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9화 (4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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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영은 카페를 쉬었다.

카페 일하고 처음 있는 일이라 어색했지만, 걱정된다며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집으로 찾아오겠다는 현성을 만류하느라 혼난 걸 빼면 생각보다 몸은 편했다.

누구 때문에 마음은 불편했지만.

그가 저를 안고 뛰었다는 말에 아영은 고마움보다 불쾌함이 컸다. 다른 여자를 껴안은 손으로 제 몸을 만졌다는 게.

기사에 실린 사진이 떠오를 때마다 아영은 제 몸에 그 여자의 냄새가 배어 있는 것 같아 불결했다.

나쁜 새끼.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 생각할수록 열이 받았다.

어떻게 만나는 여자가 있으면서 저를 안을 수 있을까? 아무렇지 않게. 거리낌 없는 얼굴로. 마치 그 순간에는 너밖에 없다는 얼굴로.

더 열 받는 건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거다.

애인이 있다는 말도, 없다는 말도. 그저 내 마음대로 없다고 단정 지었을 뿐.

아영도 그에게 여자가 없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 놓고 왜 한 번도 의심한 적은 없었던 걸까?

내 앞에서 다른 여자 얘길 꺼내지 않아서? 아니면 다른 여자와 통화하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어서? 그도 아니면 다른 여자의 향수를 한 번도 맡아 본 적이 없어서?

정말 그랬다. 그는 한 번도 만나는 여자가 있다는 낌새를 풍기지 않았다.

이아영, 그게 뭐가 중요해?

넌 그저 서준이를 지키기 위해 응한 것뿐이잖아. 그러니 그에게 여자가 있든 없든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야. 안 그래?

그래. 그는 처음부터 자신의 목적을 숨기지 않았다. 그러니 그에게는 아무 잘못도 없었다.

바보처럼 저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했을 뿐.

허탈한 웃음 사이로 눈물이 흘렀다.

띵동. 띵동.

갑자기 들리는 초인종 소리에 아영은 움찔 놀랐다. 이 시간엔 항상 카페에 있었기에 누군가 찾아올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서둘러 눈물을 닦으며 거실로 나간 아영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누구세요?”

“배달 왔습니다.”

“배달이요? 시킨 적 없는데요.”

“어…….”

배달 기사는 당황했는지 아니면 뭔가를 확인하는지 말을 잇지 못했다.

순간 얼마 전 뉴스에서 보았던 배달 기사를 사칭한 강도 사건이 떠오르자 아영은 덜컥 겁이 났다.

“여기가 나나빌라 501호 아닙니까?”

“네. 맞긴 맞는데…….”

“주문서에는 이아영 씨 이름으로 등록되어 있거든요. 어쨌든 계산은 됐으니 문 앞에 놓고 갑니다.”

“아니, 잠깐…….”

아영이 서둘러 거실을 가로질러 현관문을 열었지만 배달 기사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그리고 문 앞에는 종이봉투 두 개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아영은 종이봉투에 붙여진 영수증을 떼어 확인했다.

배달 기사의 말처럼 영수증에는 그녀의 집 주소가 적혀 있었다.

‘대체 누가 보낸 거지?’

고개를 갸웃하던 아영은 그대로 둘 수 없어 종이봉투를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고는 안에 있는 내용물을 확인하는데 헛웃음이 나왔다.

죽이 무려 네 종류나 들어 있었다.

전복죽, 소고기 버섯 죽, 삼계죽, 낙지김치죽까지.

이걸 저 혼자 어떻게 다 먹으라는 건지.

1인분씩 포장되어 있지만, 양이 적은 그녀에게는 일주일 내내 먹어도 다 못 먹을 양이었다.

아마 어떤 죽을 좋아할지 몰라 다양하게 보낸 듯했다.

이런 무모한 행동을 할 사람은 그녀 주위에 딱 한 사람뿐이었다.

익숙한 얼굴이 떠오르자 아영은 한숨 섞인 웃음이 나왔다.

그런데 그때 죽 냄새가 콧속으로 스며들자 갑자기 배 속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어젯밤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아영은 이끌리듯 낙지김치죽 뚜껑을 열었다.

잘게 썬 김치와 낙지 그리고 밥을 넣어 한소끔 끓여낸 죽 위에 고소한 깨와 김가루를 올린 걸 보자 절로 침이 넘어갔다.

