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9화 (5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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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리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미국에 돌아가면 다시 병원에 입원시켜야지.”

조심스럽게 묻는 태하의 질문에 로라는 자줏빛 립스틱이 묻은 담배 필터를 다시 한번 빨아들인 뒤 답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안 괜찮으면 어쩌겠어. 받아들여야지.”

로라가 회색빛 재를 털며 체념 섞인 어조로 말했다.

“도움이 못 돼 드려서 죄송합니다.”

“캐리 때문에 변변한 연애 한 번 제대로 못 한 거 알아. 그동안 많이 참아 준 것도 알고.”

“연애는 캐리 때문이 아니라, 관심 없어서 안 한 겁니다.”

“왜, 5년 전 그 여자 때문에?”

그의 표정이 무겁게 가라앉자 로라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 여자 만났다며.”

그가 움찔 놀라자 로라가 가만히 덧붙였다.

“캐리한테 들었어.”

그럴 거라 예상한 태하는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 여자와 다시 시작할 생각이야?”

“아니요.”

“그럼, 한국에 더 머물 이유 없잖아.”

“아직 다 정리가 되지 않았습니다.”

“정리할 마음이 없는 게 아니고?”

로라의 날카로운 지적에 태하는 말문이 턱 막혔다.

당혹스러움으로 물든 태하를 보며 로라가 툭 던지듯 말했다.

“……그 여자 잘못이 아니라면 어떨 것 같아?”

“그게, 무슨 소립니까.”

고요하던 그의 눈빛이 순간 날카롭게 번뜩이자 로라는 아차 했는지 재빨리 시선을 피했다.

“아, 아니야. 그냥 한 소리야. 신경 쓰지 마.”

아직 절반이나 남은 담배를 바닥에 던진 로라는 큐빅이 촘촘히 박힌 구두로 짓이기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혹시 뭐 알고 계시는 게 있습니까?”

“그럴 리가. 네가 사귄 여자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는데. 그만 가 봐야겠다. 오늘부터는 캐리 옆에 내가 있을 거니까 신경 안 써도 돼.”

태하가 시선을 좁히며 묻자 로라는 노련한 얼굴로 당황을 감추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일 다시 오겠습니다.”

“아니야. 그럴 필요 없어. 도움 필요하면 연락할게.”

태하는 빠르게 사라지는 로라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곳에 서 있었다.

“으아아앙!”

그때 뒤에서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리자 놀란 태하는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근처 나무 밑에 대여섯 살 정도 된 남자아이가 넘어져 울고 있었다.

이내 아이 엄마인 듯한 여자가 헐레벌떡 뛰어와 혼을 내면서 아이를 일으켜 세웠다.

아이는 아픈 것보다 엄마에게 혼나는 게 속상한지 더 크게 울었다. 그러자 아이 엄마는 그런 아이를 달래고는 등에 업었다.

아이는 언제 울었냐는 듯 엄마 품에 꼭 매달렸다.

가만히 서서 멀어지는 두 사람을 보는데 그의 뇌리에 누군가가 떠올렸다.

태하의 시선 끝에 작은 아이가 들어왔다.

노랑 가방을 멘 아이는 할머니의 손을 잡고 작은 입을 오물거리며 쉴 새 없이 종알거렸다.

무슨 말을 하는 걸까? 어린이집에서 뭘 배웠는지 얘길 하는 걸까? 아니면 친구와 놀았던 얘길 하는 걸까?

아이는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얘기 중간중간에 까르르 웃었다. 그 웃음소리가 제 귓속을 파고들 때마다 태하는 가슴께가 간지러웠다.

왜 자신이 여길 온 건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사실은 잘 알았다.

아까 병원에서 넘어진 아이를 보자마자 태하는 제 눈앞에 있는 아이가 떠올랐다. 그래서 무작정 차를 몰아 이곳에 왔다.

그때 아이와 시선이 마주쳤다.

“아저씨다!”

