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1년 만에 찾은 봉안당은 여전했다.
서준을 진도 아주머니에게 맡기고 이번에도 홀로 봉안당을 찾은 아영은 유리문을 연 뒤 챙겨 간 손수건으로 사기로 된 유골함을 닦았다.
그러고는 서준이 삐뚤빼뚤하게 쓴 편지를 엄마 사진 옆에 놓았다.
나란히 놓인 편지와 사진을 보는데 저도 모르게 왈칵 눈물이 차올랐다.
“엄마, 서준이가 편지를 썼어. 할머니한테 처음 쓰는 편지라면서 잠도 안 자고 몇 번이나 쓰고 지우더라. 그 모습 보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는 거 있지. 핏줄이 진하긴 한가 봐. 한 번도 본 적 없는 할머니인데 사랑한다고 쓴 걸 보면.”
말을 멈춘 아영은 볼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을 조용히 닦았다.
그런 뒤 한참 동안 순옥의 사진을 들여다보던 아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에는 꼭 서준이랑 같이 올게. 잘 있어.”
봉안당을 나와 버스 정류장으로 내려가는데 수인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어디쯤?]
“봉안당에서 지금 막 나왔어.”
[그럼 한 시간 정도 걸리겠네?]
“아마도 그럴 것 같아.”
[그럼, 우리 먼저 만나고 있을 테니까 ‘만석’으로 와.]
‘만석’은 그들의 단골 호프집이었다.
“알았어.”
정류장에 도착한 아영은 전광판에 적힌 시간을 확인했다. 15분 후 도착이라고 쓰여 있는 걸 본 아영은 진도 아주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끊길 때쯤 통화가 연결되었다.
[여보세요?]
“아주머니, 저 서준 엄마예요.”
[아이고. 봉안당에 도착했어?]
방에서 나오는지 문 닫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 보고 가는 길이에요. 서준이는요?”
[나랑 동네 한 바퀴 돌고 왔는데 피곤했는지 지금 막 잠들었어.]
“힘드셨을 텐데. 감사합니다.”
[힘들긴. 서준이 덕에 산책도 하고 좋았는데. 서준이 걱정은 그만하고 오랜만에 친구들 만나는 거니까 신나게 놀고 와. 알았지?]
아영은 딸처럼 저를 챙기는 아주머니의 말에 목이 메 대답을 하지 못했다.
[아이고. 빨래 삶고 있었는데 넘치나 보다. 나중에 통화해.]
아영은 서둘러 끊긴 전화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툭. 까만 액정 위로 투명한 물방울이 떨어졌다.
약속 장소에 도착했을 때 시간은 약속 시각보다 40분이나 지나 있었다.
퇴근 시간과 겹치면서 도로는 차들로 넘쳐났고, 버스 안은 사람들로 넘쳐났다. 제주도에서 여유롭게 살다가 복잡한 서울에 오니 적응이 되지 않았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분명 평일인데 주말처럼 사람이 꽉 차 있었다.
아는 얼굴을 찾아 두리번거리는데 그녀를 먼저 알아본 지수가 손을 번쩍 들었다.
“아영아, 여기야! 여기!”
뒤늦게 지수를 알아본 아영이 작게 손을 들었다.
테이블로 다가가자 지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양손을 뻗었다.
“야, 이게 얼마만이야! 반갑다, 반가워!”
“그러게. 그동안 잘 지냈어?”
지수가 제 손에 깍지까지 끼며 방방 뛰는 통에 아영도 덩달아 어정쩡하게 응하며 말했다.
“당연히 못 지냈지! 넌 어떻게 된 애가 먼저 연락 한 번을 안 하니?”
“미안.”
“안 바쁜 네가 하면 되지. 왜 바쁜 아영이한테 전화하래?”
지수 뒤에서 석현이 불쑥 앞으로 나오며 말했다.
“야, 정석현, 넌 저쪽에서 찌그러져 있어.”
“내가 왜? 이아영, 오랜만이다.”
“반갑다.”
지수에게 되받아치던 석현이 반색하며 악수를 청하자 아영이 마주 잡으며 말했다.
