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야, 남자들 별 볼 일 없는 것 같은데, 우리 그냥 클럽 가자.”
“그럼 밖에 있는 남자들은 어떻게 하고?”
파우치에서 새빨간 립스틱을 꺼낸 여자가 입술에 덧바르며 말했다. 그러자 옆에서 손을 씻던 여자가 종이 타월에 손을 닦으며 되물었다.
“갑자기 배 아파서 집에 가야겠다고 대충 둘러대면 되지.”
“그럴까, 그럼?”
쏴아아아.
그때 물 내려가는 소리와 함께 여자가 밖으로 나오자 새빨간 립스틱을 바른 여자가 거울을 통해 물었다.
“해주 넌 어때?”
“나도 콜!”
“이번엔 이 언니가 제대로 낚아 주겠어!”
다른 친구까지 흔쾌히 수락하자 새빨간 립스틱을 바른 여자가 큰소리치며 앞장섰다. 친구 두 명이 깔깔거리며 뒤따라 나갔다.
“하아…….”
세 사람이 나간 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자 그제야 아영은 삼켰던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어느 정도 숨이 제자리로 돌아오자 저를 안다시피 하고 있던 그와 눈이 마주쳤다.
아까와 달리 짙게 가라앉은 그의 눈동자를 보자 머릿속에 경고등이 울렸다.
당황한 아영은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비켜.”
“못 비켜.”
그에게 단칼에 거절당한 아영은 차갑게 노려보았다.
“장난할 기분 아니야.”
“나도 장난하는 거 아니야.”
“그럼 뭐 하자는 건데!”
화가 난 그녀가 쏘아붙이자 그는 마치 자신의 이유를 알려 주듯 허리를 지그시 눌렀다.
제 복부에 단단한 뜨거움이 닿았다. 그게 뭔지 깨달은 아영은 믿을 수 없다는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미쳤어.”
“그러게. 나도 내가 정상은 아닌 것 같아.”
“알면 알아서 해결해. 난 먼저 갈 테니까.”
아영이 그를 피해 몸을 옆으로 틀었다. 그가 그녀의 양팔을 움켜잡았다.
“어딜 도망가.”
“왜 이래.”
“날 이렇게 만든 책임은 져야지.”
“이게 왜 내 책임…… 흡!”
놀라 벌어진 입술 사이로 그의 혀가 예고도 없이 침입했다.
아영이 그의 가슴을 밀쳐 내려 하자 그는 그녀의 두 손을 잡아 머리 위로 고정했다. 그러고는 남은 한 손으로 그녀의 턱을 옆으로 틀어 더 깊숙이 파고들어 왔다.
순식간에 그녀의 입 안을 장악한 그는 도망가려는 그녀의 혀를 휘감아 뿌리째 뽑아 버릴 것처럼 탐욕스럽게 빨아들였다. 그러자 그녀의 타액이 그의 목구멍으로 꿀꺽 넘어갔다.
아영은 숨결까지 앗아 갈 정도로 거침없이 휘몰아치는 키스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흐읏.”
숨이 턱까지 차오르자 아영이 신음을 흘렸다.
그 소리에 그가 마지못한 듯 그녀의 입술을 놓아주자 아영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하아. 하아…….”
그의 입술에 짓눌러져 빨갛게 부어오른 입술 사이로 아영은 뜨거운 숨을 토해 냈다.
하지만 채 숨을 고르기 전에 그의 농도 짙은 키스로 인해 풀려 버린 다리가 버티지 못하고 휘청했다.
태하는 그녀의 몸이 아래로 흘러내리자 재빨리 그녀의 허리를 붙잡은 제 품 안으로 끌어안았다. 그런 다음 그녀의 몸을 지탱하기 위해 그녀의 다리 사이로 자신의 허벅지를 밀어 넣었다.
“돌겠네.”
그녀의 몸의 열기가 다리 사이로 고스란히 전해지자 태하가 씹어뱉듯 내뱉었다.
