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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분 뒤에 도착한 응급실은 인산인해였다.
낮게 욕설을 내뱉은 태하는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곧이어 간호사가 뛰어와 아영을 VIP 병실로 옮겼다.
얼마 뒤 의사가 들어오더니 그에게 인사한 뒤 그녀를 살피기 시작했다.
“괜찮은 겁니까?”
“열이 높은 이유가 염증 때문인 건지, 단순 열 때문인지는 몇 가지 검사해 본 뒤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의사와 간호사가 검사를 위해 그녀가 누워 있는 침상을 끌고 이동했다.
검사실 문이 닫히자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긴 태하는 초조하게 대기실을 왔다 갔다 했다.
“저…….”
머뭇거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저와 함께 차를 타고 온 카페 여직원이 눈에 들어왔다. 온 신경을 아영에게 쏟느라 잊고 있었다.
태하는 경직되었던 표정을 풀었다.
“말씀하세요.”
“혹시 저희 매니저님과는 어떤, 사이세요?”
아영이 걱정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저와 어떤 사이인지 무척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고등학교 친굽니다.”
“그게 정말이에요?”
예상하지 못했던 말인지 카페 여직원의 눈이 놀라 휘둥그레졌다.
“못 믿겠으면 졸업 앨범이라도 보여 줄까요?”
“아, 아뇨. 매니저님이 그런 말씀 전혀 없으셔서 좀 놀랐어요.”
그랬을 거다. 이아영 성격상 절대 저와 아는 사이라는 걸 말했을 리가 없지.
마치 치부라도 되는 것처럼 숨기기에 바빴다.
그게 그의 기분을 엿 같게 만들었다. 제가 그녀의 치부인 것 같아서.
“그런데 오늘은 매니저님이 좀 이상했어요.”
“이상하다니요?”
“사실 매니저님이 쓰러지기 직전에 그쪽, 아니, 대니얼 권 씨 얘길 하고 있었거든요.”
“내 얘기를요?”
뜻밖의 말에 그의 한쪽 눈썹이 위로 들렸다.
“정확히는 저와 같이 일하는 동생하고 오늘 아침에 기사 난 스캔들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었는데…….”
“아영이도 그 기사를 본 겁니까?”
“네. 그 기사를 보자마자 얼굴이 창백해지더니 화장실로 뛰어가셨거든요.”
“……그랬군요.”
하마터면 거친 욕설이 튀어나올 뻔했다.
미세하게 남은 이성의 끈을 부여잡은 그는 가까스로 욕을 삼키며 말했다.
“검사 결과 나오려면 시간 꽤 걸릴 것 같은데 이만 가 보세요. 아영이 옆은 제가 지키겠습니다.”
“그래도 괜찮으시겠어요?”
“네. 걱정하지 마시고 가 보세요.”
“그럼 매니저님 검사 결과 나오면 제 핸드폰으로 연락 좀 주시겠어요.”
“그러죠.”
연락처를 남긴 여직원은 고맙다는 말과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
빌어먹을.
혼자 남은 태하는 거칠게 마른세수를 했다.
그날 나가지 말았어야 했다. 태하는 뒤늦게 후회했다.
캐롤라인의 끈질긴 부탁으로 ‘클럽 M.O.G’ 플래그십스토어 오프닝 행사장에 참석한 그는 포토월에서 사진 몇 장만 찍고 바로 나올 예정이었다.
그러나 하필 ‘클럽 M.O.G’ 디자이너에게 붙잡히는 바람에 애프터 파티까지 참석하게 되었다.
문제는 같이 간 캐롤라인이 술에 취하면서 벌어졌다.
한껏 기분이 좋아진 캐롤라인이 제 몸도 못 가눌 정도로 취해 버린 탓에 그냥 두고 저만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더 있겠다는 캐롤라인을 강제로 데리고 나오면서 찍힌 사진이 바로 그 장면이었다.
