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태하가 레스토랑에 나타나자 아영의 두 눈이 놀라 커졌다.
“네가 어떻게 여길…….”
분명 좀 전까지 수영장에서 촬영하고 있던 그였다.
“촬영 끝나서 식사 좀 할까 하고 올라왔는데, 아는 얼굴이 보이길래 반가워서 인사 좀 하려고 왔지.”
그가 태연한 얼굴로 대꾸했다.
아영은 그의 말이 순수하게 들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가 일부러 저를 방해하기 위해 제가 있는 레스토랑에 왔다는 증거도 없어 따질 수도 없었다.
게다가 그는 캐롤라인과 함께였다.
“그럴 것까지는 없는데. 암튼 고마워. 굳이 인사까지 하러 와 줘서.”
마치 기계처럼 감정 없는 그녀의 인사에 태하가 피식 웃었다.
다른 때였다면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리는 그의 매력적인 미소에 가슴이 두근거렸을지도 모르지만, 아영은 되레 화가 났다.
어제 저에게 캐롤라인과 아무 사이 아니라고 큰소리칠 때는 언제고, 24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서 그녀와 같이 호텔에 온 그의 뻔뻔함에 어이가 없었다.
애초에 그의 말을 믿지도 않았지만, 눈앞에서 실제로 보니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그때 그에게 인사할 기회를 엿보고 있던 현성이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여기서 다 뵙네요.”
“그러게요.”
반가운 얼굴로 인사를 건넨 현성과 달리 태하는 무감한 얼굴로 입꼬리만 슬쩍 올릴 뿐이었다.
“혹시 아까 수영장에서 촬영하신 분이 태하 씨였어요?”
“네.”
“태하 씨 촬영하는지 알았으면 바로 갔을 텐데. 좋은 구경 놓쳤네요.”
진심으로 아쉬워하는 현성을 보며 태하는 건조하게 웃었다.
“그런데 옆에 계신 분은 누구세요?”
“아, 이쪽은.”
호기심 어린 현성의 질문에 태하가 소개하려는데 캐롤라인이 말을 막으며 현성에게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대니 에이전시에서 온 캐롤라인 리라고 해요. 그리고 대니와는 서로에 대해 모르는 게 없는 찐한 친구 사이죠.”
여자는 ‘친구’보다는 ‘찐한’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면서 태하에게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
현성과 아영에게 그와 특별한 사이인 듯한 느낌을 보여 주려는 의도가 다분해 보였다.
“그럼 혹시 이번에 기사에 실렸던 분이세요?”
“어머, 눈치채셨어요? 맞아요. 저예요.”
의도한 대로 현성이 걸려들자 캐롤라인은 짐짓 당황한 표정을 만들어 내더니 은근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태하는 그녀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미간을 구겼다.
“캐리…….”
“두 사람은 어떤 사이예요? 보통 사이는 아닌 것 같은데.”
여자는 만류하려는 태하의 말을 자르더니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현성에게 말했다.
“제가 일하는 카페 사장님이세요.”
아영은 여자가 오해하기 전에 선을 그었다.
현성의 얼굴에 드리워진 서운한 빛을 읽은 캐롤라인은 두 사람의 온도가 다르다는 걸 눈치챘다.
“다들 처음엔 그렇게 시작하죠. 친구였다가 연인이 되기도 하고, 직장 상사였다가 애인이 되기도 하고 또…….”
아영이 여자의 말에 반박하려는데 태하가 빨랐다.
“시간을 너무 오래 뺏은 것 같군요. 방해꾼들은 그만 물러가겠습니다.”
캐롤라인의 말을 자른 태하는 제 팔 위에 있는 그녀의 손을 떼어 놓으며 말했다.
캐롤라인은 갈 길을 잃은 손으로 완벽하게 세팅된 머리를 쓸어 넘겼다. 굴욕스러웠는지 손끝이 잘게 떨렸다.
“저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다 같이 한 잔 어떠십니까?”
