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6화 (56/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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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영이 말릴 사이도 없이 서준은 옆집 아주머니를 따라 아이스크림 가게로 들어갔다.

잠시 후 기다란 꼬깔콘 위에 동그랗게 얹힌 아이스크림을 양손으로 들고 나와서는 그녀 앞에 내밀었다.

“엄마 거.”

“고마워.”

아영이 파란색과 분홍색이 섞인 알록달록한 아이스크림을 받으며 말했다.

“잘 먹을게요.”

“원래 후식은 밥 얻어먹은 사람이 쏘는 거야.”

고맙다는 그녀의 말에 진도 아주머니가 윙크하며 말했다.

그렇게 나란히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걷는데 그들을 지나치던 차가 갑자기 멈춰 섰다.

익숙한 차체에 설마 하며 번호판을 확인하던 순간 차에서 내리는 태하를 본 아영은 걸음을 우뚝 멈췄다.

짙은 검은색 눈동자가 직시하듯 날아들자 아영은 숨이 막혀 왔다.

수십 수백 번을 상상했다. 만에 하나 그와 제 아이가 마주친다면 어떻게 그 상황을 잘 넘길 수 있을지를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혹여나 아이가 누구냐고 물으면, 태연하게 제 아이라고 말하는 연습을 했다. 그리고 또 누구의 아이냐고 물으면, 내가 사랑하는 남자의 아이라고 말하는 것도.

하지만 눈앞에 현실과 맞닥트리자 지우개로 지운 것처럼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저 넋이나 간 듯 멍할 뿐.

저벅. 저벅.

그가 걸어왔다.

직선으로 뻗은 그의 날카로운 시선이 저를 거쳐 제 손을 잡은 서준에게 향하자 아영은 본능적으로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엄마? 엄마?”

서준이는 아까부터 움직이지 않는 엄마가 이상한지 얼른 가자고 재촉하듯 손을 흔들었다.

하지만 아영은 땅 밑에서 누군가 붙잡고 있는 것처럼 한 발자국도 뗄 수가 없었다.

그러는 사이 눈앞까지 다가온 그가 걸음을 멈췄다.

숨 막힐 듯 오가던 시선을 먼저 거둔 건 그였다.

그의 시선은 그녀와 같이 있던 진도 아주머니에게로 옮겨졌다. 진도 아주머니와 눈이 마주치자 그는 작게 고개 숙여 인사를 건넸다.

이 상황이 어떻게 된 영문인지는 모르지만, 눈치로 두 사람 사이에 뭔가 있음을 감지한 아주머니도 따라 인사했다.

“와, 크다.”

그들의 침묵을 깬 건 서준이었다.

그녀에게 향했던 그의 시선이 이끌리듯 서준에게로 옮겨졌다.

아영은 그의 시선에서 서준을 숨기고 싶은 강한 충동에 휩싸였다. 하지만 섣부른 제 행동으로 인해 그가 이상하게 생각할까 봐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아저씨 거인이에요?”

그를 보기 위해 고개를 뒤로 한껏 젖힌 서준이 커다래진 눈으로 물었다.

그는 마치 소인국에 온 거인처럼 서준을 신기한 듯 쳐다보더니 이내 무릎을 굽혀 시선을 맞췄다. 그러고는 서준의 얼굴을 하나하나 눈에 담는 것처럼 자세히 쳐다보았다.

아영은 행여 그가 눈치라도 챌까 봐 조마조마해 숨조차 쉴 수가 없었다.

“아니.”

“그런데 왜 이렇게 커요?”

“아저씨처럼 키 큰 사람 처음 봐?”

“네.”

“그래서 무서워?”

서준이 아니라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가 다행이라는 듯 긴 눈매를 휘며 미소 짓자 서준이 따라 웃었다.

그 눈매가 똑같아 옆에서 지켜보던 그녀의 가슴이 뻐근할 정도로 당겨졌다.

그때 서준이 호기심 어린 얼굴로 물었다.

“그런데 우리 엄마 알아요?”

“엄마, 라고?”

“네!”

믿을 수 없다는 듯 강렬한 그의 시선이 제게 향하자 아영은 숨이 턱 막혀 왔다.

