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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영의 앞에 선 그가 그녀 얼굴 옆으로 손을 뻗어 벽을 짚었다.
“그런데 이 일을 어쩌나. 난 네가 다른 놈과 결혼하는 꼴은 죽어도 못 보겠는데.”
“그럼 평생, 네 옆에서 썩기를 바라는 거야?”
결혼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는 그녀였지만 저를 제멋대로 휘두르려고 하는 그가 싫어 되받아쳤다.
“그거 좋은 생각이네. 어차피 나도 결혼 생각 전혀 없거든.”
“미쳤어.”
그녀의 말에 히죽 웃던 그의 눈꼬리가 이내 차갑게 얼어붙었다.
“알아. 나도 미친 거. 그러니까 조현성과의 결혼은 포기해.”
그건 경고였고, 협박이었다.
“내가 포기 못 하겠다면?”
“그럼 알려 주는 수밖에. 네가 누구 건지.”
아영의 턱을 그러쥔 그가 그녀의 입술을 집어삼켰다.
그의 손에 의해 벌어진 입술 사이로 거침없이 들어온 그의 혀는 그녀의 입 안을 헤집었다.
한껏 벌어진 제 입 안을 제멋대로 들쑤시는 그의 혀로 인해 아영은 가는 신음을 흘렸다.
그의 손이 능숙하게 원피스를 들추자 아영은 다리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그의 힘을 이겨 내기란 역부족이었다.
순식간에 장막을 걷어낸 그는 그녀 안으로 밀고 들어가 자연스럽게 길을 열었다.
그 좁은 비포장도로를 거침없이 내달렸다.
맞닿은 서로의 살결이 격렬한 마찰을 일으키자 그녀의 헐떡임은 더더욱 거세졌다.
“똑똑히 기억해. 네가 누구 건지.”
섬뜩하리만치 차가운 얼굴로 일갈한 태하는 그녀의 얼굴을 제게 고정한 채 거칠게 파고들었다.
아영은 그가 주는 쾌감에 반응하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그녀의 모습을 가소롭다는 듯이 쳐다보던 그는 그녀를 쾌감의 끝으로 내몰았다.
까만 밤하늘이 하얗게 점멸하듯 부서지자 그녀의 눈가에 고인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띵동. 띵동.
잠결에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아직 깨어나기 싫어, 아영은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곧이어 나직이 슬리퍼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문이 열렸다.
“하이! 대니!”
다시 잠에 빠져들던 찰나, 갑자기 들리는 여자 목소리에 잠이 달아난 아영은 번쩍 눈을 떴다.
별 스티커가 붙여진 천장이 아닌 낯선 천장이 보이자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빠르게 주위를 살핀 아영은 이곳이 자신의 집이 아닌 권태하가 묵고 있는 호텔이라는 걸 깨닫고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미쳤어. 여기서 잠들면 어쩌자고.’
서둘러 침대에서 내려와 방바닥에 아무렇게나 흐트러져 있는 자신의 옷가지들을 줍는데, 그의 목소리가 들리자 숨을 죽였다.
“네가 여긴 웬일이야?”
“대니가 안 오니까 내가 오는 수밖에.”
저 목소리 어디서 들었지?
아영은 어딘가 익숙한 음성에 두 눈을 빠르게 깜박였다.
“돌아가.”
“대니 보러 여기까지 왔는데 돌아가라니 너무한 거 아니야?”
“오라고 한 적 없어.”
퉁퉁거리는 여자의 말에도 태하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치사해. 촬영 끝났대서 심심할까 봐 같이 놀아 주려고 왔는데. 이렇게 문전박대 당할 거였으면 오지 말 걸 그랬어.”
“1층 카페에 가 있어. 곧 내려갈 테니까.”
태하는 너무했나 싶었는지 말투가 조금 누그러졌다.
“굳이 1층까지 내려갈 필요 있어?”
“내려가.”
“알았어. 간다, 가.”
단호한 태하의 거절에 여자는 씩씩거리며 돌아섰다.
