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7화 (47/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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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차 빼.”

“그러니까 타.”

빵! 빵! 빠앙!

태하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자 버스 기사는 화가 났는지 하이빔을 켜며 클랙슨을 신경질적으로 눌러 댔다.

분위기가 점점 험악해지자 결국 아영은 버티지 못하고 그의 차에 올라탔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차를 출발시켰다.

그의 제멋대로 행동에 화가 머리끝까지 난 아영은 입을 꾹 다문 채 앞만 보았다.

당연히 무슨 말이든 그가 먼저 꺼낼 거라 생각했지만 그는 말없이 운전에만 집중했다.

내비게이션도 켜지 않고 아는 길을 가듯 거침없이 운전하는 그를 보자 아영은 순간 불안감이 엄습했다.

설마, 우리 집이 어디인지 알고 있는 걸까?

“지금 어디 가는 거야?”

“말했잖아. 집까지 데려다주겠다고.”

등 뒤로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우리 집, 알아?”

“몰라.”

“모른다고?”

아영은 순간 멍해졌다.

그때 3차선으로 달리던 그가 갓길에 차를 세웠다. 그러고는 비상등을 켠 뒤, 차에서 내려 건물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아영은 어리둥절했다.

잠시 후 건물 밖으로 나온 그의 손에는 봉지가 들려 있었다.

곧이어 운전석으로 돌아온 그가 들고 온 봉지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받아.”

“이게 뭔데?”

“약이야.”

아영이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자 그가 덧붙였다.

“얼굴이 희게 질려서 곧 쓰러질 것 같은데, 어디 아프냐고 물으면 대답해 줄 것 같지 않고, 내 멋대로 병원에 데려갈 수도 없어서 내 마음대로 이것저것 샀어. 그러니까 그중에서 골라 먹어.”

그의 말처럼 봉투 안에는 각종 약이 들어 있었다. 두통약, 종합 감기약, 소화제, 에너지 드링크까지.

가슴이 울렁거렸다. 목에 무언가 걸린 것처럼 침이 삼켜지지 않았다.

“참 뻔뻔하다.”

아영의 말에 그가 말없이 돌아보았다.

“지금 병 주고 약 주는 거야?”

“…….”

“이러면 내가 감동할 줄 알았어?”

내가 누구 때문에 아픈 건데.

저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하지만 빠르게 눈을 깜빡여 맺히지 않도록 했다.

“그런 거 바란 적 없어. 네가 아파 보였고, 그런 널 내버려 둘 수 없어서 사 왔을 뿐이야.”

“이제 와서 착한 척하지 마.”

그의 입에서 비소가 샜다.

“왜. 나쁜 놈이 착하게 구니까 이상해?”

아영은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게 싫으면, 미련 떨지 말고 병원부터 가. 사람 신경 쓰이게 하지 말고.”

“신경 안 쓰면 되잖아.”

“그게 내 마음대로 되는 거였으면, 진작 미국으로 돌아갔어.”

그 역시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차갑게 내뱉었다.

왠지 그 말을 듣는 순간, 아영은 저만 휘둘리는 건 아닌 것 같아 안도가 되었다. 어처구니없게도.

“집 주소 불러.”

그가 내비게이션을 켜며 말했다.

“됐어. 그냥 버스 정류장에 세워 줘.”

그녀의 대꾸에 그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 번쯤은, 내 말대로 따라 주면 안 돼? 그게 그렇게 어려워?”

그가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는 듯 씹어뱉듯 말했다.

“네 친절이 불편해.”

서준의 존재가 들킬까 봐 불안해서 그런 것인 줄은 꿈에도 모르는 그에게 아영은 사실대로 말할 수 없었다. 그러자 그의 표정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그래. 그렇게 원하면 계속 나쁜 놈이 돼 줄게.”

시동을 건 그가 액셀을 밟았다. 바닥이 긁히는 소리를 내며 차가 앞으로 튀어 나갔다.