결혼도 하지 않은 그녀에게 어떻게 아이가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 눈빛이었다.

경직된 그녀의 얼굴은 표정을 잃었고, 온몸은 터질 듯한 긴장감으로 인해 뻣뻣하게 굳어 침조차 삼킬 수가 없었다.

뭔가를 찾듯 집요한 그의 시선이 한참을 머물다 돌아섰을 때 아영은 하마터면 다리에 힘이 풀려 꺾일 뻔했다.

“네 엄마랑 친구야.”

“우와!”

서준이 신기하다는 듯 눈을 반짝였다.

“왜 놀라?”

“엄마 남자 친구는 처음 봐요!”

“그래?”

아영은 서준과 태하의 대화가 길어질수록 입 안이 바짝바짝 말라 왔다.

태하는 그런 그녀의 속마음도 모르고 계속해서 대화를 이어 나갔다.

“그런데 꼬마 신사는 이름이 뭐야?”

“이서준이요.”

“이서준.”

서준이 혀짧은 소리로 또박또박 제 이름을 밝히자 그가 음미하듯 나직하게 따라 불렀다.

“서준이는 몇 살이야?”

“여, 여긴 어쩐 일이야?”

서준이 손가락을 펴며 막 대답하려는 찰나 아영이 불쑥 끼어들었다.

그녀의 방해가 못마땅한지 그가 차가운 시선을 던졌다.

아영은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지나가던 길이었어.”

“이 동네를?”

그녀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그도 그럴 게, 그녀가 사는 동네는 관광지에서 한참이나 떨어져 있었기에 관광객이 잘 오는 곳이 아니었다.

“관음사 가는 길이었는데 내비가 이 길로 안내하더라고.”

특이하게도 관음사 가는 길에 고개가 하나 있는데, 가끔 잘 되던 내비가 오작동을 하면서 길을 이상하게 안내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혹시 제가 사는 동네를 찾아온 게 아닐까 하던 의심이 안도로 바뀐 것도 잠시, 그에게 서준을 들키지 않고 떨어트릴 방법을 생각하려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관음사는 저쪽이야.”

“그렇구나.”

아영은 어서 갈 길 가 보라는 듯 그가 갈 방향을 알려 주었다. 하지만 그는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건성으로 답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이 다시 서준에게 향하자 아영은 심장이 다시 조여들었다.

“얘기 길어질 것 같은데, 난 서준이랑 먼저 집에 가 있을게.”

초조한 마음에 저도 모르게 입술을 자근자근 씹고 있는데, 그녀의 얼굴에서 난처함을 읽었는지 진도 아주머니가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마치 서준이는 내가 잘 보고 있을 테니 얘기 잘 하고 오라는 듯.

아영은 마음속으로 감사 기도를 했다.

“서준아, 할미가 업어 줄까?”

“네!”

혹여나 엄마와 함께 있겠다고 떼쓸까 봐 아주머니는 서준이 제일 좋아하는 어부바를 해 주었다.

신이 난 서준은 진도 아주머니 등에 폴짝 업혔다.

진도 아주머니가 ‘으차’ 기합을 넣으며 일어나자 서준이 시동을 걸듯 작은 발을 통통 굴렸다.

“할미 기차가 달린다─.”

진도 아주머니가 빠른 걸음으로 달리자 몸이 들썩들썩 움직이는 게 재밌는지 서준이 꺅꺅거리며 소릴 질렀다. 제 엄마가 옆에 없다는 것도 잊은 채.

“어떻게 된 거야?”

두 사람이 사라진 골목길에서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그가 툭 던졌다.

아영은 들키지 않게 숨을 삼킨 뒤 되물었다.

“뭐가?”

천천히 몸을 돌린 그가 서늘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결혼 안 했다고 들었는데,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안 했어.”

담담한 그녀의 답변에 그의 눈빛이 당혹스러움으로 물들었다.

“뭐야. 그럼 싱글맘이라는 거야?”

아영은 부정하지 않았다.

그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지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놀랍네. 누구보다 성공을 바라던 네가 일을 포기하고 아이를 선택할 줄은 꿈에도 몰랐거든.”