문을 닫고 돌아서자 그사이 옷을 입은 아영이 침실에서 나왔다. 그녀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그의 한쪽 눈썹이 삐딱하게 올라갔다.
“벌써 가려고?”
“손님 온 것 같아서.”
딱딱한 그녀의 말투에 그의 시선이 깊어졌다.
“왜. 신경 쓰여?”
“아니.”
그가 제 얼굴을 살피는 게 느껴진 아영은 마음과는 다른 대답을 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그의 입술이 피식 기울어졌다.
사실은 신경이 쓰였다. 그것도 무척이나.
그의 방까지 찾아온 여자가 누구인지, 그와 무슨 사이인지 묻고 싶었다. 하지만 제 마음이 드러날까 봐 아영은 물을 수가 없었다.
“저녁 먹고 가.”
“사람 기다리잖아. 먼저 갈게.”
그를 지나쳐 현관으로 걸어가는데 태하가 그녀의 팔목을 붙잡았다.
“같이 가. 데려다줄게.”
“됐어. 혼자 가는 게 편해.”
제 팔을 붙잡길래 가지 말라는 줄 알았던 아영은 데려다준다는 그의 말에 저도 모르게 울컥 짜증이 났다.
안도해야 마땅한데, 아무래도 질투에 정신이 나갔나 보다.
“갈게.”
문을 열고 나갔다. 오늘따라 혼자 걷는 복도가 길게 느껴졌다.
***
카페 앞마당에 떨어져 있는 낙엽을 쓸던 진영이 허겁지겁 안으로 들어왔다.
“대박! 대박!”
“왜, 무슨 일인데 그래?”
소독약을 뿌린 뒤 테이블을 닦던 소희가 뛰어 들어오는 진영을 보고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방금 대니얼 권 봤어!”
“뭐? 여기서?”
“어. 방금 주차장에 주차하고 게스트하우스로 올라갔어.”
“카페가 아니라 게스트하우스로 갔다고?”
“어.”
소희가 이해할 수 없다는 시선으로 되묻자 진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대니얼이 우리 게스트하우스에 묵으려는 건 아닐 테고. 대체 무슨 일이지?”
“묵을 수도 있지.”
“야, 말이 되냐? 펜트하우스에서 지내던 사람이 우리 게스트하우스에서 지낸다는 게?”
“말이 안 될 건 뭐야. 제주도 정취를 물씬 느끼고 싶어서 그런지도 모르지.”
“정말 그럴까?”
진영의 말에 소희의 눈이 가늘어졌다.
때마침 들어온 손님 때문에 두 사람의 수다는 멈췄다.
그들의 말을 뒤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아영은 가슴이 철렁했다.
그가 여기에 왔다고?
어제까지 아무 말이 없던 그였다. 그런데 갑자기 게스트하우스엔 무슨 일로 찾아온 걸까?
설마, 현성에게 저와의 관계를 털어놓으려는 건 아니겠지?
어제 태하는 무서울 정도로 아영에게 집착했다. 몇 번을 그의 밑에서 까무러친 다음에야 그녀를 놓아주었다.
그런 그가 쿨하게 보내 주길래 아영은 호텔로 찾아온 여자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불쑥 불안감이 엄습했다.
아영은 예원에게 주문을 부탁하고 뒷문을 통해 서둘러 2층으로 향했다.
뛰다시피 2층에 도착하자 데스크 앞에 서 있는 현성과 그가 보였다.
“방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때 인기척을 느낀 현성이 고개를 돌렸다.
“아영 씨, 무슨 일이에요?”
“아, 그게…….”
제가 부르지 않는 한 2층으로 올라온 적이 없는 아영의 등장에 현성이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앞뒤 가리지 않고 뛰어온 터라 아영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고 있는데 태하가 돌아보았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아영은 눈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그의 얼굴에 희미한 웃음이 서렸다.
“설마 내가 온 거 알고 반가워서 뛰어온 건 아닐 테고…….”
