
똑. 똑.
“형, 저 용준입니다.”
“들어와.”
문을 열고 매니저 용준이 들어왔다.
“팔은 좀 어떠세요.”
“참을 만해.”
태하는 건조한 얼굴로 대답한 뒤 침상 옆에 있는 서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이거 대한병원 김준수 과장에게 전달 좀 부탁해.”
“이게 뭔데요?”
용준이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되물었다.
“그건 알 필요 없고. 꼭 김준수 과장에게 직접 전달해야 해.”
태하는 용준의 관심을 차단하며, 작은 봉투와 함께 김준수 연락처가 적힌 메모지를 건넸다.
용준이 돌아간 뒤 태하는 깊은숨을 내쉬었다.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해서인지 눈에 모래가 껴 있는 것처럼 거슬거슬했다.
어젯밤. 영이 도착하기 전에 석현의 전화를 받았다.
처음에는 술에 잔뜩 취해 있어서 끊으려고 했다. 하지만 무차별적으로 쏟아 내는 말 중에서 ‘네 아이’라는 말에 태하는 핸드폰을 다시 귀에 가져다 댔다.
“방금 그 얘기 무슨 말이야?”
제대로 된 대답이 나오지 않을 걸 알면서도 되물었다.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저도 모르게 핸드폰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나아쁜 새끼이이. 이제 와서…… 딸꾹. 모른 척…… 딸꾹…… 하겠다는 거냐?]
“정석현, 똑바로 말해. 누가 내 아이라는 거야.”
혀가 꼬이고 중간중간 딸꾹질까지 하는 바람에 무슨 말인지 제대로 알아듣기 어려웠지만, 태하는 온 신경을 집중했다.
[니이가 오늘, 딸꾹. 구우우한 애가…… 딸꾹. 네 아이라고오오……. 알겠어어어?]
“뭐? 설마 이서준을 말하는 거야?”
[그으으래! 딸꾹.]
누군가 뒤통수를 사정없이 갈긴 기분이었다. 잠시 넋이 나간 듯 얼떨떨하던 태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아영이가 그래? 이서준이 내 아들이라고?”
[아아아니.]
아니라고? 태하는 입이 바짝 타들어 갔다.
“그럼 누구한테 들었는데?”
[누구기이인. 수이인이지이ㅇ.]
수인? 수인이라면 아영과 제일 친한 친구였다. 그 애 입에서 나온 말이라면…….
심장이 과부하라도 걸린 것처럼 빠르게 뛰었다.
“정말 수인이가 그랬어? 이서준이 내 아들이라고?”
[…….]
“야! 정석현! 정신 차려 봐!”
하지만 그의 절박한 외침에도 석현은 곯아떨어진 것인지 희미하게 코 고는 소리가 들렸다.
핸드폰을 쥔 태하의 손이 힘없이 툭 떨어졌다.
말도 안 돼. 이서준이 내 아이라니.
그의 입에서 바람 빠진 소리가 새어 나왔다.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이아영과 관계할 때마다 피임을 소홀히 한 적이 없었다.
피임해도 임신이 될 수 있다지만 그럴 가능성은 희박했다. 저만큼이나 그녀도 피임에 신경 쓰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그러니 석현이 술에 취해서 헛소리하는 게 분명했다. 아니면 제가 아닌 다른 남자와 착각했거나.
그러니 제가 신경 쓸 필요 없는 얘기였다.
분명 그래야 하는데 왜 이렇게 두근거림이 멈추지 않는 걸까?
정말 심장에 이상이라도 생긴 걸까?
태하는 비정상적으로 빠르게 뛰는 제 심장을 지그시 눌렀다.
그때 문득 스치듯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그날은 그녀를 향한 제 감정이 사랑이라는 걸 깨달은 날이었다. 반면에 저에 대한 그녀의 감정을 몰라 불안했다.
“지금 네 마음속에 있는 사람 나야, 그 선배야?”
그날 그의 물음에 아영은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마음속에 휘몰아치는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몇 번이고 그녀를 가졌다. 빈 서랍을 보고서도 멈춰지지 않았다.
그날 딱 하루였다. 피임 없이 그녀를 안았던 건.
설마…….
태하의 고개가 천천히 옆으로 돌아갔다.
그의 시선에 쌕쌕거리며 잠든 아이가 보였다. 처음 봤을 때부터 제 뇌리에서 떠나지 않던 아이가.
심장이 저려 왔다.
넋을 놓은 채 잠든 서준을 쳐다보았다. 보고 또 보았다. 정말 저 아이가 제 아이가 맞는지 싶어서.
닮은 점을 찾아보고, 저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비교도 해 보았다.
짙은 눈썹, 유난히 밝은 갈색 동공, 선이 선명한 입술까지. 그렇게 봐서인지 닮은 구석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아니야. 석현이의 말에 휩쓸려서는 안 돼.’
아영의 입으로 직접 듣기 전까지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물어본다 한들 순순히 말해 줄까? 왠지 그럴 것 같지 않았다.
우연히 제가 서준과 같이 있는 모습을 들키기 전까지 서준의 존재를 제게 비밀로 했던 그녀였다. 그러니 그녀의 입에서 진실을 듣기는 어려워 보였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 그녀가 거짓말한 건지 아니면 석현이 착각하는 것인지 직접 확인해 보는 수밖에.
태하는 먼저 간호사에게 손톱깎이를 부탁해 받아 두었다가, 병실에 아무도 없을 때 엄습하는 고통을 참으며 천천히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러고는 잠든 서준의 곁으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손톱을 자르고 머리카락 몇 올을 뽑아 두었다.
***
“대니!”
태하의 입원 소식을 듣고 로라가 병실로 찾아왔다.
붕대에 감긴 팔을 보더니 주름 하나 없이 팽팽하게 땅겨진 얼굴이 일그러졌다.
“괜찮아?”
“네.”
“아니, 어쩌다 다친 거야?”
태하는 간략하게 자신의 부주의로 넘어졌다고 설명했다. 그의 얘길 들은 로라의 얼굴에 근심이 서렸다.
“이 상태로는 다음 달에 있을 구찌 쇼에 못 서겠네?”
“아마도 그럴 것 같습니다.”
로라는 무척이나 아쉬운 얼굴이었다.
그는 세계 3대 패션쇼 중 하나인 밀라노 쇼의 구찌 메인 모델로 예정되어 있었다.
아무나 설 수 없는 자리였기에 날아간 기회가 아까웠다.
더구나 동양계 모델이 메인 모델로 선 적이 없었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어쩔 수 없지. 쇼보다 사람이 우선이니까. 내가 톰에겐 잘 말해 볼게. 일단 치료 잘 받고, 이참에 푹 쉰다고 생각해.”
“네.”
태하는 숨을 몰아쉰 뒤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말인데, 퇴원 후에 재활을 한국에서 할까 합니다.”
“아니. 왜?”
로라가 뜨악한 얼굴로 되물었다.
“어차피 미국 가서 바로 활동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재활하고 들어가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사실은 친자 확인 결과가 나올 때까지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이아영과 담판도 지어야 하고.
“그럼, 캐리를 어쩐다…… 분명히 너 따라서 더 있겠다고 난리 칠 텐데.”
로라가 난감한 얼굴로 새빨간 아랫입술을 이로 질끈 깨물었다.
“캐리는 제가 설득해 보겠습니다.”
“그래 주면 고맙고.”
로라가 돌아간 뒤 태하는 캐롤라인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통화가 되지 않았다. 잠시 뒤에 다시 걸 생각으로 핸드폰을 내려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