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1화 (5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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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주차장에서 캐롤라인의 차를 발견한 태하는 조수석에 올라탔다.

그녀는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은 것인지 그가 온 걸 알면서도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왜 말 안 했어?”

그가 무슨 얘기냐는 듯 빤히 쳐다보자 캐롤라인이 성마른 얼굴로 덧붙였다.

“그 여자 1층 카페에서 일하는 거.”

아영의 얘기가 나오자 태연하던 그의 얼굴에 미세하게 균열이 갔다. 하지만 이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포장한 그가 덤덤한 어조로 되물었다.

“만났어?”

“커피 마시러 갔다가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말하면서도 심장이 벌렁벌렁한지 손으로 제 가슴을 꾹 눌렀다.

“이제 나와 상관없는 여자야.”

“아무 상관 없다면서 굳이 숙소를 여기로 옮겼다고?”

“친구 놈 소개받아서 온 곳에 이아영이 있었을 뿐이야.”

아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오랜만에 친구 석현과 통화하던 중 제주도에 진짜 끝내주게 괜찮은 카페가 있으니 꼭 가 보라고 추천받은 곳이 ‘더 우드’였다.

그때는 흘려들었는데 우연히 촬영하면서 ‘더 우드’에 있는 아영을 보고 석현이 왜 꼭 가 보라고 한 건지 이해할 수 있었다.

아마 아영과 저 사이를 모르고 한 말이었을 거다.

“그런데 그 말 하려고 꼭두새벽부터 찾아온 거야?”

“그러지 말고 숙소 옮기자. 그때처럼 순진한 얼굴로 또 언제 네 뒤통수 치고 도망갈지 모르잖아. 안 그래?”

“이제는 바보처럼 안 당해.”

그는 캐롤라인이 아닌 자신에게 말하듯 낮게 읊조렸다.

“그냥 그러지 말고 남은 휴가 나랑 하와이에서 보내자. 응? 엄마도 너 꼭 설득해서 데려오라고 했단 말이야.”

“말은 고맙지만, 사양할게.”

“난 싫어! 네가 한국에 머무는 거 싫단 말이야!”

“어린애처럼 떼쓰지 마.”

그녀가 난리를 쳐도 태하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절대 너 귀찮게 안 할게.”

“NO.”

“가서 따로 움직여도 상관없어.”

“그럴 거면 굳이 같이 갈 필요 없잖아.”

“꼭 가야 해! 아, 아니, 같이 가고 싶어.”

캐롤라인이 그의 옷소매를 잡아당기며 간절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녀를 빤히 지켜보던 그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너 나한테 뭐 숨기는 거 있지.”

“뭐? 수, 숨기는 거라니? 그런 거 전혀 없어!”

그녀의 눈동자가 바람처럼 흔들렸다.

“그럼, 왜 날 못 데려가서 안달인데?”

“그, 그게 아니라, 같이 가고 싶으니까 그런 거지. 너 바빠서 최근에 휴가 간 적 없었잖아.”

“내 휴가는 내가 알아서 해.”

제 시선을 피하지도 못한 채 마른침만 삼키는 캐롤라인을 한참을 쳐다보던 그가 이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만 가.”

그 말을 끝으로 태하는 차에서 내렸다.

핸들을 움켜쥔 그녀의 손톱이 깊이 박혔다.

***

“아아아악!”

캐롤라인은 호텔로 돌아오자마자 들고 있던 가방을 집어 던졌다.

가방에 맞은 꽃병이 대리석 바닥으로 떨어지며 유리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하지만 이미 눈이 돌아간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큐빅이 알알이 박힌 손톱을 신경질적으로 물어뜯으며 방 안을 왔다 갔다 했다.

“절대 대니를 여기서 머물게 해선 안 돼. 만약 그랬다가 아이와 마주치는 날엔…….”