조심스럽게 한 숟갈 떠 후후 분 다음 입 안에 넣자 아삭한 김치와 쫄깃한 낙지와 부드러운 밥알이 씹히는 식감이 좋아 후루룩 넘어갔다.

요란했던 배 속이 어느 정도 진정되자 그제야 고맙다는 전화를 하지 않은 게 떠올랐다.

서둘러 핸드폰을 든 아영은 익숙한 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이 두 번 울렸을 때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언제 들어도 마음이 편해지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저예요. 이아영.”

[몸은 어때요? 괜찮아요? 혹시 또 열나진 않았어요?]

“네네. 괜찮아요.”

현성의 호들갑스러운 걱정에 아영은 옅게 웃었다.

[다행이네요. 아영 씨 쓰러졌다는 소리에 놀란 심장이 아직도 벌렁거려요.]

고마웠다. 누군가 절 걱정해 주었다는 게.

“걱정시켜서 죄송해요.”

[아프더라도 다음부터는 내 앞에서 아파요. 내가 도와줄 수 있게. 알았죠?]

“네.”

현성은 그제야 마음이 놓이는지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카페는 어때요?”

[걱정하지 말아요. 아영 씨 없어도 잘 돌아가고 있어요. 그러니 아영 씨 몸 생각만 하세요. 아, 그렇다고 아영 씨가 없어도 된다는 말은 아니니까 오해하지 마시고요.]

현성은 혹여나 그녀가 제 말을 오해할까 봐 당황해 재빨리 덧붙였다. 아영이 푸스스 웃었다.

그녀의 웃음소리를 가만히 듣던 현성이 말했다.

[그거 알아요?]

“뭐가요?”

[아영 씨가 저한테 전화한 거 처음이에요.]

그랬었나. 생각해 보니 할 얘기 있으면 2층 사무실 전화로 했던 게 떠올랐다.

[오늘 복권 사야겠어요.]

“그런 거 관심 없으시잖아요.”

[아영 씨가 저한테 전화한 기념으로요. 혹시 알아요? 행운이 찾아올지.]

아영은 제가 뭐라고 제 전화에 아이처럼 기뻐하는 현성을 보자 쑥스러우면서도 민망했다.

[아, 이러면 다음에 부담돼서 또 전화 안 하려나.]

“그럴지도요.”

[그럼. 못 들은 거로 해 줘요. 네?]

“풋. 그럴게요.”

분위기가 가라앉지 않도록 가볍게 응수하는 현성의 말에 아영은 웃음이 나왔다.

[그런데 무슨 일이에요? 아영 씨가 나한테 전활 다 주고?]

“죽 보내 주셔서 고맙다는 말 하려고 전화했어요.”

[죽이요? 무슨 죽이요?]

“시치미 떼셔도 소용없어요. 다 알고 전화한 거니까.”

[혹시 누가 아영 씨한테 죽 보냈어요?]

현성의 시치미 떼는 연기력이 탁월했다.

“네. 그 누군가는 사장님이시겠죠.”

[미안하지만 나 아니에요.]

“네?”

아영은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아쉽네요. 아영 씨한테 점수 딸 좋은 기회였는데. 대체 누가 선수 친 거지?]

“정말 아니에요?”

[나라고 거짓말하고 싶지만, 정말 저 아니에요.]

서둘러 전화를 끊은 아영은 눈앞이 아찔했다.

그녀의 집 주소를 아는 사람은 친구 수인과 현성뿐이었다.

수인은 서울에 있기도 했고, 그녀가 아픈 줄도 모르고 있으니 패스.

남은 사람은 현성뿐인데, 그는 제집 주소가 적인 이력서를 가지고 있기도 했고, 딱 한 번 그녀가 술에 취한 날 데려다준 적이 있었다.

무엇보다 그녀가 아픈 줄 알고 있었기에 당연히 현성일 거라고 확신했다.

아영은 이 상황이 당황스러웠다.

그럼 대체 누가 죽을 보낸 걸까? 혹시 잘못 배달 온 건 아닐까?

하지만 낭패인 게 이미 네 개 중 한 개를 먹었다는 사실이다. 먹기 전에 확인이라도 하고 먹을걸.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지만 이미 먹은 뒤라 달리 방법이 없었다. 나중에 요청이 오면 그때 지급하면 되겠지…….

