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화 (50/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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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랑. 딸랑.

“어서 오세요. ‘더 우드’입니다.”

커피를 내리던 아영은 도어벨 소리에 인사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여자의 모습에 카페 안에 있던 손님들의 시선이 일제히 여자에게 향했다.

허리가 드러난 블랙 셋업 수트에 볼드한 체인 백을 든 여자는 새빨갛게 물든 머리를 하나로 묶고 얼굴을 절반이나 가리는 검은 색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다.

마치 할리우드 영화에서 막 튀어나온 것 같은 화려한 여자의 모습에 손님들이 수군거렸다.

여자는 그런 시선이 익숙한지 아니면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지 카페 내부를 휘둘러보더니 이내 별거 없다는 듯 시선을 거둔 뒤 데스크로 걸어왔다.

또각또각. 새빨간 구둣발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안녕하세요. 주문하시겠습니까?”

“음, 여기 시그니쳐 메뉴가 뭐예요?”

여자는 그녀 쪽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뒤에 있는 메뉴판을 훑으며 물었다.

“감귤을 이용한 탠저린 라테와 탠저린 카푸치노입니다.”

감귤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여자가 팽팽한 미간을 찌푸렸다.

“그냥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주세요.”

“네. 다른 건 더 필요한 거 없으세요?”

“없어요.”

“그럼, 6,500원 결제해 드리겠습니다.”

여자가 가방에서 카드를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

검은색 인조 손톱 사이에 끼워진 카드를 조심스럽게 건네받은 아영은 계산을 마쳤다.

“앉아 계시면 진동벨로 알려드리겠습니다.”

아영이 카드와 진동벨을 건네주며 말했다.

하지만 여자는 가만히 서서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손님?”

“당신이…… 왜 여기 있어?”

아영이 의아한 얼굴로 부르자 여자의 새빨간 입술이 달싹였다.

“네?”

수수께끼 같은 여자의 말에 아영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반문하자 여자는 자신이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벗었다.

얼굴의 절반을 가리던 선글라스가 사라지자 주먹만 한 여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나 모르겠어요?”

여자의 얼굴을 본 아영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캐롤라인 리. 그 여자였다.

“그쪽이 왜…….”

“그건 내가 할 말 같은데요? 당신이 왜 여기 있어요? 아니, 언제부터 있었어요? 대니도 알아요? 당신이 여기 있는지? 설마, 알고 여기로 옮긴 거예요? 그래요? 그런 거냐고요?”

머릿속이 하얘진 아영은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여자의 질문에 한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

그의 열애 상대가 누군지 궁금했었다.

그런데 눈앞에 빨간 머리색을 보고 나서야 깨달았다. 그의 열애 상대가 캐롤라인이라는 걸.

그는 분명 친구 사이라고 했다. 아영은 바보처럼 그 말을 믿었다.

반면에 캐롤라인은 그와 저 사이를 눈치챈 게 분명했다.

그래서 5년 전, 날 도망치게 한 거겠지. 그와 나 사이를 떼어 놓으려고.

그때는 이해되지 않았던 캐롤라인의 행동과 말이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자신을 드러낼 수 없는 상태에서 그녀를 떼어 놓을 방법이 그것뿐이었겠지.

한심했다. 거짓말인 줄도 모르고 그녀에게 놀아난 자신이.

하지만 따질 수가 없었다. 그와 캐롤라인 사이에 끼어든 사람은 저였으니까.

“왜 벙어리처럼 말을 안 해요? 어떻게 된 거냐고 묻잖아요, 지금!”

아영의 침묵이 견딜 수 없는지 캐롤라인이 언성을 높였다. 그러자 카페 안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매니저님 아시는 분이세요?”

“대화 중인 거 안 보여? 상관없는 넌 빠져.”

