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4화 (54/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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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시비 걸 거면 돌아가.”

“대니!”

“저, 진정하시고 한 잔 받으세요.”

분위기가 점점 험악해지자 좌불안석이던 현성이 눈치를 보며 양주병을 들었다.

씩씩거리던 캐롤라인은 홧김에 술잔을 내밀었다. 그러더니 잔이 채워지자마자 단숨에 들이켰다.

“더 주세요.”

“아, 네.”

그녀가 안주도 먹지 않고 바로 빈 술잔을 내밀자 놀란 현성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내 잔을 채웠다.

“같이 마셔요.”

“감당할 수 있겠어요?”

“네?”

“아니에요. 마셔요.”

현성은 캐롤라인이 또 혼자 들이켜기 전에 재빨리 자신의 술잔을 내밀었다.

캐롤라인은 분위기를 띄우려는 현성의 노력에 픽 하고 웃더니 이내 현성의 잔에 술잔을 부딪쳤다.

하지만 그때 현성은 알지 못했다. 캐롤라인을 당해 내기엔 자신의 주량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한 시간 뒤 현성의 눈꺼풀은 깜빡이는 속도가 현저히 느려졌고, 평소 아나운서처럼 정확한 발음을 구사하던 그의 발음은 중간중간 뭉개지며 늘어졌다.

그리고 기분이 좋은지 이야기를 하다 말고 웃었고, 갑자기 턱을 괸 채 아영을 뚫어지게 쳐다보기도 했다. 지금처럼.

아영이 부담스러워 시선을 피하려던 그때 현성이 침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영 씨, 나 진짜 별로예요?”

“네?”

뜬금없는 질문에 아영이 의아한 얼굴로 반문하자 현성이 비 맞은 강아지처럼 눈꼬리를 축 내려트린 채 말을 이었다.

“나, 아영 씨 무지무지 좋아하는데…… 아영 씨는 나…… 안 좋아하는 것 같아서요.”

당황한 아영의 시선이 저도 모르게 맞은편에 앉은 태하에게 향했다.

그는 현성의 말이 우스운지 아니면 어이가 없는지 한쪽 입꼬리가 비릿하게 올라가더니 남아 있는 술을 입 안에 털어 넣었다.

“사장님, 술 그만 드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취해서 하는 말 아닌데.”

“사장님…….”

아영은 둘만 있는 자리도 아닌데 난데없이 고백하는 현성이 난처해 그의 말을 막으려 했다.

하지만 현성은 그녀의 말을 자르며 제 할 말을 이어 나갔다.

“매일 아침 다짐해요. 아영 씨에게 부담 주지 말자, 조급해하지 말고 천천히 기다리자고…….”

현성이 나직한 한숨을 쉬며 자신의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런데 그게 마음처럼 잘 안 돼요. 아영 씨만 보면 자꾸 욕심이 생겨요. 맛있는 식당 발견하면 맛보여 주고 싶고, 경치 좋은 곳 보면 데려가고 싶고, 아영 씨 좋아하는 판타지 영화가 개봉한 걸 보면 같이 보러 가고도 싶고…… 아영 씨랑 하고 싶은 게 자꾸 많아져요.”

갑작스러운 현성의 고백에 아영은 당혹스러웠다.

그동안 현성이 저에게 살갑게 군 이유가 나이도 비슷하고 제주도에 친구가 없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다.

설마하니 아이도 있는 저에게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는 추호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어머, 카페 사장님 아영 씨 많이 좋아하나 보다.”

캐롤라인은 뜻밖의 상황이 재미있는지 현성과 그녀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이내 태하 들으라는 듯이 말했다.

태하는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의 빈 잔에 술을 채울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영 씨 보자마자 첫눈에 반했거든요.”

현성이 술이 올라 발그레해진 얼굴로 쑥스러운 표정을 짓자 캐롤라인은 팔짱을 낀 채 두 사람을 품평하듯 쳐다보았다.

