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7화 (57/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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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리와는 아무 사이도 아니야.”

태하가 순순히 인정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랬다면 처음부터 숨기지도 않았겠지.

“아무 사이도 아닌데 제주도까지 찾아왔다고?”

“그건 캐리가 제멋대로…….”

RRRRR. RRRRR. RRRRR.

말하던 도중 그의 주머니에 있던 핸드폰이 울렸다.

그는 무시하고 말을 더 이으려 했지만 계속해서 울리는 벨소리와 본인의 목소리가 자꾸 겹치자 짜증 섞인 얼굴로 핸드폰을 꺼냈다.

발신자를 확인한 그가 미간을 사정없이 구겼다.

“난 갈 테니까 신경 쓰지 말고 전화나 받아.”

“이아영, 거기 서!”

아영이 돌아서자 그가 소리쳤다. 하지만 아영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그의 전화벨은 끊임없이 울렸다.

“나야.”

혹시나 저를 붙잡으면 어떡하지 걱정하던 아영은 그의 통화 소리에 제 생각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이었는지 깨달았다.

***

아영이 집에 돌아오니 서준은 잠들어 있었다. 배부르고 등이 따뜻하니 금세 잠에 빠져든 모양이었다.

“아까는 감사했습니다.”

“감사는 무슨.”

서준의 가슴을 토닥이던 진도 아주머니가 손을 내린 뒤 제 옆에 앉은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 남자 맞지?”

아영이 가만히 응시하자 진도 아주머니가 덧붙였다.

“서준이 아빠.”

당황한 아영은 다급히 숨을 삼켰다.

그녀의 반응을 보고 확신한 진도 아주머니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한눈에 알겠더라고. 웃는 눈매랑 오뚝한 코가 그 남자를 쏙 빼닮았더구먼.”

저만 알아챈 게 아니었구나.

아영도 오늘 처음 알았다. 태하가 웃는 모습이 서준이와 똑같다는 걸. 유전자의 힘이 얼마나 무서운지 새삼 깨달았다.

“눈치를 보니 아이 아빠는 모르는 것 같더구먼.”

“네.”

아영이 시선을 내려트리며 답했다.

“무슨 사정인지는 모르지만, 서준이를 위해서라도 아빠가 누구인지는 밝혀야 하지 않겠어?”

“그 남자는, 아이를 원치 않았어요.”

“그래? 아까 모습은 전혀 그렇지 않던데?”

진도 아주머니는 말이 안 된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실 아영도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다. 아이를 싫어한다던 그는 생각 외로 서준에게 많은 관심을 보였다.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무릎을 굽히는 것도 그렇고, 아이의 질문에 성심성의껏 대답해 주는 것도 그렇고.

적어도 그녀 눈에는 가식처럼 보이지 않았다.

“내가 나설 일은 아니지만, 서준이 아끼는 마음으로 한마디만 할게.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든, 서준이가 아빠를 알 기회를 빼앗지 않았으면 해.”

아영은 묵묵히 잠든 서준의 작은 손을 어루만졌다.

“그리고 그 사람, 서준이 보는 눈빛이 맑은 거 보니 나쁜 놈은 아니더구먼. 그러니 그 남자가 뭔 잘못했는지 모르지만 용서해 줘. 일부러 그런 건 절대 아닌 것 같으니까.”

“그 남자한테…… 여자가 있어요.”

진도 아주머니의 얼굴에 실망이 드리웠다.

“그래서 말 못 한 거야?”

“네.”

“그래. 그 얼굴에 여자가 없는 것도 이상하지.”

현실을 인정하는 담담한 어조였다.

“그래서 어쩔 셈이야? 끝까지 숨기려고?”

“가능하다면요.”

진도 아주머니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진도 아주머니가 돌아간 뒤, 아영은 멍한 얼굴로 잠든 서준을 바라보았다.

마음이 심란했다.

막연히 상상했던 상황이 현실이 되자 생각보다 더 당황스러웠다.

