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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어디서? 아니, 지금 상태는 어떤데?]
“호텔에 혼자 있다가 그런 모양입니다. 다행히 동맥은 피한 상태이고, 지금은 안정을 취하고 있습니다.”
정신없는 로라의 질문에도 태하는 차분하게 응수했다.
[흐으으윽흑.]
딸이 안정을 취하고 있다는 말에 안도가 되었는지 그제야 로라는 울음을 터트렸다.
한참을 울던 로라는 잔뜩 쉰 목소리로 당장 한국으로 가겠다고 말한 뒤 전화를 끊었다.
태하는 가슴이 답답해 담배를 꺼내 물었다.
길게 내뿜은 매캐한 연기가 밤하늘에 흩어졌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가슴은 보이지 않는 막에 둘러싸인 것처럼 숨이 막혔다.
병실에 돌아왔을 때 캐롤라인은 막 잠에서 깼는지 멍한 눈으로 병실 안을 둘러보고 있었다.
“깼어?”
“어떻게 된 거야. 내가 왜 여기 있어?”
아직 상황 파악이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자해를, 했어.”
덤덤한 그의 말에 시선을 내려트린 캐리는 붕대에 감겨 있는 제 왼쪽 손목을 멍한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또 졸피뎀을 먹은 거야?”
“…….”
오랫동안 우울증을 앓아온 그녀는 불면증도 함께 앓고 있었다. 그래서 수면제인 졸피뎀 없이는 잠이 들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문제는 불면증이 심해지면서 의사의 권고를 무시하고 졸피뎀을 과다 복용한다는 거였다.
그로 인해 몽유병 상태로 자해를 하거나 허리띠로 제 목을 매려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자신의 심각성을 깨달은 캐롤라인은 자발적으로 정신 병원에 입원했고, 상태는 꽤 호전되었다.
하지만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처럼 그와 로라는 될 수 있으면 그녀를 자극하는 일이 없도록 노력했다.
“내 전화 왜 안 받았어?”
“진동이라 안 들렸어.”
“설마, 여자랑 있었던 건 아니지?”
캐롤라인이 의심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자 그는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혼자 있었어.”
“어떻게 내가 40번을 넘게 전화했는데 모를 수가 있어?”
“말했잖아. 진동이라 몰랐다고.”
그는 반복되는 이 상황이 피곤했다.
“내 전화 받기 싫어서 일부러 진동으로 해 놓은 건 아니지?”
그가 자신의 전화를 피하고 있다는 걸 눈치챈 듯 캐롤라인이 눈을 가늘게 뜨고 되물었다.
어차피 자신의 말은 들을 생각이 전혀 없는 그녀였기에 태하는 대답 대신 말을 돌렸다.
“사장님 오고 계셔.”
“뭐? 설마, 엄마한테 전화했어?”
로라가 온다는 소식에 잠잠하던 캐롤라인의 목소리가 단숨에 격앙되었다.
“널 병원에 혼자 둘 수는 없잖아.”
“네가 있어 주면 되잖아!”
“나보다는 로라가 낫잖아.”
“핑계 대지 마! 나 엄마한테 맡겨 두고 그년이랑 무슨 짓 하려고?”
모든 상황의 초점을 아영에게 맞추는 걸 보면 생각보다 캐롤라인의 상태는 심각해 보였다.
“그런 거 아니야.”
“아니면 네가 병간호해 줘.”
그녀의 억지에 태하는 두 눈을 감았다가 떴다.
“대표님 오시면 얘기해 볼게.”
“진짜지? 정말이지?”
“그래.”
지금 상대해 봤자 더 큰 충돌만 일으킬 뿐이었다. 지금은 그녀의 안정이 우선이었다.
***
다음 날, 태하는 옷을 갈아입기 위해 게스트하우스에 들렀다.
병원 냄새가 짙게 밴 옷을 벗고 편안한 니트 카디건에 청바지를 입고 나오는데 1층 카페 창으로 아영과 현성이 웃으며 얘기하는 모습이 보였다. 배알이 뒤틀렸다.
커피 생각도 없는데 발걸음이 저절로 카페로 향했다.