“잘해 봐요. 둘이 잘 어울리는 것 같은데.”

“저도 잘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아영 씨 마음이…….”

“그래서 포기하려고요?”

“아니요!”

현성이 정색하자 여자가 히죽 웃으며 덧붙였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잖아요. 조금만 더 힘내요. 내가 보기에 곧 넘어갈 것 같은데.”

여자의 말에 현성의 얼굴에 급 화색이 돌았다.

“남의 일에 함부로 참견하지 마세요.”

아영은 저를 앞에 두고 마치 제가 없는 것처럼 제멋대로 현성을 부추기는 캐롤라인의 행동에 화가 나 차갑게 쏘아붙였다.

“안타까워서 그러죠. 그쪽 처지에 카페 사장님 정도면 과분한 거 아닌가? 튕길 게 아니라 덥석 잡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

“이것 보세요.”

RRRRR. RRRRR. RRRRR.

비꼬는 듯한 캐롤라인의 말에 아영이 바로 반박하려는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

액정을 확인한 캐롤라인은 전화 받기 곤란한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태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대니, 나 전화 좀 받고 올게.”

그는 캐롤라인의 말에 대꾸도 없이 술잔만 비웠다. 그녀는 무신경한 태하를 보며 서운한 눈을 흘기더니 이내 룸을 빠져나갔다.

캐롤라인이 나간 뒤 룸 안 공기는 싸늘해졌다.

하지만 그걸 깨닫지 못한 현성은 좀 전에 했던 캐롤라인의 말에 갑자기 용기라도 생긴 건지 아영의 손을 덥석 잡았다.

“아영 씨, 나 정말 잘할게요. 그러니까 한 번만 제대로 봐주면 안 돼요?”

“사장님, 일단 이 손 놓고 얘기해요.”

놀란 아영이 황급히 잡힌 손을 잡아 빼려 했지만, 현성이 더욱 힘주어 잡으며 간절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저희 부모님도 아영 씨 마음에 드신대요. 그러니까…….”

평소라면 자신이 싫어할 행동은 절대 하지 않을 현성이었다. 오늘따라 그답지 않게 고집을 부리자 아영은 당혹스러웠다.

이게 다 캐롤라인의 부추김 때문이리라.

“상대방이 싫다는데 손은 놓죠.”

순간 그때까지 아무 말도 없던 태하가 나섰다.

그제야 그 자리에 태하도 있다는 걸 깨달았는지 현성은 붙잡고 있던 그녀의 손을 황급히 놓아주었다.

“아, 죄송합니다.”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아영은 화장실을 핑계 삼아 도망치듯 룸을 나왔다.

밖으로 나온 아영은 이대로 집에 가 버릴까 생각했다.

하지만 급하게 나오는 바람에 가방을 들고 나오지 않았다는 걸 깨닫고는 이내 포기하고 화장실로 향했다. 거기서 시간 좀 보내다 들어갈 생각이었다.

쏴아아아.

아영이 수전을 들어 올리자 차가운 물이 쏟아져 나왔다.

술도 마시지 않았는데 거울에 비친 얼굴이 발그스름해 보이자 세수를 했다.

차가운 물이 닿자 화끈거리던 얼굴이 조금은 가라앉는 것 같았다.

아영은 종이 티슈로 얼굴에 있는 물기를 대충 닦아냈다. 그러자 옅게 남아 있던 화장마저 사라진 그녀의 맑은 얼굴이 드러났다.

이제 가서 가방만 들고 바로 집에 가자.

그렇게 결심하고 밖으로 나가는데 문밖에 서 있던 태하를 보고 흠칫 놀랐다. 남자 화장실은 반대편에 있었기에 그가 여기에 있을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 여자 화장실이야.”

“알아.”

아영이 당황함을 감추며 건넨 말에 그가 태연한 얼굴로 받아쳤다.

“몰랐네. 취향이 이런 쪽인 줄은.”

“잠깐 얘기 좀 해.”