그리고 생각보다 닮은 두 사람의 모습에 혹여나 그가 눈치라도 챌까 봐 등 뒤로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RRRRR. RRRRR. RRRRR.

갑자기 전화벨이 울리자 아영은 서준이 깰까 봐 서둘러 벨 소리를 낮춘 뒤 액정을 확인했다. 친구 수인이었다.

아영은 거실로 나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집이야?]

“응. 넌 퇴근했어?”

[퇴근은 무슨. 오늘도 전철 끊기기 전에 퇴근하면 다행이다. 이놈의 회사는 어떻게 된 게 퇴근만 하려면 일이 더 늘어나는지 알 수가 없다.]

“힘들어서 어떡하니.”

[어쩌긴. 내가 선택한 회산데. 아니꼬우면 나가야 하는데, 날 받아 줄 회사가 없으니 입 다물고 다니는 수밖에.]

“잘했어.”

수인이 투덜거리긴 해도 지금 하는 일을 좋아하는 걸 안다. 그래서 아영은 적당히 응해 주었다.

[야, 그런데 너 서울 언제 올 거야?]

“이번 주 목요일이 엄마 기일이라 잠시 다녀오려고.”

[아, 맞다. 어머니 기일 이맘때였지. 정신없어서 깜빡했다.]

“신경 쓰지 마. 조용히 갔다 올 거야.”

[그러지 말고, 그때 서울 온 김에 한번 뭉치자. 석현이하고 지수가 네 얼굴 잊어먹겠다고 난리야. 이번에 너 안 오면 자기들이 제주도로 내려가겠다고 어찌나 성화던지. 말리느라 혼났어.]

아영은 희미하게 웃었다. 제주도로 내려온 뒤 딱 두 번 본 게 다였으니 그런 말이 나올 법도 했다.

서준을 두고 갈 수도, 그렇다고 데리고 갈 수도 없어 만나지 못했다. 그나마 두 번도 진도 아주머니가 등 떠밀어 주신 덕분에 가능했다.

“보고 싶긴 하다.”

[그럼 그날로 날 잡을까?]

“미안하지만 안 돼. 서준이랑 같이 갈 거라.”

석현이와 지수는 아직 서준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다.

[이번에는 같이 오게?]

“응. 매번 혼자 가서 엄마한테 미안했거든.”

혹여나 서준의 존재가 탄로 날까 봐 아영은 기일 때마다 혼자 움직였다.

[그러지 말고 내년부터 그렇게 하고. 이번에는 너 혼자 와라.]

“안 돼. 서준이한테 같이 간다고 약속했단 말이야.”

[너 작년에도 말도 없이 왔다가 그냥 갔다고 석현이와 지수가 나한테 얼마나 지랄하는지. 이번에도 그냥 가면 둘 다 진짜 가만히 안 있을걸. 그러다 말도 없이 너 찾아갔다가 서준이라도 마주치면…….]

“쓸데없이 겁주지 마.”

[그러니까 오랜만에 뭉치자. 우리 얼굴 못 본 지 1년도 넘었어. 알아?]

야근을 밥 먹듯이 하는 수인은 회사 일 때문에 제주도에 내려올 시간이 없었고, 그녀는 카페 일과 서준 때문에 서울 갈 여력이 안 됐다. 그러다 보니 시간만 훌쩍 지나 버렸다.

사실 그녀도 친구들이 보고 싶었다.

살가운 성격이 아니다 보니 제주도에 5년을 넘게 살아도 친구 하나도 만들지 못했다.

“알았어. 그날 서준이 봐줄 수 있는지 진도 아주머니께 여쭤볼게.”

[아주머니는 흔쾌히 허락하실걸? 매번 너한테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놀라고 신신당부하시던 분이니까. 어쨌든 되는 걸로 알고 애들한테 말해 놓을게.]

수인은 아주머니 허락도 떨어지지 않았는데 제멋대로 결론 짓고는 전화를 끊어 버렸다.