보다 못한 예원이 캐롤라인을 힐끗 쳐다보며 아영에게 조심스럽게 물었지만, 아영이 대답하기도 전에 캐롤라인이 앙칼진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손님, 말이 너무 심하시네요. 남의 영업장에 와서 행패 부리시면 안 되죠.”

“뭐? 행패? 야, 너 몇 살이야?”

“내가 몇 살이면…….”

“그만해.”

무례한 손님을 보면 참지 못하는 예원이 한 소리 하자, 캐롤라인이 파르르 떨었다.

당장 머리채라도 잡을 기세에 아영은 예원의 팔을 붙잡았다.

“예원 씨 데스크 좀 부탁해.”

“네.”

아영이 입고 있던 앞치마를 벗으며 예원에게 부탁했다. 씩씩거리던 예원은 못 이긴 척 대답했다.

“나가서 얘기해요.”

“하!”

아영은 캐롤라인에게 조용하게 일갈한 뒤 먼저 카페를 나갔다.

그런 그녀의 행동에 어이없다는 듯 콧방귀를 끼던 캐롤라인은 벗었던 선글라스를 다시 끼고 카페를 나섰다.

아영은 카페 옆 공터로 향했다.

현성이 게스트하우스를 넓힐 요량으로 사 놓은 땅이었다. 손님이 많을 때 임시 주차장으로 사용하는 터라 가림막을 쳐 놓아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정말 어처구니가 없네요. 어떻게 당신이 여기 있어요?”

캐롤라인은 아직도 이 상황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초조한 얼굴로 왔다 갔다 했다.

걸어오는 동안 혼란스러웠던 머릿속이 조금은 정리가 된 듯 아영이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그건 제가 할 말 같은데요.”

“나야, 대니 만나러 여기 온 거고. 당신은 왜 여기 있냐고요?”

“저 여기 살아요.”

“여기 산다고요? 그때 갔던 곳 여기 아니었잖아요?”

캐롤라인이 눈을 희번덕 뜨며 따지듯 물었다.

아영은 그녀가 마치 제가 잘못한 것처럼 몰아가자 어이가 없었다. 그래서 자세히 말하고 싶지 않았다. 말할 이유도 없었고.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지금 남의 일 말해요? 누군 미쳐 돌겠는데!”

캐롤라인은 뭐가 그리 불안한지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러다 세게 물었는지 피가 배어 나오자 쓰라린지 미간을 찌푸렸다.

“아, 다 필요 없고, 대니 만났어요? 안 만났어요?”

“만났어요.”

“오, 맙소사!”

그녀는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손을 이마에 가져다 댔다.

“만나서 뭐라고 했어요? 설마 우리 사이에 있었던 일 말한 거 아니죠?”

“안 했어요.”

크게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리던 캐롤라인은 퍼뜩 스치는 생각에 재빨리 덧붙였다.

“그럼, 아이는요? 대니가 아이도 봤어요?”

“아직이요.”

그녀는 천만다행이라는 듯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다시 뜬 여자의 눈빛은 한층 사나워져 있었다.

“당장 짐부터 싸세요.”

“내가 왜요.”

“왜라뇨? 대니에게 아이 있는 거 들키고 싶어요?”

캐롤라인이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짐을 싸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권태하입니다. 그러니 날 설득할 생각 하지 말고, 가서 권태하나 설득해서 데려가세요. 저 역시 더는 권태하와 엮이고 싶지 않으니까.”

“무슨 뜻이에요? 대니가 일부러 숙소를 여기로 옮겼다는 건가요? 이아영 씨 때문에? 하, 착각도 지나치면 병이라더니.”

캐롤라인이 어이가 없다는 듯 쳐다보았다.

“사실이든 아니든 저와 가까이 있는 거 신경 쓰이잖아요.”

아영의 말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지 캐롤라인이 새치름한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든 대니 설득해서 바로 한국 뜰 거니까. 그 전까지 아이 있는 거 절대 눈치채게 하면 안 돼요.”

그녀는 불안한지 다시 한번 주의를 시켰다.

