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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영이 돌아서 커피 내릴 준비를 하는데 현성이 그녀 앞으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그녀가 커피 내리는 모습을 가만히 눈에 담았다.
투명하리만치 깨끗한 얼굴에 사슴 눈망울을 닮은 커다란 눈, 작지만 오뚝한 코, 연한 핑크빛이 감도는 입술, 깔끔하게 하나로 묶은 머리는 어깨 뒤로 찰랑거렸다.
흰 셔츠에 검은색 바지를 받쳐 입고 그 위에 올리브색 앞치마를 두른 그녀의 모습은 단정하면서도 깔끔했다. 그리고 무척이나 사랑스러워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드세요.”
“고마워요.”
아영이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건네자 그녀를 넋 놓고 쳐다보고 있던 현성은 재빨리 시선을 굴리더니 이내 싱긋 웃어 보이며 말했다.
“아영 씨도 같이 마셔요.”
“전 괜찮아요.”
“저보다 더 카페인이 필요할 것 같은데.”
“저 피곤해 보여요?”
아영이 머쓱한 얼굴로 되물었다.
“조금요.”
현성의 솔직한 대답에 아영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화장으로 가린다고 가렸는데 역부족이었나 보다.
“혹시 어제 카페에서 있었던 일 때문이에요?”
현성이 그녀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아마 직원들이 여자와 있었던 일을 현성에게 얘기한 모양이다.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에요.”
“다른 이유가 또 있어요?”
“별일 아니에요.”
현성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묻자 그에게 시시콜콜 말하고 싶지 않았던 아영은 옅은 웃음으로 마무리했다.
현성은 궁금해하는 눈치였지만 다행히 더는 묻지 않았다.
“아영 씨, 혹시 오늘 저녁 시간 괜찮아요?”
“시간이요?”
아영이 테이블을 정리하다 말고 되물었다.
“저번에 저희 부모님 만나 주신 거에 대한 감사의 식사 대접이라도 하고 싶어서요.”
“괜찮아요. 그러실 필요 없어요. 어려운 일도 아니었는걸요.”
그녀의 완곡한 거절에 현성이 덧붙였다.
“내가 안 괜찮아서 그래요.”
“네?”
“사실은 아는 지인이 호텔 식사권을 줬는데 같이 갈 사람이 없어서요. 그래서 겸사겸사 대접하는 거니 부담 갖지 말고 같이 가 줘요.”
성격이 좋아 주위에 사람도 많은 현성에게 같이 갈 사람이 없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그녀에게 부담 주지 않기 위해 둘러댄 말처럼 들렸다.
그녀가 머뭇거리자 현성이 말을 이었다.
“시간 오래 안 뺏을게요.”
“식사만 하고 가는 거라면…….”
간절한 현성의 눈빛에 더는 거절할 수 없었던 아영이 마지못해 말했다.
그러자 현성은 세상을 다 가진 듯 함박웃음을 지어 보였다.
“물론이죠.”
제주호텔은 유럽의 역사 있는 건물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 이국적이었다.
호화로운 호텔 경관을 본 아영은 난처함에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하얀색 브이넥 니트와 청바지 차림인 제 모습이 이곳과 어울리지 않는 듯 느껴졌다.
집에 가서 옷이라도 갈아입고 올걸. 식사만 하고 나오면 된다는 생각에 깊게 생각하지 못했다.
아영은 최대한 빨리 먹고 나와야겠다고 생각했다.
“가실까요?”
호텔 직원에게 차 키를 맡긴 현성이 그녀 곁으로 다가왔다. 아영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따라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레스토랑 입구에 들어선 현성이 예약자 이름을 댔다.
직원이 확인하는 동안 아영은 빠르게 레스토랑을 훑어보았다.
역시나 레스토랑 내부는 웅장하면서 고급스러웠다. 그리고 테이블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옷차림 또한 럭셔리했다. 청바지에 운동화 차림은 그녀뿐인 것 같았다.