그가 들어서자 그녀의 맑은 얼굴에 번졌던 미소가 서서히 걷혔다. 그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가 이내 사라졌다.
“어디 다녀오는 길이세요?”
“아니요. 들어왔다가 다시 나가는 길입니다.”
그때 태하를 본 현성이 반갑게 말을 걸었다. 기분이 좋아 보였다.
괜히 심술 맞게 굴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태하가 답했다.
“촬영 끝나셔서 여유로우실 줄 알았는데 여전히 바쁘시군요.”
“그러게요.”
“같이 식사할 날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는데.”
현성이 아쉽다는 듯 말했다.
그제야 촬영 끝나면 같이 식사하자는 말을 했던 게 떠올랐지만 태하는 현성과 식사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런데 지금 상황이 불편한지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고 있는 아영이 보였다.
그녀가 저와 현성의 대화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는 걸 눈치챈 태하는 이내 마음을 바꿨다.
“다음 주 수요일쯤 괜찮을 것 같은데 어떠세요?”
“전 언제라도 좋습니다!”
“넌 어때?”
현성이 흔쾌히 동의하자 태하는 아영에게 물었다.
둘의 대화가 빨리 끝나길 기다리고 있었는지 갑작스러운 그의 질문에 아영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다음 주 수요일 괜찮냐고.”
“아니, 안…….”
“시간은 제가 빼 볼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아영이 생각도 하지 않고 거절하려는 찰나 현성이 대답을 가로챘다.
당황한 아영이 현성에게 곤란한 눈짓을 주었지만, 현성은 부러 모른 척했다.
“저, 주문 안 하세요?”
“죄송합니다.”
“아, 아니에요. 천천히 하세요.”
그때 뒤에서 기다리던 손님이 주문을 재촉하자 고개를 돌린 태하는 정중하게 사과했다. 그러자 그와 눈이 마주친 여자 손님의 두 눈이 놀라 커지더니 이내 새빨개졌다.
태하는 양해해 줘서 고맙다고 인사한 뒤 다시 아영에게 몸을 돌렸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 주세요.”
“자리에 앉아 계시면 진동벨로 알려드리겠습니다.”
그가 카드를 내밀자 아영이 굳은 얼굴로 결제를 한 뒤 진동벨과 함께 돌려주며 말했다.
카페 사장과 있을 때는 잘만 웃더니 저에겐 업무용 미소조차 짓지 않는 그녀의 모습에 태하는 입 안이 썼다.
***
로라가 한국에 도착한 건 다음 날 저녁쯤이었다.
병원에 도착한 로라의 눈은 빨갛게 부어 있었다. 아마 오는 내내 비행기 안에서 운 모양이었다.
“캐리─.”
“흐흑. 엄마…….”
문을 열자마자 창백한 캐롤라인의 얼굴을 발견한 로라는 들고 있던 가방을 팽개치며 달려가 껴안았다.
왜 전화했냐며 소리칠 때는 언제고 엄마의 얼굴을 보자 안도가 된 건지 캐롤라인도 울먹이며 로라를 안았다.
태하는 바닥에 떨어진 로라의 가방을 들어 소파에 올려 두고 조용히 병실을 나왔다.
“상처는 괜찮아?”
“저번보다는 참을 만해.”
“그, 그래. 다행이다.”
캐롤라인이 젖은 눈으로 아무렇지 않게 2년 전 자해했던 일을 빗대어 말하자 로라의 얼굴이 미세하게 굳어졌다.
재빨리 표정을 갈무리한 로라가 물었다.
“의사는 뭐래?”
“여기 의사 미쳤나 봐? 나보고 한 달이나 있다가 퇴원하래. 엄마가 의사 좀 만나 봐. 나랑 말이 안 통해. 귀가 꽉 막혔어.”
캐롤라인은 자신의 귀를 막는 제스처를 취하며 말했다.
“엄마가 이따 만나서 일주일 뒤에 퇴원하는 거로 말해 볼게. 대신 치료는 미국에서 받는 거로 하고.”
“응. 알았어.”
하루라도 빨리 미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그녀는 잘됐다는 듯 말했다.
“그럼 대니도 우리랑 같이 가는 거지?”