아영은 끊어진 핸드폰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

태하는 그 아이의 눈빛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맑은 샘물 같은 커다란 갈색 눈동자가 눈만 감으면 떠올랐다.

제게 거인이냐고 물었던 그 아이의 눈빛이 잊히지 않았다.

유난히 갈색 동공이 큰 게 마치 저를…….

미친놈. 설마 그 애가 네 아들일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제가 생각해도 말이 되지 않았다.

아영과 잠자리할 때 단 한 번도 피임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러니 그 아이가 제 아이일 확률은 제로에 가까웠다.

다른 남자의 아이일 게 분명한데 왜 자꾸 떠오르는지 모를 일이다.

이아영의 아이라서 그런 걸까? 아니면 그 아이가 제 아이이길 바라서 이러는 걸까?

하아. 권태하, 그만하자.

며칠 동안 잠을 설쳤더니 쓸데없는 생각이 너무 많아졌다.

태하는 거칠게 마른세수를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잠들기 위해 술의 힘이라도 빌릴 생각이었다.

냉장고에 넣어 둔 맥주를 꺼내는데 핸드폰 벨이 울렸다.

태하는 맥주를 테이블에 올려놓은 뒤 핸드폰이 있는 침실로 걸어갔다. 액정 화면에 캐롤라인의 이름이 뜨자 그의 눈빛에 짜증이 섞였다.

태하는 이내 못 본 척 다시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다시 거실로 나온 태하는 맥주 캔을 딴 뒤 단숨에 절반을 비웠다. 그러는 사이 끊어졌던 전화는 곧바로 다시 울렸다. 아마 받을 때까지 하려는 모양이었다.

그 뒤 캐롤라인에게 30번 넘게 전화가 왔지만, 태하는 끝끝내 받지 않았다.

그녀는 전화로는 안 되겠는지 이번에는 문자를 보내기 시작했다.

어디냐로 시작해서 당장 전화 안 하면 죽어 버리겠다는 내용의 문자까지 보내자 인내심의 한계에 부딪힌 태하는 그 자리에서 안주도 없이 맥주 세 캔을 연속으로 비웠다. 그러자 쉴 사이 없이 울려 대던 전화도 문자도 갑자기 잠잠해졌다.

이제 지쳤나 보다 했다. 다시 전화벨이 울리기 전까지는.

RRRRR. RRRRR. RRRRR.

액정 화면을 살피던 그의 눈빛에 의아함이 스쳤다.

발신자명이 ‘제주한라병원’이었기 때문이다.

불길한 예감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태하는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여기 제주 한라병원인데요. 혹시 캐롤라인 리를 아십니까?]

가슴이 덜컹했다.

“네. 그런데 무슨 일이시죠?”

[캐롤라인 씨가 응급실에 실려 왔습니다. 지금 병원으로 와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캐리가요? 어디 다쳤습니까?”

[호텔 욕실에서 자해를 시도하다 쓰러진 걸 직원이 발견하고 응급실로 이송했습니다.]

“상태는 어떻습니까?”

[다행히 동맥은 피해서 생명에는 지장이 없습니다.]

전화를 끊은 태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한동안 잠잠하다 했더니 또 발작이 시작됐나 보다.

태하는 깊은 한숨을 몰아쉰 뒤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 캐롤라인은 손목에 붕대를 감은 채 잠들어 있었다. 아마도 진정제를 투여한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안타까운 시선으로 쳐다보던 태하는 이내 병실을 나와 그녀의 엄마 로라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길게 울린 뒤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대니얼이 어쩐 일이야? 휴가 동안에는 전화하지 말라고 엄포를 놓더니?]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로라의 밝은 목소리를 듣고 있으려니 가슴이 답답했다.

“지금 통화 가능하십니까?”

[물론이지. 대니얼의 전화라면 언제든 오케이지.]

“놀라지 말고 들으세요. 캐리가 자해를 했습니다.”

[뭐? 또?]

“죄송합니다.”

놀라 숨넘어갈 듯한 로라의 목소리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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