“자리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예약자 명단에서 이름을 확인한 직원이 두 사람을 자리로 안내했다.
세련된 슈트 차림인 현성과 걸어가는데 등이 따가웠다.
체하지 않고 먹을 수 있을까. 아영은 그 생각뿐이었다.
직원은 두 사람을 호텔 수영장이 내다보이는 창가 자리로 안내했다.
“오면서 방송국 차가 보이더니 여기서 촬영하나 보네요.”
현성이 수영장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현성을 따라 시선을 돌린 아영은 바쁘게 돌아다니는 스태프들을 힐끗 쳐다보더니 이내 관심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웨이터는 정중히 두 사람 앞에 메뉴판을 내려놓았다.
“아영 씨 뭐 드실래요?”
“글쎄요.”
현성은 그녀와 와서 기분이 좋은지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영은 메뉴판을 보며 최대한 빨리 나오는 음식이 뭘까 생각했다.
“오늘은 공짜니까 부담 갖지 말고 맘껏 시키세요.”
“전 오일 파스타로 할게요.”
아영이 보고 있던 메뉴판을 덮으며 말했다. 얼른 먹고 나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거로 되겠어요?”
“전 이거면 됐어요. 어차피 더 주문해도 다 못 먹는걸요.”
“여기 스테이크 맛 괜찮아요.”
현성은 괜찮다는 그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스테이크뿐만 아니라 세 가지를 더 주문했다.
“다 드실 수 있어요?”
“저 식성 좋은 거 알잖아요.”
그의 말처럼 현성의 식성은 남달랐다. 호리호리한 체격에 그 많은 음식이 어떻게 다 들어가는지 놀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아영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무심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때 수영복 차림을 한 채 선베드 위에 누워 있는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상체를 반쯤 세우고, 한쪽 다리를 접은 채 반쯤 누운 남자는 강렬한 시선으로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었다.
구릿빛으로 그을린 남자의 어깨는 드넓었고, 양쪽으로 갈라진 가슴은 탄탄했으며, 고랑이 패인 듯한 복근은 남자가 포즈를 달리할 때마다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역동적으로 움직였다.
그럴 때마다 그를 지켜보던 여자 스태프들은 한숨을 내쉬었고, 넋이 나간 얼굴로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남자 스태프들은 질투 어린 시선으로 남자의 단점을 찾으려는 듯 눈에 불을 켰지만 결국 찾지 못했는지 불만 가득한 얼굴이었다.
그때 카메라를 응시하던 시선이 갑자기 그녀가 있는 방향으로 틀어졌다.
남자의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 본 그녀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도 그럴 게, 수영복 차림의 남자는 다름이 아니라 권태하였다.
‘말도 안 돼. 악연인 게 틀림없어.’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 또 만날 수는 없었다.
그와 마주치지 않으려고 게스트하우스 근처에는 가지도 않았고, 그의 차가 주차되어 있으면 바깥출입을 자제했으며, 혹여라도 그가 보일라치면 멀리 돌아갔다.
그런데 어처구니없게 여기서 또 만날 줄이야.
그 순간 그도 아영을 알아챘는지 그녀의 시선을 움켜쥐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녀는 보이지 않는 줄에 묶이기라도 한 것처럼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다시는 그를 보고 싶지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영원히.
왜 자꾸 눈앞에 나타나 제 마음을 뒤흔드는지, 아영은 그가 원망스러웠다.
“아영 씨, 와인 어때요?”
“…….”
“아영 씨?”
메뉴판을 훑던 현성이 재차 그녀를 부르자 그제야 아영은 그에게서 풀려날 수 있었다.
뒤늦게 정신이 돌아온 아영이 빠르게 눈을 깜빡이며 되물었다.
“네?”
“뭘 그렇게 봐요?”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잠시 딴생각하느라 못 들었어요. 죄송해요.”