“우선순위가 바뀌었을 뿐이야.”

아영은 대수롭지 않은 투로 말했다.

“궁금하네. 대체 어떤 남자기에 네 꿈을 포기하게 만든 건지.”

“네가 알 거 없어.”

그녀가 선을 긋듯 잘라내자 그의 눈빛이 일순 가늘어졌다.

“아니. 난 꼭 알아야겠어. 5년 전 나와 양다리 걸친 남자가 누군지.”

“뭐?”

차가운 그의 눈동자가 꿰뚫듯 쳐다보자 아영은 말끝이 잘게 떨렸다.

“나 만나면서 양다리 걸치지 않고서는 이서준이 다섯 살일 수는 없잖아. 안 그래?”

그녀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아마도 서준의 입을 막기 전 손가락을 본 듯했다.

낭패감에 휩싸인 아영은 초조하게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말해. 아이 아빠가 누군지.”

찌를 듯 강렬한 시선에 아영은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그의 의심을 떨쳐 내기 위해서는 무슨 말이든 해야 했다. 하지만 얼어붙은 입이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설마, 차진혁이야?”

“선배와는 전혀 상관없는 아이야.”

가까스로 입술을 뗀 그녀가 간신히 대답했다.

그는 제 예상이 빗나가자 표정이 더욱 살벌해졌다.

“그럼, 누구야?”

“넌 말해도 몰라.”

그의 입에서 하, 하고 조소가 샜다.

“뭐야. 혹시 차진혁이 아닐까 했는데 또 다른 남자였던 거야?”

“…….”

“이아영, 대단하네. 그 짧은 사이에 세 남자와 놀아났던 거야?”

그의 말이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가슴에 박혔지만, 아영은 반박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침묵이 화를 부추겼는지 바짝 다가선 그가 그녀의 손목을 아프게 움켜쥐며 나직하게 뇌까렸다.

“좋았어?”

“읏.”

그가 움켜쥔 손목에 힘을 주자 손목이 부러질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좋았겠지. 질리지 않게 번갈아 가면서 즐기느라. 안 그래? 난 그것도 모르고 등신 새끼처럼 좋아서 꼬리나 흔들어 댔으니.”

그는 화가 가라앉지 않는지 자신의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겼다.

“양다리 걸친 적, 없어.”

“네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서준이가 몇 월생인지 알면 답이 나오겠지.”

느릿하게 굴리며 내뱉은 말에 그녀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거짓말을 할 거면 표정 관리나 제대로 해.”

그가 그녀의 턱을 들어 올리며 나직하게 뇌까렸다.

“가끔 궁금했어. 아니, 사실은 미치게 궁금했어. 갑자기 네가 날 떠난 이유가 뭔지. 이유도 알려 주지 않고 떠난 너 때문에 난 수많은 밤을 자책하며 보냈어.”

“…….”

“그런데 다른 새끼 아이를 임신해서 떠난 거였다니. 하.”

그는 이 상황이 어처구니가 없는지 하늘을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다 이내 살벌하기 그지없는 눈빛이 그녀에게 내리꽂혔다.

“말해. 널 임신시킨 새끼가 누군지.”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야.”

아영이 그의 시선을 피했다.

“그거 알아? 네가 그럴 때마다 더 악착같이 상관하고 싶어진다는 거.”

“나한테 신경 그만 끄고, 네 애인이나 신경 써.”

그녀의 턱을 잡아 강제로 되돌린 그가 서늘한 어조로 읊조렸다. 그러자 아영이 제 턱을 쥔 그의 손을 탁 소리 나도록 쳐내며 쏘아붙였다.

“그게 무슨 말이야.”

“몰라서 물어?”

“그러니까 알아듣게 말해!”

그가 매서운 얼굴로 소리쳤다.

“네 애인 캐롤라인 리나 신경 쓰라고.”

그가 피식 기가 찬 웃음을 터트렸다.

“캐리가 그래? 본인이 내 애인이라고?”

아영은 대답 대신 그를 노려보았다.

“똑똑히 들어. 캐리와는 아무 사이도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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