갑작스러운 속도감을 이기지 못한 그녀의 몸이 뒤로 쏠렸다.

아영은 무릎 위에 올려놓은 가방끈을 힘주어 잡았다.

“내려.”

버스 정류장이 보이자 그 앞에 차를 세운 그가 말했다. 안전벨트를 푼 그녀가 가방을 챙긴 뒤에 차 문을 열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에 고개를 돌리는데, 화난 얼굴로 정면만 주시하고 있는 그를 보자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영이 내리자마자 그는 간다는 말도 없이 그대로 차를 출발시켰다.

빠르게 멀어지는 그의 차를 가만히 보고 있으니 잠시 잊고 있던 두통이 몰려왔다.

***

밤새 끙끙 앓은 아영은 간신히 서준을 어린이집에 데려다준 뒤, 사람 많은 버스 탈 자신이 없어 택시를 잡아탔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 그녀가 이상했는지 택시 기사가 어디 아프냐고 물었지만, 아영은 괜찮다며 눈을 감았다.

잠시 후 택시에서 내린 아영은 눈앞이 핑 돌자 두 눈을 감았다. 빙빙 돌던 세상이 차츰 돌아오고 나서야 눈을 뜬 아영은 카페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카페 문을 열고 들어가자 소희와 진영이 말씨름을 하고 있었다.

뒤늦게 그녀를 발견한 두 사람이 인사를 건넸다. 그러다 그녀의 안색이 창백한 걸 보고 소희가 한걸음에 달려왔다.

“매니저님 어디 아프세요?”

“아, 감기 기운이 좀 있어서.”

“많이 아파 보이시는데, 병원 안 가 봐도 괜찮으시겠어요?”

“안색이 창백하세요.”

소희의 말에 옆에 있던 진영도 거들었다.

“약 먹었으니 괜찮을 거야. 옷 갈아입고 올게.”

아영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스태프실로 들어갔다.

“약 가지고는 안 될 것 같은데.”

“그러게. 사장님이라도 계시면 병원에 데려다 달라고 부탁해 볼 텐데. 하필 아침 일찍 서울 가셔서.”

소희와 진영이 걱정 어린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약 기운으로 오전 시간을 버틸 수 있었던 아영은 점심 대신 스태프실에서 잠깐 눈을 붙였다.

30분쯤 자다 일어나자 그나마 떨렸던 손이 괜찮아졌다.

스태프실 문을 열고 나오자 그녀가 나온 것도 모른 채 소희와 예원은 핸드폰을 보며 이야기 삼매경이었다.

“내가 봤을 땐 이 두 사람, 보통 사이가 아닌 것 같아요.”

“각도 때문에 그래 보이는 거지. 사귀는 사이 같지는 않던데?”

“어떻게 사귀지도 않는데 남자한테 이런 식으로 안겨요?”

“술에 취했거나, 넘어지려다 안길 수도 있지.”

“에이. 그건 말이 안 되죠!”

심드렁한 예원의 반응에 소희가 흥분해 목소리가 커졌다.

그때 인기척을 느낀 예원이 고개를 돌리다 아영을 발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매니저님 나오셨어요?”

아영은 대답 대신 옅게 웃어 보였다.

“몸은 좀 어떠세요?”

“아까보다는 괜찮은 것 같아.”

“매니저님! 이것 좀 보세요.”

소희가 달려와 아영에게 제 핸드폰을 들이밀었다.

아영이 무슨 일이냐는 듯 쳐다보자 소희가 덧붙였다.

“매니저님이 보시기에 이 두 사람 어떤 사이 같으세요?”

액정 화면에는 어두운 밤 두 남녀가 껴안고 있는 사진이 기사에 실려 있었다.

자세히 보기 위해 집중하던 그녀의 시야에 사진과 같이 실린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대니얼 권 열애!