‘이제 가겠구나’라고 안심하던 찰나, 갑자기 현성이 상의 한마디 없이 말도 안 되는 제안을 하자 아영은 내심 당황했다.
세계적인 모델인 그와 동석하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지만, 아영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다.
“촬영하고 와서 피곤할 거예요.”
아영은 태하가 대답하기 전에 선수 치듯 가로막았다.
“아, 맞다. 촬영하고 오셨지. 죄송합니다. 피곤하실 텐데 얼른 가세 쉬세요.”
뒤늦게 자신이 무리한 제안을 했음을 깨달은 현성은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아영은 태하에게 어서 가 보라는 듯 빤히 쳐다보았다.
그녀의 눈빛을 읽은 그의 입꼬리가 비릿하게 올라가더니 현성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근처에 괜찮은 바(bar)가 있습니까?”
“네?”
“갑자기 술이 당겨서요.”
“아, 멀리 갈 필요 없이 이 호텔 지하에 있는 바가 괜찮습니다.”
“그래요? 잘됐네요.”
뜻밖의 기회에 두 눈이 기쁨으로 차오른 현성과 달리 아영의 얼굴은 흙빛으로 변했다.
당황한 그녀가 고개를 홱 돌리자 태연한 그의 시선과 마주쳤다.
아영이 왜 제안을 받아들였냐는 듯 추궁하는 눈빛을 던지자 그는 입매를 느슨하게 당겨 웃을 뿐이었다.
“대니, 멋대로 이러는 게 어디 있어?”
“피곤하면 먼저 돌아가.”
갑작스러운 합석에 불만이 있는 사람이 그녀만은 아니었는지 캐롤라인이 씩씩거렸다. 그러자 그는 굳이 싫은데 억지로 있을 필요 없다는 듯 말했다.
“지금 나 혼자 돌아가라는 거야?”
“택시 태워 줄게.”
캐롤라인은 그가 저를 잡지도, 그렇다고 같이 가자고 나서지도 않자 신경질을 부렸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그녀가 있는 테이블을 힐끗 쳐다보았다.
아영은 그가 어서 여자를 데리고 이곳에서 나가 주길 바랐지만, 그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는 건지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지금 내가 택시 탈 줄 몰라서 이러는 거로 보여?”
“혼자 가기 싫으면 같이 가든가.”
그는 그게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는 듯 말했다.
같이 합석하고 싶지도 않고, 또 혼자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는지 캐롤라인은 한참을 씨근덕거리더니 마지못해 합석에 동의했다.
현성은 제 뜻이 이루어져서 기쁜지 신나는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데스크에서 현성과 그가 계산하는 사이 뒤에서 떨어져 있던 아영에게 캐롤라인이 다가왔다.
“내가 경고했을 텐데.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그녀가 목소리를 낮추더니 협박조로 말했다.
“말은 똑바로 하시죠. 가만히 있는 제 앞에 나타난 건 그쪽이에요.”
“일부러 대니 보란 듯이 창가 자리에 앉아 있었던 거 누가 모를 줄 알아?”
캐롤라인이 눈을 사납게 치뜨며 따졌다.
“억측이 심하시네요. 여길 예약한 사람은 제가 아니라 사장님입니다.”
“우연이었다?”
“믿지 않을 테지만 사실입니다. 태하가 이 호텔에서 촬영하는지 알았다면 안 왔을 거예요.”
아영은 변명하는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억울하게 오해는 받고 싶지 않았다.
“경고하는데, 대니에게 꼬리 치지 마.”
누가 누구에게 꼬리를 쳤단 말인가.
아영이 억울해 한마디 하려는 순간 그와 현성이 돌아왔다. 아영은 달싹이던 입을 다물었다.
아영을 죽일 듯이 쳐다보던 캐롤라인은 언제 그랬냐는 듯 살살거리며 태하 옆에 달라붙었다.
겉과 속이 다른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아영은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가시죠.”
현성이 기대감에 찬 얼굴로 앞장서자 태하와 캐롤라인이 뒤따라 나갔다.