캐롤라인은 잠시 후 누군가를 떠올리곤 황급히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태하가 속한 UTA 에이전시 대표이자, 그녀의 엄마인 로라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여덟 번을 울렸을 때에야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그녀의 엄마 로라 헤리어트는 잠결에 전화를 받은 건지 목소리가 잠겨 있었다.

“엄마, 대니 당장 미국으로 불러 줘.”

[다짜고짜 그게…… 무슨 소리야?]

누워 있던 몸을 일으키는지 로라의 목소리가 잠깐 끊겼다가 들렸다.

“그년이 나타났어.”

[누굴 말하는 거니?]

로라는 잠을 떨쳐 내며 아닌 밤중에 홍두깨 같은 말을 하는 자신의 딸에게 재차 물었다.

“대니랑 동거했던 년 말이야!”

[대니 아이 임신했다던?]

로라는 잠이 확 달아난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래! 그년!”

[어디서 어떻게 만났는데?]

캐리는 흥분한 어조로 로라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캐리의 이야기를 들은 로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5년 전, 딸이 대니 주위에 얼쩡거리던 여자를 제 손으로 치워 버렸다고 했을 때 로라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항상 그렇듯이 인기 많고 잘생긴 대니얼 주위에 꼬이는 여자 중 한 명이겠거니 생각하고 가볍게 넘겼다.

그러나 한 달 뒤 미국으로 돌아온 대니얼의 상태를 보며 심상치 않다는 걸 깨달았다.

일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프로페셔널한 그가 모든 스케줄을 취소하고 집에 갇혀 매일 술에 절어 사는 걸 보고 로라는 딸을 매섭게 다그쳤다.

겁이 난 그녀는 거짓말로 속여 쫓아낸 여자가 사실은 대니얼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는 것과 대니얼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걸 털어놓았다.

그러자 골치가 아프다는 듯 한동안 관자놀이를 꾹 누른 채 앉아 있던 로라가 말했다.

“죽을 때까지 이 일은 너와 나만 아는 거야. 절대 대니얼이 알게 해선 안 돼.”

그 뒤로 로라는 혹시라도 그녀가 말실수하는 일이 없도록 가벼운 샴페인 이외에는 술도 입에 대지 못하게 했다.

캐롤라인은 과한 처사라며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 있냐고 반박했다.

하지만 지금껏 여자에게 연연한 적이 없었기에 쿨하게 잊을 줄 알았던 대니얼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자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그녀는 로라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날 이후 두 사람은 실수로라도 대니얼 앞에서 한국 자체를 언급하지 않았다. 그래서 얼마 전 한국 기업에서 들어온 광고 모델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

그런데 그 기업에서 대니얼의 연락처를 어떻게 알았는지 개인적으로 연락이 갔고, 대니얼이 흔쾌히 수락했다는 소식을 들은 캐롤라인은 목덜미가 싸했다.

감이 좋지 않아 여러 방면으로 대니얼을 설득했지만, 그는 끝까지 제 뜻을 굽히지 않았다.

불안해진 캐롤라인은 로라에게 대니얼을 설득해 달라고 부탁했지만 그는 로라의 말도 듣지 않았다.

지금껏 단 한 번도 단호하게 군 적이 없었던 대니얼이었기에 로라는 더는 밀어붙일 수 없었다며 별일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말라며 그녀를 위로했다.

그런데 그 찝찝함이 결국 터지고야 말았다.

[얄궂다. 어떻게 거기서 또 만나니.]

“엄마, 나 어떡해? 설마 대니가 그년이랑 다시 만나진 않겠지? 만약 그러면 나 콱 죽어 버릴 거야!”

[캐리, 그런 소리 함부로 하면 안 된다고 했지.]

로라가 엄하게 타일러도 캐롤라인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그러니까 엄마가 대니 미국으로 부르면 되잖아!”

[알았어. 엄마가 어떻게든 대니 설득해서 미국으로 오게 만들 테니까 너부터 당장 돌아와.]

화가 나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그녀의 성격을 잘 아는 로라는 불안한지 제 딸을 어르고 달랬다.