태하는 아이가 저를 못 알아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저를 쳐다보던 아이의 눈이 커지더니 이내 할머니 손을 뿌리치고 뛰기 시작했다.

“아저씨─.”

태하는 저를 향해 달려오는 아이의 모습에 내심 당황했지만 이내 무릎을 굽혔다. 그러고는 제 품에 들어온 아이를 꼭 안아 주었다.

작은 새가 제 품에 날아든 것처럼 신기하면서도 이상하게 가슴이 떨렸다.

갑자기 아이가 뛰어가자 당황해 뒤쫓아 가려던 진도 아주머니는 그의 얼굴을 발견하고 이내 걸음을 늦췄다.

“안녕. 이서준.”

“안녕하세요.”

태하가 품에서 살짝 떼어 낸 뒤 먼저 인사를 하자 서준이 커다란 눈망울을 반짝이며 고개 숙여 인사했다. 어린데도 인사하는 모습이 의젓했다.

“어떻게 날 한눈에 알아봤어?”

“키가 커서요. 우리 동네엔 아저씨처럼 키가 큰 사람 없거든요.”

태하는 처음 봤을 때 제게 거인이라고 했던 게 떠올라 옅게 웃었다.

“눈썰미가 대단한데?”

“눈썰미가 무슨 뜻이에요?”

“똑똑하다는 뜻이야.”

처음 듣는 단어인지 서준이 아리송한 얼굴로 묻자 태하는 친절하게 알려 주었다. 그러자 아이는 뜻이 마음에 드는지 씩 웃었다.

“안녕하세요.”

어느덧 그들 곁으로 다가온 아주머니를 발견하고 자리에 일어선 태하는 정중하게 인사했다.

“여긴 어쩐 일이세요?”

“지나가는 길에 우연히…….”

그러다 뭔가는 아는 듯한 아주머니의 고요한 눈빛에 태하는 저도 모르게 입이 다물어졌다.

“그만 가 보세요. 서준이 엄마 알면 싫어할 테니. 서준아, 가자.”

그에게 차게 일갈한 아주머니는 서준의 손을 잡아당겼다. 하지만 아이는 그와 헤어지기 싫은지 다른 손으로 그의 손을 붙잡았다.

“서준아.”

당황한 아주머니가 서준을 불렀다.

당황하긴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작은 고사리 같은 손이 제 손을 잡는 순간 태하는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휘몰아쳤다.

“미안해요. 서준이가 아빠 품이 그리워서 그런가 봐요.”

“아저씨!”

그러더니 태하의 품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서준을 품에 안아 올렸다.

강제로 손이 떨어지자 서준이 다시 잡기 위해 손을 뻗었다. 태하는 저도 모르게 그 손을 잡을 뻔했다.

“서준아, 아저씨 바쁜 사람이야. 귀찮게 하면 안 돼.”

단호한 아주머니 말에 서준은 곧 울 것 같은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다음에 또 올게.”

달래려 건넨 말에 서준이 눈을 반짝였다.

“정말요?”

태하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서준은 잡고 있던 손을 놓고는 새끼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약속해요.”

옅게 미소 짓던 그가 작은 고사리 같은 손가락에 제 손가락을 걸자 서준이 그제야 안도하며 해맑게 웃었다.

“먼저 갈게요.”

서준을 품에 안은 아주머니는 빠른 걸음으로 멀어졌다.

두 사람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곳에 서 있던 태하는 이내 고개를 떨구었다.

그러고는 아직 아이의 온기가 남아 있는 듯한 제 손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심장이 뻐근했다.

제 피가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아이에게 이런 감정이 드는 게 이상했지만, 아영의 아이라고 생각하니 자꾸만 눈에 밟혔다.

하도 많이 생각해서인지 눈을 감아도 아이의 생김새가 눈에 그려질 정도였다.

그녀를 닮은 둥근 이마가 예뻤고, 웃을 때 휘어지는 눈가가 사랑스러웠으며, 새처럼 조잘조잘하는 입술은 참을 수 없을 만큼 귀여웠다.