파파라치들이 어떻게든 이슈화시키려고 절묘한 각도로 찍어 마치 키스하는 장면처럼 찍혔지만, 실상은 술에 떡이 된 캐롤라인을 거의 질질 끌고 오다시피 했을 뿐이었다.
그 파티에 참석한 사람은 다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이 전혀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다는 것을.
그걸 대중이 전혀 모른다는 게 함정이었다.
아침에 기사를 보고 캐롤라인은 미안하다며 싹싹 빌었지만, 그의 기분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이아영은 그 기사를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병실 공기가 답답하게 느껴졌다.
***
아영의 병명은 감기와 피로 누적이었다.
태하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미련스럽게 제 몸도 살피지 않는 그녀에게 화가 났다. 그리고 자신에겐 욕설을 내뱉었다.
매일 밤, 발정 난 개처럼 그녀를 탐하지 않았다면 그녀가 쓰러지는 일은 없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 제 것을 거세하고 싶었다.
시작은 분명 복수였다. 태하는 제가 당한 만큼 저로 인해 그녀가 상처받길 바랐다.
그래서 더 지독하게 그녀를 할퀴었다. 그녀 안에 저를 억지로 새겨 넣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그녀를 안지 않으면 불안해서 잠이 오지 않았다. 언제 또 그녀가 도망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자꾸 그의 평정심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그래서 매일 밤 수면제를 찾듯 그녀를 찾았다.
해가 뉘엿뉘엿 질 때쯤 아영이 눈을 떴다.
느리게 깜빡이며 천장을 올려다보던 아영은 낯선지 눈이 커지더니 재빨리 병실 내부를 휘둘러보았다.
그러다 시선 끝에 걸린 태하를 보고 가뜩이나 큰 눈을 더 크게 떴다. 쏟아지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읏.”
본능적으로 몸을 일으키려다 링거가 꽂힌 팔이 따끔한지 신음을 흘렸다.
“그냥 누워 있어.”
“내가 왜…… 아니, 그보다 네가 왜 여기 있어?”
자신이 왜 병원에 있는지보다, 그가 왜 제 옆에 있는지가 더 궁금한 모양이었다.
“카페에서 쓰러졌어. 우연히 내가 보고 병원으로 데려온 거고.”
자신이 쓰러진 게 속상한 것인지 아니면 태하가 자신을 데리고 병원에 온 게 마음에 들지 않는 건지 아영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피로 누적에다 감기래. 며칠 푹 쉬면 괜찮아질 거라고 하니까 당분간 카페 출근하지 말고 집에서 쉬어.”
“내가 알아서 해.”
아영이 제 팔에 꽂혀 있는 주삿바늘을 잡아 뺐다.
“지금, 뭐 하는 짓이야!”
만류할 사이도 없이 벌어진 일에 태하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집에 갈 거야.”
“너 미쳤어?”
그녀가 침대 밖으로 발을 내딛자 태하가 거칠게 팔을 붙잡았다.
“더러운 손으로 만지지 마!”
“뭐? 더러워?”
아영이 있는 힘껏 뿌리치며 내뱉는 말에 순간 그의 눈빛이 매섭게 번뜩였다. 아영도 지지 않고 그를 쏘아보았다.
“말해. 내가 왜 더러운지.”
“그걸 몰라서 물어?”
아영이 가증스럽다는 듯 쳐다보자 태하의 이성이 툭 끊어졌다.
“몰라! 그러니까 사람 돌게 하지 말고 똑바로 말해!”
“읏!”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는지 아영의 앙다문 잇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러면서도 저를 죽일 듯이 노려보며 끝까지 놔달라는 말을 하지 않는 그녀 때문에 태하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이 점점 붉게 변하자 뿌리치듯 손을 놓았다.
“제기랄.”
저에게 잡힌 그녀의 손목이 벌겋게 변한 걸 본 그의 입에서 거친 욕설이 튀어나왔다.
드르륵.
때마침 소란을 들은 건지 간호사가 뛰어 들어왔다.