“걱정하지 말아요. 두 사람 사이에 또다시 낄 생각 없으니까.”

아영의 말에 캐롤라인은 감이 왔는지 도도하게 턱을 치켜들며 승자 같은 미소를 지었다.

“기사 봤어요? 순식간에 내려가서 못 봤을 줄 알았는데…….”

“왜 그때 말하지 않았어요?”

거드름 피우는 캐롤라인의 말을 자른 아영은 내내 거슬렸던 질문을 던졌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지금 나한테 따지는 거예요? 미리 말 안 했다고?”

“그게 아니라 적어도 그때 말했으면…….”

그를 잊기 쉬웠을 것이다.

5년 동안 아영은 제가 먼저 떠났다는 자책감에 시달렸다. 그래서 그가 내리는 벌을 달게 받았다.

하지만 뻔뻔하게 애인이 있으면서 저에게 접근한 거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더는 그에게 당할 이유가 없었다.

“그때 말했으면 뭐가 달라지는데요? 애인 있는 남자 꼬드겨서 임신한 당신한테? 그때 머리끄덩이 안 잡은 거나 고마워하세요. 마음 같아서는 자근자근 밟고 싶은 거 배 속의 애 생각해서 참은 거니까.”

비아냥거리는 캐롤라인의 말에도 아영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다시는 우리 앞에 나타나지 말아요. 또 한 번 방해하면 그때는 애고 뭐고 더는 안 봐줄 테니까.”

살벌하게 경고한 캐롤라인은 다시 선글라스를 쓰고는 도도하게 공터를 빠져나갔다.

후들거리는 다리로 간신히 버티고 있던 아영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바닥에 깔아 놓은 거친 자갈이 그녀의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

똑똑. 똑똑. 똑똑.

캐롤라인은 연속해서 빠르게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아무 대답이 없자 문에 대고 소리쳤다.

“나야, 캐리! 아직 안 일어난 거야?”

그런데도 기척이 없자 전화를 걸 요량으로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내려는데 달칵하고 문이 열렸다.

태하는 씻다가 나온 것인지 가운 차림에 머리에는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잠깐 얘기 좀 해.”

짜증 섞인 그의 시선에 캐롤라인은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벗으며 말했다.

“무슨 얘기?”

“들어가서 얘기해.”

“1층 카페에 가 있어. 아니다. 그냥 차에 가 있어. 옷 입고 갈 테니까.”

“다시 내려가기 싫어.”

“보다시피 옷 갈아입어야 해.”

카페에 가 있으라던 그가 차로 장소를 차로 바꾼 이유를 알 것 같아 캐롤라인은 짜증이 치밀었다.

“난 상관없어.”

그녀가 허락도 구하지 않고 불쑥 안으로 들어오려고 하자 태하가 단단한 팔로 막아섰다.

정교하게 그린 캐롤라인의 눈썹이 사납게 올라갔다.

“오해받을 행동 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내가 뭘?”

“너랑 나 스캔들 난지 얼마 안 지났어. 생각 좀 하고 움직여.”

그는 마치 세 살 난 어린아이를 가르치듯 말했다.

“그게 내 탓이라는 거야?”

“누가 네 탓이래. 서로 조심해서 나쁠 거 없다는 말이야.”

“너 솔직히 말해. 그때 내가 그런 거 원망하고 있지? 그치?”

“그런 거 아니야.”

“거짓말.”

그가 이 상황이 피곤하다는 듯 미간을 매만지자 캐롤라인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가 있어. 바로 내려갈 테니까.”

그러고는 말이 길어질 것 같았는지 그녀의 대답도 듣지 않고 문을 닫아 버렸다.

띠리릭. 문이 잠기는 소리가 마치 저를 밀어내는 것처럼 들려 캐롤라인은 화가 부글부글 끓어올랐지만 태하에게 할 말이 남아 있었기에 가까스로 참으며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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