아영은 배가 채워지니 쏟아지기 시작한 잠 속으로 서서히 빠져들었다.

***

휴식만큼 좋은 게 없는지 아영은 전날보다 몸이 가뿐해졌다.

불과 하루 전만 해도 발에 모래주머니를 매단 것처럼 무거웠는데 약 덕분인지 아니면 죽 덕분인지 걷는 게 힘들지 않았다.

가방을 고쳐 매고 막 카페 후문으로 들어서는데 주차장과 연결된 둘레길에서 뛰어오는 태하와 마주쳤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멈춘 채 서로를 응시했다. 두 사람을 감싼 공기마저 고요했다.

그는 아침 운동이라도 하고 오는 건지 이마 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은 땀에 젖어 구불거렸고, 회색 집업 트레이닝복 밖으로 나온 구릿빛 팔뚝은 건강해 보였으며, 동양인 같지 않은 긴 다리는 무척이나 탄탄해 보였다.

그가 등지고 있는 야자수와 함께 서 있는 모습이 마치 CF 속 한 장면처럼 보였다.

‘정신 차려, 이아영. 저 모습에 넘어가면 안 돼.’

재빨리 시선을 거둔 아영이 그를 지나쳐가려는데 그가 툭 던지듯 말했다.

“죽은 잘 먹었어?”

그가 무슨 말을 하든 무시하고 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단어가 그의 입에서 튀어나오자 저도 모르게 발이 우뚝 멈춰졌다.

천천히 몸을 돌린 아영이 그를 돌아보자 짙게 가라앉은 그의 눈동자가 꿰뚫듯 응시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혹시나 하고 물었다. 제가 잘못 들었길 바라며.

“어제 너희 집으로 보낸 죽 말이야. 본인한테 직접 전달했다던데.”

순간 다리에 힘이 풀린 아영이 휘청했다.

“왜 그래?”

놀란 그가 다가오려 하자 아영은 재빨리 손을 뻗어 저지했다.

억지로 두 다리에 힘을 준 뒤 천천히 몸을 바로 세운 아영이 그를 쳐다보았다.

“그 죽, 네가 보낸 거였어?”

“그래.”

아영은 믿고 싶지 않은 현실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태하가 제집 주소를 알고 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것도 모르고 태하가 알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던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그 순간 서준의 얼굴이 떠오르자 온몸에 솜털이 쭈뼛 서고, 숨이 가빠 왔다.

“우리 집 주소는 어떻게 알고?”

아영은 진정하기 위해 숨을 고른 뒤 물었다. 하지만 말끝이 살짝 떨렸다.

“석현이한테 부탁했어. 수인이한테 물어봐 달라고.”

생각지도 못한 전개에 아영은 쓴웃음이 나왔다.

수인이한테 직접 물어보면 제가 알게 될까 봐 일부러 석현이에게 부탁했겠지.

그나마 다행인 건 그는 아직 서준의 존재를 모를 가능성이 크다는 거였다. 수인을 제외하고 서준의 존재를 비밀에 부쳐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알게 됐으니 대책을 세워야 했다.

“석현이는 잘못 없어. 화내려면 나한테 내.”

주먹 쥔 양손이 잘게 떨리는 걸 본 그가 말했다.

“왜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하는 건데? 그럼 내가 좋아할 줄 알았니?”

아영은 그가 보낸 죽인 줄도 모르고 맛있게 먹은 자신의 입을 꿰매고 싶었다.

“좋아하라고 보낸 거 아니야.”

“아니면?”

“집에 가자마자 밥도 안 먹고 잘 게 뻔해서 보냈어. 속이라도 든든하면 나을 것 같아서.”

그가 짙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말했다. 마치 진심인 것처럼.

눈가가 뜨거웠다.

‘말도 안 돼. 진심일 리 없어. 이아영, 속지 마.’

그가 자신의 입으로 말했다. 화가 풀릴 때까지 절 가지고 놀겠다고, 그러니 견디라고.

그런 말을 한 그가 저를 걱정했을 리가. 아프면 제 욕구를 풀 상대가 없으니 보낸 거겠지.

아영은 목구멍에 걸린 물기를 억지로 삼킨 뒤 입을 열었다.

“다시는 그런 짓 하지 마. 하나도 안 고마우니까.”

차갑게 돌아서는 그녀의 뒷모습을 쳐다보던 그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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