누구를 닮은 것인지 팔다리는 길었고, 운동신경이 좋아 자전거를 타거나, 달리기할 때 친구들에 지는 법이 없었다.

지는 걸 싫어하던 제 모습과 겹쳐 보일 때면 태하는 엉뚱한 생각이 불쑥 들곤 했다.

만약 아영과 제 사이에 아이가 태어난다면 서준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터무니없는 생각이.

***

캐롤라인은 병원에만 갇혀 있으니 답답해 죽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제가 없는 사이 대니와 여자가 만나는 건 아닐까 불안해 잠이 오지 않았다.

더구나 눈만 감으면 그날 자신이 있던 옆 칸에서 두 사람이 나누던 키스 소리가 환청처럼 맴돌았다.

병원에서 처방해 준 수면제도 듣지 않자 그녀의 신경은 점점 칼날처럼 예민해져 갔다.

초조함과 불안을 견디지 못한 캐롤라인은 병적으로 태하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그가 받지 않는 횟수가 점점 늘어 가자 문자 폭탄 수십 개를 보냈다.

하지만 이것 그가 역시 읽지 않자 그녀의 불안증은 극에 달했다.

병실을 미친 듯이 왔다 갔다 하던 캐롤라인은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빠르게 인터넷을 뒤지기 시작했다.

한참을 검색하던 그녀는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두 번 울리자 곧이어 굵직한 남자 목소리가 받았다.

[네. ‘더 파인드’입니다.]

캐롤라인은 목소리를 가다듬은 뒤 말했다.

“혹시 뒷조사 가능한가요?”

[물론입니다. 고객님.]

시원시원한 흥신소 직원의 말에 그녀의 입가에 그제야 미소가 걸렸다.

곧이어 캐롤라인은 흥신소 직원에게 태하의 신상 정보를 넘겼다.

입금이 확인되자 바로 다음 날부터 태하의 일거수일투족에 관한 사진이 그녀의 핸드폰으로 전송되었다.

첫날 보내 준 사진은 호텔에서 나오는 모습, 카페에서 차 마시는 모습, 매니저와 어딘가로 걸어가는 모습 등 별다를 게 없었다.

하지만 이튿날부터 태하는 매일 같은 장소로 이동했다.

그의 일정을 꿰뚫고 있는 그녀가 보기에 일정과 전혀 상관없는 곳이었다.

흥신소 직원이 말하길 그곳에서 태하는 적게는 한 시간, 많게는 다섯 시간을 넘게 있다 온다고 했다.

보내 준 수십 장의 사진을 확인하던 캐롤라인은 문득 손을 멈췄다.

사진에는 그가 모르는 아이와 함께 웃고 있는 사진이 찍혀 있었다.

그녀는 아이를 보며 환하게 웃고 있는 태하의 모습이 낯설었다.

분명 저에게 아이는 싫다고 했다.

그런데 어떻게 저에게 한 번도 보여 준 적 없는 미소를 짓고 있는 걸까? 대체 이 아이가 누구길래.

사진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그녀는 누군가 뒤통수를 강하게 내리친 것처럼 충격을 받았다.

“말도 안 돼.”

캐롤라인이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진을 처음 봤을 때 웃는 모습이 묘하게 닮은 두 사람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 아이에게서 태하와 닮은 점을 발견한 순간 캐리는 깨달았다. 그 아이가 태하의 아이라는 걸.

온몸에 소름이 쫙 끼쳤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그 여자의 아이가 자신의 아이라는 걸 대니가 눈치라도 챈 걸까?

만약 그랬다면 여자와 마주쳤을 때 분명 무슨 얘기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자는 아이에 대해서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숨기는 기색 또한 없었다.

상황이 예상 밖으로 흘러가자 사진을 들고 있던 캐롤라인의 손이 덜덜 떨렸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저 둘을 떼어 내야 해.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흥신소 번호를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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