뒤에 혼자 남은 아영은 어깨에 멘 가방끈을 꽉 움켜쥐었다.
‘이대로 도망가 버릴까.’
그 순간 그녀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태하가 돌아섰다. 그러고는 꼼짝하지 않고 선 그녀를 보며 말했다.
“뭐 해. 안 오고.”
마치 그녀에게 도망갈 생각은 하지 말라는 듯 단호한 어조였다.
그때 눈치 없는 현성이 엘리베이터를 붙잡은 채 그녀를 불렀다.
“아영 씨, 얼른 오세요. 엘리베이터 도착했어요!”
아영은 모래주머니라도 매단 듯 잘 떼어지지 않는 다리를 마지못해 옮겼다.
지하에 있는 바에 도착한 네 사람은 룸으로 향했다.
태하와 캐롤라인은 안쪽 소파에, 아영과 현성은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곧이어 테이블이 세팅되자 현성은 들뜬 얼굴로 양주병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태하와 캐롤라인 그리고 아영의 잔에 술을 따랐다.
현성의 잔을 태하가 채워 주었을 때는 감사의 인사도 잊지 않았다.
“자, 건배할까요?”
현성의 말에 세 사람은 술잔을 들어 올렸다.
“우리의 만남을 위하여!”
현성의 건배사가 끝나자 세 사람은 양주가 익숙한지 단숨에 입 안으로 털어 넣었다.
모두 마신 뒤 술잔을 내려놓자 아영은 그제야 술잔을 입에 가져다 댔다. 그러고는 질끈 눈을 감고서 술을 삼켰다.
독한 위스키가 목구멍을 할퀴듯 훑고 지나가자 곧 속에서 불이 나는 듯 뜨거웠다. 이내 머리까지 올라온 열기가 그녀의 얼굴을 집어삼킨 듯 홧홧했다.
“술도 못 마시면서 스트레이트로 마시면 어떻게 해?”
아영의 안색이 울긋불긋한 걸 본 태하가 그녀의 잔을 가져가 큰 잔으로 바꿨다. 그런 뒤 얼음을 넣은 잔과 우유를 그녀 앞에 놓았다.
“우유랑 같이 마셔.”
“필요 없어.”
아영은 저를 위하는 척하는 그가 위선자로 보였다.
“내일 후회하지 말고 말 들어.”
“후회해도 내가 해.”
“여기서 기어 나가고 싶으면 마음대로 해.”
그녀가 연거푸 거절하자 그의 표정이 냉소적으로 돌변했다.
갑자기 룸 안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자 현성이 어색한 얼굴로 말문을 열었다.
“역시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시라더니 서로에 대해 모르는 게 없으시군요.”
“고등학교 때 안 친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고.”
태하가 자신의 빈 잔에 술을 따르고는 그대로 들이켰다.
“아, 그, 그렇군요.”
예상치 못한 대꾸에 현성은 무안했는지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아영은 그를 힘주어 노려보았다. 아무리 안 친했어도 이 자리에서 굳이 그렇게 말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때 짧은 미니스커트 차림을 한 캐롤라인이 다리를 반대쪽으로 바꿔 꼬며 아영을 아니꼬운 얼굴로 쳐다보았다.
“왔으면 분위기 좀 맞추죠?”
캐롤라인은 마치 그녀 때문에 분위기를 망쳤다는 뉘앙스로 말했다.
“아니면 관심 끌고 싶어서 일부러 그러는 건가?”
아까부터 저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여자였다.
거기에 휩쓸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덧붙인 그녀의 말에 아영은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제가 누구의 관심을 끌었다는 거죠?”
“내숭이 취미예요? 아니면 눈치가 없나?”
탁!
그때 태하가 자신의 빈 잔을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그 소리에 움찔 놀란 세 사람이 그를 돌아보았다.
“그만해, 캐리.”
“왜 나한테만 그래? 분위기 망친 사람은 저 여잔데?”
그의 지적에 캐롤라인이 억울하다는 얼굴로 따지고 들었다.
“계속 시비 걸 거면 돌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