두 사람의 굳은 표정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한 간호사는 이내 아영을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괜찮으세요?”
“네.”
아영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그에게 잡혀 붉게 변한 팔목을 가리며 말했다.
그제야 그녀의 팔에서 주삿바늘이 빠져 있는 걸 본 간호사가 황급히 다가갔다.
“어머, 주삿바늘을 빼시면 어떻게 해요?”
“필요 없어요.”
“아니, 그래도…….”
“다시 꽂으면 또 뺄 거예요.”
단호한 그녀의 태도에 난감해진 간호사는 보호자인 그를 보며 ‘어떻게 할까요?’라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나가 계세요.”
그의 허락이 떨어지자 간호사는 병실을 나갔다.
두 사람만 남은 병실에 숨 막힐 듯한 고요한 침묵만이 감돌았다.
그 침묵이 견디기 힘들었는지 아영이 침대 아래로 발을 내렸다.
“한 걸음만 움직여 봐.”
핏기 하나 없는 얼굴로 기어코 신발에 발을 욱여넣는 아영을 강제로 눕히고 싶은 걸 참기 위해 주먹을 움켜쥔 태하가 나직하게 경고했다.
신발을 신은 아영이 침대에서 일어섰다.
“나한테 명령하지 마.”
“그럼 신경 쓰이게 하지 말든가!”
그가 씹어뱉듯 말했다.
“난 너의 인형이 아니야. 내가 가고 싶을 때 갈 거고, 쉬고 싶은 데서 쉴 거야.”
그러니 해 볼 테면 해 보라는 듯 그를 힘주어 노려보았다. 눈물이 곧 쏟아질 것처럼 멍울진 눈으로.
“하아.”
그가 머리를 거칠게 쓸어넘겼다.
아픈 그녀 앞에서 이럴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태하는 자신을 벌레 보듯 쳐다보는 아영의 눈빛을 보자 가까스로 잡고 있던 이성의 끈이 그만 끊어지고 말았다.
항상 그랬다.
다른 사람과 있을 때면 누구보다 이성적인 그였지만, 이아영과 함께 있으면 마치 자신이 일곱 살짜리 변덕쟁이가 된 기분이었다.
“그냥 오늘 하루만 병원에 있어. 제발.”
“집이 편해.”
“너 정말…….”
“혹시 병원비 계산했으면 금액 알려 줘. 부쳐 줄게.”
“하, 널 안고 뛴 사람한테 할 말이 겨우 그거야?”
“그래 달라고 한 적 없어.”
기막혀하는 그에게 아영은 제가 원한 게 아니었으니 생색내지 말라는 투로 말했다.
고맙다는 말을 들을 생각은 없었다. 바라지도 않았고.
하지만 제 얼굴은 보기 싫다는 듯 고개를 돌린 채, 어서 사라져 주길 바라는 아영의 모습을 보자 태하는 배알이 뒤틀렸다.
“그렇게 싫어?”
아영이 무슨 말이냐는 듯 빤히 쳐다보자 그가 싸늘하게 굳은 얼굴로 덧붙였다.
“나한테 고맙다고 말하는 게 그렇게 싫으냐고.”
“싫어. 그러니까 생색 내지 마.”
“왜 또 몸으로 갚으라고 할까 봐 겁나서 그래?”
“그래! 네 손이 내 몸에 닿을 때마다 끔찍하게 싫어. 그러니까 다시는 내 몸에 손대지 마.”
아영의 경멸 섞인 어조에 그의 눈빛이 매섭게 번뜩였다.
“싫다면서 내 밑에서 헐떡이는 넌 뭔데?”
“나쁜 ㅅ…….”
탁!
그녀의 손이 그의 뺨에 닿기 전 그가 붙잡았다.
“내가 나쁜 새낀 거 알면, 적당히 까불어. 참는 데도 한계가 있어.”
섬뜩하리만치 차가운 눈빛으로 일갈한 그는 그대로 병실 밖으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