두 사람이 다정하게 악수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지수가 눈을 부릅떴다. 석현은 그것도 모른 채 아영을 보며 헤실거렸다.
“제주도 물이 좋은가 보다.”
아영이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쳐다보자 석현이 싱긋 덧붙였다.
“미모에 물이 올랐…… 큭!”
지수에게 팔꿈치로 가격당한 석현이 말을 하다 말고 옆구리를 움켜잡았다.
“석현아, 괜찮아?”
“걱정하지 마. 저 정도로 안 죽어.”
아영이 놀라 석현에게 다가가려 하자 수인이 그녀의 팔을 잡아당겨 제 옆에 앉혔다.
그때 지수가 석현을 향해 으름장을 놓았다.
“내가 쓸데없는 말 하지 말랬지.”
“내가 언제?”
석현이 억울하다는 듯 항변했지만, 지수가 눈을 세모꼴로 뜨자 바로 꼬리를 내렸다.
전과 달라진 두 사람의 모습에 아영은 어리둥절했다.
“뭐야, 두 사람.”
“뭐긴. 꼴값 커플 탄생이지.”
팔짱 낀 수인이 툭 내뱉은 말에 아영의 두 눈이 놀라 휘둥그레졌다.
“정말이야? 정말 두 사람 사귀어?”
“어,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아영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묻자 지수가 쑥스러운지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말했다.
석현 역시 멋쩍은지 괜스레 제 앞에 놓인 맥주를 벌컥 들이켰다.
“얘네들 술 먹고 사고 쳤어.”
“야!”
“한수인!”
갑작스럽게 탄로난 비밀에 놀란 지수와 석현이 다급하게 수인의 이름을 외쳤다.
“뭐?”
아영이 놀라 벌어진 입을 손으로 가렸다.
그녀가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자 지수는 두 눈을 질끈 감았고, 석현은 민망한 얼굴로 헛기침을 했다.
“난 두 사람이 사귈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난 얘네들 이럴 줄 알았어.”
“알았다고?”
수인의 말에 아영이 놀라 되물었다. 그러자 수인이 안주로 나온 오징어를 질겅질겅 씹으며 말을 이었다.
“겉으로는 불알친구네, 어쩌네 했지만, 서로 애인 생기면 별별 트집을 잡아 안 어울린다며 헤어지라고 노래를 불렀거든.”
“그건 얘가 하나같이 남자 등쳐먹는 불여우들만 만나서 그런 거지!”
“나, 나도 마찬가지야. 어디서 그런 양아치들만 데려오는지…….”
지수가 억울하다는 듯 변명하자 석현도 지지 않고 말했다.
“양아치? 야, 정석현, 너 말 다 했어?”
“너도 내가 만난 여자들 불여우라며?”
“너 지금 내 앞에서 전 여친 편드는 거야. 지금?”
“아니. 그게 아니라…….”
“야, 둘 다 그만해! 오랜만에 아영이 왔는데 계속 싸우기만 할 거야?”
두 사람의 분위기가 점점 험악해지자 수인이 중재에 나섰다.
그제야 아영을 떠올린 두 사람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암튼, 두 사람 사귀는 거 진심으로 축하해.”
“고마워.”
아영은 지수가 평소답지 않게 귀 끝을 붉히며 쑥스러워하는 걸 보자 지금껏 제가 알던 지수와 같은 사람인지 의심스러웠다.
그뿐만 아니라 언제나 지수를 말 안 듣는 동생처럼 대하던 석현이 지수에게 꽉 잡힐 줄도 몰랐다.
아영은 180도로 달라진 두 사람을 보며 사랑의 힘이 대단하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그 뒤 세 사람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이야기를 쏟아 냈다.
아영은 세 사람의 얘기를 들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가, 놀라 눈이 커졌다가, 말도 안 된다며 눈살을 찌푸렸다가, 눈까지 접으며 웃었다.
그러자 가슴 위에 묵직하게 얹혀 있던 돌이 내려간 듯 조금은 가벼워졌다.
“아, 그러고 보니 제주도에서 태하 만났다며?”
“어? 어.”
느닷없는 태하의 이름에 당황한 아영이 얼굴이 어색하게 굳어졌다.