그의 거친 어조에 마치 그의 재킷이 생명줄인 것처럼 붙잡은 채 헐떡이고 있던 그녀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직 빠져나가지 않은 열기를 고스란히 담은 채.
“이아영, 정신 차려. 여기서 잡아먹어 버리기 전에.”
채찍질 같은 차가운 어조에 몽롱했던 아영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제야 그에게 온전히 제 몸을 내맡긴 채 안겨 있었다는 걸 깨닫고는 창피함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황급히 그의 품에서 떨어져 나온 아영은 그가 붙잡기 전에 문을 열고 뛰어나갔다.
“하아.”
혼자 남은 태하는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실낱같은 이성이 남아 있지 않았다면 그녀를 취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아찔해졌다.
무모한 자신의 행동에 속으로 거친 욕설을 내뱉은 태하는 가까스로 흥분을 가라앉혔다.
깊게 심호흡을 한 뒤 흐트러진 옷을 추스르고 나온 태하는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유유히 밖으로 나갔다.
달칵.
그가 나가고 얼마 뒤, 두 사람이 있었던 화장실 또 다른 칸의 문이 천천히 열렸다.
그들보다 먼저 들어가 있었던 캐롤라인이 비틀거리며 걸어 나왔다.
핸드폰 쥔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
오늘 그가 보이지 않았다.
아영은 차라리 다행이다 싶었다.
어제 호텔에서 그와 미친 짓을 저질렀던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아영은 자신을 향해 온갖 저주를 퍼부었다. 그런데도 자신이 용서되지 않았다.
스무 살 때도 저지르지 않을 무모한 짓을 저질렀다. 그것도 경멸해 마지않던 권태하와.
때와 장소를 잊을 만큼 그에게 푹 빠져 있던 상태도 아니었고, 혼을 쏙 빼놓을 만큼 달콤한 키스도 아니었다.
키스가 끝난 후 입술이 퉁퉁 부을 정도로 사나운 키스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영은 그곳이 어디인지도 잊을 만큼 정신을 놓고 말았다.
따귀를 올려붙여도 모자랄 판에.
미쳤어.
그가 저를 얼마나 비웃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자 아영은 이대로 도망가 버리고 싶었다.
그가 없는 먼 곳으로.
다행히 지금까지 그와 마주치지 않았지만, 언제 그와 마주칠지도 몰라 불안했다.
그러면서도 막상 이대로 영영 그를 보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자 가슴이 아려 오는 듯했다.
그렇게 데이고도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는 자신이 아영은 어이없고 한심해 미칠 것 같았다.
“좋은 아침.”
반쯤 넋이 나간 채로 컵을 닦고 있는데 현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영이 고개를 돌리자 현성이 직원들의 인사를 받으며 그녀 앞으로 걸어왔다.
데스크 앞에 선 현성이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아영 씨, 어제 잘 들어갔어요?”
“네.”
그곳에서 도망치듯 나온 아영이 룸으로 돌아갔을 때 현성은 잠에 취해 있었다.
그런 현성을 두고 나오긴 미안했지만 차마 태하의 얼굴을 다시 볼 자신이 없었던 아영은 가방만 챙겨 서둘러 나왔다.
“혹시…… 어제 저 실수한 거 있어요?”
“왜요?”
“어제 저 술을 많이 마셨는지 다 같이 바까지 들어간 건 기억이 나는데, 그 뒤부터 기억이 하나도 안 나는 거 있죠. 대학교 때 제외하고 필름 끊긴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하필 어제 끊기는 바람에…… 죄송해요. 제가 가자고 해 놓고 먼저 취해 버려서.”
현성이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사과하실 필요 없어요. 아무 일도 없었으니까.”
“그래요? 다행이다.”
안도하는 현성을 보며 그녀 역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말도 없이 먼저 간 이유를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고, 또 기억도 하지 못하는 고백에 거절할 필요가 없어져서 안심이었다.