현성이 창밖을 기웃거리자 아영은 황급히 그의 관심을 제게 돌렸다.
“혹시 어제 잠 못 자게 한 일 때문에 그래요?”
아영은 현성이 그렇게 오해하도록 대답 대신 옅은 미소만 지어 보였다.
그녀의 표정을 보고 말하길 꺼린다는 걸 눈치챈 현성은 말을 돌렸다.
“레드 와인 중에 페루산 뒤 프랭스라고 있는데 맛이 진짜 괜찮거든요. 어때요?”
“와인은 잘 몰라요.”
“저 믿고 한번 마셔 봐요.”
아영이 고개를 끄덕이자 현성은 싱긋 웃더니 웨이터에게 주문했다.
그러는 사이 슬쩍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 아영은 제 쪽을 사나운 시선으로 쳐다보고 있던 그와 다시 눈이 마주쳤다.
당황한 아영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시선이 제게 머물러 있는지 얼굴이 따끔따끔한 것 같았다.
마음 같아서는 자리를 바꾸자고 말하고 싶었지만, 레스토랑 어디에도 빈자리는 보이지 않았다. 예약제로 운영하는 곳이니 빈자리가 있을 리 없었다.
달리 방법이 없었다. 식사가 끝날 때까지 창밖을 안 보는 수밖에.
잠시 후 나온 스테이크는 현성의 말처럼 육질이 부드럽고 풍미가 좋았다. 하지만 아영은 수영장에 있을 그가 신경 쓰여 맛을 제대로 느낄 수가 없었다.
억지로 먹었다가는 체할 것 같아 아영은 포크를 내려놓았다.
“맛이 별로예요?”
“아니요. 맛있었어요.”
“그런데 왜…….”
“사실은 오기 전부터 속이 좀 안 좋았거든요.”
절반이나 남은 그녀의 음식을 보며 현성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영은 차마 수영장에서 촬영 중인 그가 신경 쓰여 못 먹겠다고 말할 수 없어 둘러댔다.
사실 거짓말도 아닌 게, 그가 수영장에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부터 위가 급격히 긴장하기 시작하더니 음식을 삼켜도 소화를 하지 못하는 느낌이었다.
“그럼 진작 말씀하시지 그랬어요. 지금 가서 소화제라도 사 올까요?”
“아니요. 괜찮아요. 그럴 필요 없어요.”
“정말 안 먹어도 되겠어요?”
“네. 이럴 때는 속을 비우면 괜찮아지더라고요. 그러니 저 신경 쓰지 마시고 드세요.”
괜찮다는 그녀의 말에도 현성은 마음이 놓이지 않는지 재차 물었다. 아영은 옅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현성을 안심시켰다.
다행히 현성은 그녀가 미안하지 않게 혼자서도 잘 먹어 주었다.
테이블을 치운 뒤 후식으로 나온 커피를 마셨다.
따뜻한 게 들어가니 단단하게 뭉쳐 있던 위가 조금은 부드러워진 것 같았다. 한결 숨 쉬는 게 편했다.
“역시 느끼한 음식을 먹은 뒤엔 아메리카노가 딱 맞는 것 같아요.”
아영은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영 씨, 여기 분위기 어때요?”
“좋아요.”
아영은 부담스럽다는 말은 일부러 뺐다.
“그럼 이번 달 회식 여기서 할까요?”
그녀가 좋다고 하자 신이 났는지 현성이 눈을 빛냈다.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무리라니요. 저 그만한 능력 되는 남잡니다.”
현성이 턱을 치켜들며 거드름 피우듯 말하자 그 모습이 우스워 아영은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자 현성도 따라 웃었다.
그때 웃고 있던 두 사람이 있는 테이블 위로 음영이 드리워졌다.
“즐거워 보이네.”
귀에 익은 음성에 놀라 고개를 돌리자 태하가 서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