“촬영장 근처에서 너 만났는데 경황이 없어서 연락처도 못 물어보고 헤어졌다길래 내가 알려 줬는데. 괜찮지?”
“허락도 없이 제멋대로 알려 줘 놓고, 이제 와서 괜찮냐고 묻는 경우는 뭐냐?”
“친구 사인데 뭐 어때?”
수인의 지적에 석현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
태하 이름이 나오자 마음이 불편해진 아영은 화장실 핑계로 자리를 피했다.
아영이 자리를 뜨자 수인이 입을 열었다.
“야, 친구 사이라도 불편한 사람이 있는 거야.”
“태하랑 아영이, 사이 괜찮은 거 아니었어?”
5년 전 두 사람의 관계를 알 리 없는 석현이 의아한 얼굴로 되물었다.
“안 좋아.”
“왜? 장례식 때까지만 해도 괜찮았는데?”
“암튼 그럴 일이 있었어.”
석현이 뜨악한 얼굴로 물었다. 하지만 자세하게 말해 줄 수 없었기에 수인은 대충 둘러댔다.
“헐. 그럼, 태하한테 알려 주면 안 되는 거였어? 난 그것도 모르고 아영이 집 주소도 알려 줬는데.”
“뭐? 주소까지 알려 줬어? 너 설마 며칠 전에 나한테 아영이 주소 물어본 거 태하 때문이었어?”
“……어.”
“맙소사.”
눈치를 보는 석현의 대꾸에 수인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손바닥으로 제 이마를 쳤다.
“대체 두 사람 무슨 일이 있었는데 그래?”
“너희는 몰라도 돼.”
“야, 너만 친구냐? 우리도 아영이 친구야. 왜 너만 아는데?”
“그게 아니라…….”
그때까지 입을 다물고 있던 지수가 서운하다는 듯 따지고 들자 수인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RRRRR. RRRRR. RRRRR.
“저, 전화 왔다.”
때마침 테이블 위에 있던 핸드폰이 울리자 수인이 냉큼 집어 들었다. 그러다 자신의 전화가 아닌 아영의 전화라는 걸 알고 다시 내려놓으려던 수인은 지수가 또 캐물을까 봐 이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이아영 씨 핸드폰입니다.”
[…….]
“말씀하세요.”
상대방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전화가 끊어진 줄 알고 액정을 확인한 수인은 끊어진 게 아니라는 걸 알고 다시 말했다.
그런데도 말이 없자 잘못 걸린 전화인 줄 알고 끊으려던 찰나 목소리가 들렸다.
[이아영 씨, 어디 갔습니까?]
“네. 잠깐 화…….”
그러다 문득 전화 건 사람의 목소리가 어딘가 익숙하다는 걸 깨달은 수인은 눈을 가늘게 떴다.
“권태하?”
[누구시죠?]
갑자기 태하 이름이 나오자 반대편에 앉아 있던 석현과 지수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수가 저도 통화하고 싶다며 수선을 피우자 석현은 재빨리 입을 틀어막았다.
다시 조용해진 후 수인은 대화를 이어 나갔다.
“나 수인이야.”
[오랜만이다. 그런데 아영이랑 급하게 통화 가능할까?]
“아영이 잠깐 화장실 갔는데, 무슨 일이야?”
그의 목소리에서 다급함을 읽은 수인이 되물었다.
[…….]
“무슨 일인데 그래?”
태하가 머뭇거리자 걱정이 된 수인이 다그쳤다.
[서준이가 다쳤어.]
“뭐? 서준이가! 어디를, 얼마나 다쳤는데?”
깜짝 놀란 수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발을 동동 굴렀다.
[집 근처에서 놀다가 넘어졌는데…… 넘어지면서 머리를 좀 다쳤어. 혹시 몰라서 MRI 찍고 검사 기다리는 중이야.]
“헉! 아니, 어떻게 넘어졌는데 MRI를 찍어? 많이 다친 거야?”
[외상은 없는데 찍어 보는 게 나을 것 같아서.]
“그럼 지금 병원에 누가 있는 거야?”
[진도 아주머니께서 와 계셔.]
초조하게 왔다 갔다 하는 사이 화장실에 갔던 아영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