그렇다고 마음이 가벼워진 건 아니었다. 모르면 몰랐지, 현성의 마음을 알게 된 마당에 같이 일하는 건 불편했다.
아영은 퇴근하고 집에 돌아가면 다른 일자리를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 터덜터덜 걸어가는데 멀리서 아들 서준의 모습이 보이자 아영은 깜짝 놀랐다.
“서준아!”
“엄마아아아아!”
그녀의 부름에 뒤늦게 엄마를 발견한 서준이 진도 아주머니 손을 뿌리치고 함박웃음을 지으며 달려왔다.
서준의 키에 맞춰 무릎을 접은 아영은 제 품에 안긴 서준을 꼭 안아 주었다. 서준의 작은 몸이 그녀 품에 쏙 들어와 안겼다.
“서준이 엄마 마중 나온 거야?”
“응! 엄마 빨리 보고 싶어서 왔어.”
아들을 살짝 품에서 떼어 낸 그녀의 질문에 서준은 칭찬받고 싶은지 눈을 반짝이며 혀 짧은 소리로 또박또박 말했다.
그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워 아영은 다시 한번 제 품에 꼭 안았다.
“어떻게 된 거예요?”
“엄마 올 시간 됐다며 얼른 나가자고 어찌나 성화던지 서준이 손에 끌려 나왔어.”
그녀의 물음에 진도 아주머니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늘 서준이 때문에 힘들진 않으셨어요?”
다니던 어린이집 서준의 반에 홍역 걸린 아이가 있어서 아영은 부득이하게 진도 아주머니에게 서준을 맡겼다.
“힘들긴. 서준이랑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몰라서 좋아. 집에 혼자 있으면 매일이 그날이 그날이거든.”
아영의 걱정스러운 질문에 진도 아주머니는 주름진 눈가를 접으며 말했다.
“그렇게 생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또 그런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내가 서준이랑 놀아 주는 게 아니라 서준이가 나랑 놀아 주는 거라니까.”
진도 아주머니 말에 아영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작은 목소리로 ‘네’라고 대답했다.
“엄마, 나 돈가스 먹고 싶어.”
“지금?”
“응!”
“그래. 가자.”
아침부터 돈가스 노래를 부르더니 기어코 오늘 먹을 셈인가 보다. 아영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꺄! 신난다!”
방방 뛰며 좋아하는 서준을 보며 따라 웃던 아영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진도 아주머니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돈가스 괜찮으세요?”
“나도 끼워 주게?”
“그럼요.”
“할머니, 빨리 가요!”
“그래. 그래.”
그녀의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서준이 진도 아주머니 손을 잡아끌었다.
진도 아주머니가 끌려가는 몸짓을 하며 장단을 맞춰 주자 서준이 재밌는지 까르르 웃었다.
엄마도 살아계셨다면 저랬을까.
뒤에서 두 사람을 가만히 쳐다보던 그녀는 문득 떠오른 엄마 생각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엄마, 뭐 해? 빨리 와!”
“응. 갈게.”
아영이 젖은 눈으로 말했다.
식전 수프에 빵을 적셔 먹은 뒤 길게 늘어지는 치즈 돈가스까지 먹은 서준의 배가 올챙이처럼 튀어나왔다.
“서준아, 맛있었어?”
“응! 엄청 엄청!”
정말 맛있었는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그것도 양쪽으로.
“돈가스는 입에 맞으셨어요?”
가게에서 나온 아영은 저와 마찬가지로 서준의 손을 잡으며 걷는 진도 아주머니에게 물었다.
“왜들 줄 서서 먹나 했더니 이유가 있었네. 바삭하니 맛있더구먼.”
“다음에 또 같이 가세요.”
“불러 주면 나야 땡큐지.”
아영의 말에 흔쾌히 대답한 진도 아주머니는 고사리 같은 손의 주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서준아, 우리 후식으로 아이스크림 먹을까?”
“네!”
그렇게 먹고도 또 들어갈 배가 있는지 서준이 고개까지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