“여긴 어쩐 일이야.”
“당분간 여기서 지내려고.”
그의 말을 자른 아영이 물었다. 그러자 그가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뭐?”
“호텔에서 지내는 게 지겨워서.”
그의 이유 같지 않은 이유에 아영은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사장님, 죄송하지만 자리 좀 비켜 주실 수 있으세요?”
“그, 그래요.”
둘 사이에 흐르는 묘한 분위기에 끼어들지도 못하고 눈치만 보던 현성은 아영이 정중히 부탁하자 내키지 않았지만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대체 무슨 속셈이야?”
“속셈 같은 거 없어.”
“없다는 사람이 하필 내가 일하는 이곳에 숙소를 잡았다는 게 말이 돼?”
“왜, 걱정돼? 조현성에게 우리 사이 들킬까 봐?”
“사장님께 우리 사이 말하면 가만 안 둬.”
걱정되는 건 사실이었다. 서준의 아빠가 누군지 궁금해하던 현성이었으니까.
분명 그와 저 사이를 알게 되면 그가 서준의 아빠인 걸 눈치챌 게 뻔했다. 놀라울 정도로 서준은 그를 닮았다.
“네가 발끈하니까 더 말하고 싶어지는데.”
“권태하.”
“그러니까 자극하지 마. 까발리고 싶은 거 참고 있으니까.”
태하가 올라가는 버튼을 누르자 멈춰 있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그가 캐리어와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더 할 얘기 있으면 타든지.”
그녀가 꼼짝도 하지 않자 그는 히죽 웃더니 이내 버튼을 눌렀다.
마주 보던 두 사람 사이로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순간 그녀의 다리가 휘청거렸다.
그와 한 건물에 있다고 생각하자 아영은 정신을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컵을 두 개나 깨트렸고, 잘못 받은 주문 때문에 세 번이나 다시 만들어야 했다.
“매니저님, 그만 들어가세요. 남은 시간은 제가 알아서 할게요.”
평소 안 하던 실수가 잦자 옆에 있던 예원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미안. 남은 시간은 나중에 보충할게.”
남에게 신세 지는 걸 병적으로 싫어하던 그녀였지만 오늘만큼은 제가 있는 게 더 폐가 되는 것 같아 염치없이 받아들였다.
“그런 소리 마세요. 저 알바 늦을 때마다 한 번도 혼낸 적 없으시잖아요.”
“고마워.”
아영은 소희와 진영에게 인사한 뒤 스태프실로 들어갔다.
옷을 갈아입기 위해 로커를 여는데 종일 신경 썼더니 머리가 띵 하고 울렸다. 아영은 눈을 감은 채 두통이 사라지길 기다렸다.
잠시 후 사복으로 갈아입은 아영은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서 있을 힘이 없어 의자에 앉아 버스를 기다리는데 검은색 세단이 그녀 앞에 멈춰 섰다. 곧이어 두통의 원인 제공자의 얼굴이 보였다.
“타.”
“오늘은 피곤해.”
“걱정하지 마. 약속 있어서 그러고 싶어도 못 해. 집까지 데려다만 주고 갈 거야.”
그러고 보니 가벼운 옷차림이던 아까와 달리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완벽하게 세팅된 모습이었다.
촬영은 끝났다고 들었는데 누구와 약속이 있는 걸까?
설마 어제 호텔로 찾아온 그 여자와 만나기로 한 걸까?
무언가 그녀의 가슴을 할퀴고 지나갔다.
“됐어.”
“내가 내려서 태워 줘야 탈래?”
퉁명스러운 그녀의 거절에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러기만 해.”
발끈한 아영이 쏘아보자 그가 피식 웃었다. 그때 그의 차 뒤로 버스가 다가오는 게 보였다.
빠앙.
정류장에 세워진 그의 차를 발견한 버스는 비켜 달라는 듯 클랙슨을 울렸다.
시끄러운 경적에도 태하는 그녀가 타기 전까지는 비킬 생각이 없다는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