“싫어. 나 없는 동안 대니가 그년이랑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캐리, 엄마 말 들어.]

“난 대니가 한국 뜰 때까지 여기서 한 발자국도 안 움직일 거야. 그렇게 알아!”

[캐리, 캐…….]

로라의 다급한 외침에도 캐롤라인은 가차 없이 전화를 끊어 버렸다.

***

그 여자가 왔다 간 이후로 아영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래서 퇴근 후 버스 정류장에서 기다리고 있는 태하를 보고도 무시하고 지나쳤다.

그러자 그가 그녀의 팔을 잡아 돌려세웠다. 깊게 눌러 쓴 야구모자 사이로 그의 시선이 직선으로 닿았다.

“캐리 만났다며.”

툭 던진 그의 말에 아영은 대답 대신 그를 노려보았다.

그녀의 표정이 심상치 않음을 눈치챈 그가 다시 입을 뗐다.

“캐리가 혹시 너한테 무슨 말 했어?”

“무슨 말?”

아영이 모른 척 되묻자 그가 그녀의 생각을 읽으려는 듯 빤히 쳐다보았다.

그의 짙은 눈동자가 집요하게 그녀의 시선을 옭아맸다.

“주제넘은 말이라든지…….”

주제넘은 말? 그게 뭘까? 혹시 그의 곁에서 떨어지라는 말을 말하는 걸까?

하지만 그건 그의 애인으로서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저라도 제 애인 주위에 얼쩡거리는 여자가 싫었을 테니까.

“없었어.”

“다행이네.”

태하의 무표정한 얼굴 위로 옅게 안도의 빛이 스쳤다가 사라졌다.

‘뭐가 다행인데? 넌 뭐가 걱정돼서 물은 거야? 나야, 그 여자야?’

그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이아영, 너 아직도 정신 못 차렸구나? 넌 그의 걱정에 포함되지 않아.’

신랄하게 비꼬는 제 이성의 말에 아영은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얼얼했다. 그제야 잠시 흐리멍덩했던 머릿속이 선명해졌다.

“권태하.”

그가 말하라는 듯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경고하는데, 다시는 두 사람 사이에 날 끼워 넣지 마.”

“그런 적 없어.”

“없다고? 5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야.”

“그게 무슨 말이야? 5년 전이라니.”

“모른 척 시치미 떼도 소용없어. 이제 더는 두 사람 사이에서 놀아날 생각 없으니까.”

“이아영, 알아듣게 말해!”

그가 그녀의 팔을 우악스럽게 잡아당기며 소리쳤다. 그러자 지나가던 사람들이 무슨 일인가 하는 얼굴로 두 사람을 힐끗 쳐다보았다.

사람들의 시선을 느낀 그가 그녀의 팔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차에 타. 타서 얘기해.”

“너랑 더 할 얘기 없어.”

아영이 도로변을 살피며 말했다.

“내가 있어.”

“아니, 더는 너랑 엮이고 싶지 않아.”

있는 힘껏 그의 손을 뿌리친 아영은 도망치듯 버스에 올라탔다.

차를 두고 따라 탈 수 없었던 태하가 머뭇거리는 사이 문을 닫은 버스는 이내 출발했다.

멀어지는 버스를 보는 그의 미간이 잔뜩 구겨졌다.

***

뜬눈으로 밤을 새워서인지 다크서클이 눈 밑까지 내려왔다.

아영은 무겁게 흘러내리는 눈을 추어올리며 스태프실에서 나왔다.

“좋은 아침.”

“좋은 아침인 거 맞아요?”

카페 안으로 들어서던 아영은 아르바이트생들 대신 현성이 보이자 뜨악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보통 출근 시간이 11시인 현성에게 9시인 지금은 상당히 이른 시간이었다.

“벌써 출근하신 거예요?”

“눈이 일찍 떠져서 그냥 출근했어요.”

“잘하셨어요. 커피 드릴까요?”

“좋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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