20일 오전 한 매체는 대니얼 권이 미모의 일반인과 교제 중이라고 보도했다. 친구에서 연인으로 발전한 두 사람은 오랫동안 몰래 사랑을 키워 온 것으로 밝혀졌다. 그 소문을 입증하듯 기자들을 피해 따로 입국한 두 사람이 제주도에서 밀애를 즐기는 장면이 목격됐다.」

온몸의 피가 차게 식는 기분이었다.

아영은 숨 쉬는 것도 잊은 채 사진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사진 속 남자는 멀리 찍혀 희미하긴 했지만 태하가 분명했다. 어제 그녀를 데려다준 옷차림 그대로였기에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에게 안기다시피 기대 있는 여자는 뒷모습만 찍혀 있어 누군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몸에 붙는 원피스를 완벽하게 소화할 만큼 몸매가 좋았으며, 어깨 뒤로 길게 늘어트린 빨간색 머리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보지 않아도 분명 예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만나는 여자가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가만히 있어도 여자들을 안달하게 하는 남자였으니까.

그런데 애인이 있는데도 제게 그런 짓을 했다는 게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 놓고 저를 위하는 척하며 약을 사다 주던 그의 위선적인 모습이 떠오르자 아영은 쓴 물이 올라왔다. 침과 함께 꾹 눌러 삼켜 보았지만 내려가지 못하고 다시 역류했다.

“나 잠깐, 화장실 좀.”

“매니저님 괜찮으세요?”

황급히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아영이 화장실로 뛰어갔다.

그녀의 모습에 놀란 소희와 예원이 다급히 그녀를 불렀다.

“내가 가 볼게. 너 데스크 지켜.”

“네.”

소희에게 데스크를 부탁한 예원은 화장실로 뛰어갔다.

“매니저님!”

다급히 화장실 안으로 들어간 예원은 화장실 입구에 쓰러져 있는 아영을 발견하고 소리쳤다.

서둘러 아영을 잡아 일으켜 세우려는데 온몸이 불덩이였다.

“소희야, 진영아!”

심상치 않음을 느낀 예원이 황급히 두 사람을 불렀다.

“헉! 매니저님 왜 이래요?”

그 소리를 듣고 뛰어온 소희가 바닥에 쓰러져 있는 아영을 발견하고 소리쳤다.

“몰라. 온몸이 불덩이셔. 진영이는?”

“크림 떨어져서 마트 갔어요.”

“하필. 일단 119에 신고 좀 해 줘.”

“네. 알겠어요.”

혼비백산한 얼굴로 다시 카운터로 뛰어간 소희는 119에 전화를 걸었다.

그때 카페 문을 열고 태하가 들어왔다.

“네. 여, 여보세요. 여기 예월읍에 있는 카페 ‘더 우드’인데요. 사, 사람이 쓰러졌어요. 네. 거기 맞아요. 빨리 좀 와 주세요.”

“누가 쓰러졌습니까?”

소희의 통화 내용을 엿들은 태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네. 저희 매니저님이…….”

“지금 어디 있습니까?”

울먹이는 소희 말을 자른 태하가 다급히 되물었다.

“화장…….”

소희의 말을 다 듣기도 전에 태하는 황급히 안쪽으로 뛰어갔다.

화장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아영을 본 순간 태하의 머릿속이 하얘졌다.

“이아영! 정신 차려!”

제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지 아영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태하는 그녀를 흔들어 깨웠다.

그녀의 몸이 힘없이 흔들리는 걸 본 그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카페 여직원이 무슨 말인가를 한 것 같았지만 그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서둘러 몸을 낮춘 그는 의식 없는 그녀를 안았다.

“여기서 가장 가까운 대학병원이 어딥니까?”

“신재병원이요.”

“같이 갑시다.”

“아, 네.”

그녀를 안은 태하는 주차장으로 뛰었다.

뒷좌석 차 문을 열어 그녀를 조심스럽게 눕힌 뒤 운전석에 돌아와 시동을 걸었다. 조수석에는 카페 여직원이 탔다.

그의 차는 빠른 속도로 카페를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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