“너랑 할 얘기 없어.”

아영이 그를 피해 옆으로 비켜 가려는데 그가 막아섰다.

무슨 짓이냐는 듯 눈살을 찌푸리자 태하가 서늘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결혼 포기하는 게 좋을 거야.”

“그게 무슨 소리야?”

“당분간 널 놔줄 생각이 없거든.”

“네가 무슨 권리로.”

결혼할 생각 따윈 전혀 없었다. 하지만 제 결혼을 그가 좌지우지하려 한다는 게 화가나 되받아쳤다.

그가 위험한 냄새를 풍기며 거리를 좁혀 왔다. 뒤로 주춤 물러나던 아영은 곧 벽에 부딪혀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녀 앞으로 바짝 다가선 그가 상체를 숙이더니 그녀의 귓가에 대고 음산하게 내뱉었다.

“벌써 잊었어? 날 버린 대가는 네 몸으로 받겠다고 했을 텐데.”

“너도 날 속였으면서 피해자인 척 굴지 마.”

“내가?”

“누가 모를 줄 알아? 네가 그 여자와…… 흡!”

그때 그가 갑자기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가만히 있어.”

놀란 그녀가 그의 손을 떼기 위해 버둥거리자 그가 나직하게 뇌까렸다.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여자들의 소리가 왁자지껄하게 들렸다.

“야, 아까 내 옆에 앉은 남자 말하는 거 들었어?”

“왜, 뭐라고 했는데?”

“내가 완전 자기 스타일이라면서 나보고 둘이 몰래 나가자더라?”

“진짜? 잘해 봐.”

“잘해 보긴 뭘 잘해 봐. 난 말 많은 남자 딱 질색이야.”

소리가 점점 화장실 쪽으로 가까워지자 당황한 아영의 눈빛이 마구 흔들렸다.

여자 화장실 앞에서 그와 함께 있는 모습을 들키기라도 하는 날엔 이상한 소문에 휘말리게 될 게 뻔했다.

더 큰 문제는 화장실이 복도 끝에 있어 그가 숨을 곳도 없다는 거였다.

어떡해!

그녀의 난처한 눈빛을 읽기라도 한 건지 그가 갑자기 그녀를 화장실 안쪽으로 잡아끌었다. 그러더니 제일 가까운 곳의 문을 열고 그녀를 밀어 넣은 뒤 뒤따라 온 그가 문을 닫았다.

좁은 화장실 안이 꽉 들어차면서 두 사람의 몸이 빈틈없이 맞닿았다.

당황한 아영이 그를 밀쳐 내려 했지만 문에 막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너 미쳤어?”

“그럼 나랑 있는 거 들켜도 괜찮아?”

그를 밀쳐 낼 수도, 그렇다고 뒤로 물러날 곳도 없어 난감해진 아영이 성마른 소리로 따지고 들자 그가 나직하게 뇌까렸다.

“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너까지 안으로 들어오면 어떻게 해?”

“변태로 낙인찍히면 곤란하거든.”

아영이 그를 노려보는 사이 여자들이 우르르 화장실 안으로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쉿.”

그가 조용히 하라는 듯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 댔다.

쏴아아.

한 명은 손을 씻는지 물소리가 들렸고, 또 다른 한 명은 화장을 고치려는지 파우치 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남은 한 명은 뭘 하는지 조용했다.

‘잠깐 수다 떨다 나가겠지’라고 생각하던 찰나, 발소리가 들렸다.

또각. 또각. 또각.

설마.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지자 그녀의 동공이 커졌다.

달칵.

그녀의 예상대로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하필 두 사람이 있는 옆 칸으로 들어온 건지 옷 벗는 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렸다.

그 소리에 놀란 아영이 다급히 숨을 들이켜자 그가 경고하듯 그녀의 팔을 잡은 손에 힘이 주었다.

아영은 휘둥그레진 눈을 깜빡이지도 못한 채 마른침만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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