“음, 대니는…… 당분간 한국에 더 머물겠대.”
로라가 딸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싫어! 대니 안 가면 나도 안 가!”
“캐리…….”
“내가 말했잖아! 대니 지금 그년한테 눈 돌아가서 그래. 그년한테서 당장 떨어트려야 한다고!”
캐롤라인이 격분해 소리쳤다.
“캐리, 그렇게 불안해하지 않아도 돼.”
“어떻게 안 불안해!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둘이 또 만났는데!”
로라는 어떻게든 딸을 달래 보려 했지만 그럴수록 그녀는 더더욱 흥분했다.
“그건 우연일 뿐이야. 대니도 그랬다면서? 그 여자 있는 거 여기 와서 알았다고.”
“그 말을 어떻게 믿어! 나 속이려고 거짓말한 것일 수도 있잖아! 그 여자가 키우고 있는 아이가 대니 아인 거 알아차리기 전에 무슨 짓을 해서라도 떼어 내야 해.”
캐롤라인이 손톱을 물어뜯으며 말했다.
얼마나 물어뜯었는지 미국에서 붙인 인조 손톱은 어딘가로 사라지고, 쥐에게 뜯긴 것처럼 삐죽삐죽한 손톱만이 남아 있었다.
로라는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손을 떼어 내고 싶었지만 그러면 그녀가 얼마나 난리 칠지 알기에 못 본 척 눈을 돌렸다.
“알았어. 엄마가 어떻게든 대니 설득해 볼게.”
“정말?”
로라의 말에 캐롤라인은 언제 화냈냐는 듯 해맑은 얼굴로 눈을 반짝이며, 조울증적인 모습을 드러냈다.
“대신 약 빼먹지 않고 먹는 거다.”
“알았어. 엄마가 시키는 건 뭐든지 할게.”
“그래.”
로라는 제 손을 붙들고 간절하게 말하는 딸을 보자 가슴이 미어졌다.
병실을 나온 로라는 로비에서 통화 중인 태하에게 다가갔다.
발소리를 듣고 돌아선 그는 로라의 얼굴을 보고 서둘러 통화를 끝냈다.
“잠깐 얘기 좀 할까?”
병원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은 잔디밭이 있는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너도 피울래?”
“괜찮습니다.”
가방에서 담배를 꺼낸 로라는 한 모금 깊게 빨아들인 후 길게 내뿜었다.
희뿌연 한 연기가 하늘에 흩어지는 걸 보며 로라가 입을 열었다.
“대니.”
“네. 말씀하세요.”
“미안하지만 캐리 퇴원하면 미국으로 같이 들어갔다가 다시 나오면 안 될까?”
이미 병실 밖에서 상황을 전부 들은 태하는 로라가 어떤 말을 할지 짐작하고 있었기에 순순히 대답했다.
“그럴게요.”
“고마워. 매일 너한테 신세만 지네.”
“대표님이 제게 해 주신 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로라가 힘없는 얼굴로 웃었다.
그가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칠 수 있게 된 건 모두 로라 덕분이었다.
우연히 그가 선 패션쇼에서 그를 본 로라는 첫눈에 반했다. 남자로서 반한 게 아니라 모델로서 반한 것이다.
그 당시 로라는 모델계에서 알아주는 사람이었다.
사람을 발굴하는 능력이 탁월해 그녀가 선택한 사람은 모두 톱모델이 된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그 입지가 어마어마했다.
그랬기에 모델들은 어떻게든 그녀 눈에 띄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처음 미국에서 활동할 당시 태하 역시 많은 주목을 받지 못했다.
부푼 꿈을 안고 갔던 미국 생활이 생각처럼 풀리지 않자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까, 몇 번을 망설였다.
하지만 자존심상 이대로 돌아가는 건 용납이 되지 않았던 태하는 딱 1년만 죽을 만큼 노력해 보자는 생각으로 제 발로 직접 뛰어 모델 오디션을 보러 다녔다.
운 좋게 서른세 번째 오디션에 통과했고, 그 무대가 바로 로라가 참석한 쇼였다.
로라를 등에 업은 태하는 단박에 톱스타 반열에 올랐고, 세계적인 모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