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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폰 돌려주는 대신 조건이 있어.”
“말해.”
애태우는 듯한 그의 행동에 아영은 짜증이 치밀었지만 꾹 눌러 삼켰다. 그를 자극해 봤자 좋을 게 없었으므로.
“내 연락 피하지 마.”
그의 말에 아영은 속으로 뜨끔했다. 당연히 받지 않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사실대로 말하면 돌려주지 않을 게 뻔해 거짓말을 했다.
“알았어.”
그녀의 대답을 들은 뒤에야 그가 다시 핸드폰을 내밀었다.
아영은 그의 마음이 변할까 봐 재빨리 그의 손에서 핸드폰을 가져왔다.
“부재중으로 넘어가면 카페에서 날 보게 될 거야.”
그는 제 전화를 피하면 카페로 찾아가겠다는 협박을 태연하게 덧붙였다.
이제 한고비 넘겼다고 안심하던 아영은 또 다른 산이 나타나자 아득해졌다.
“아, 그리고 이번 주 토요일에 시간 비워 둬.”
“그날 약속 있어.”
“취소해.”
누구와의 약속인지 묻지도 않고 대뜸 취소하라는 그의 말에 아영은 어이가 없었다.
“취소할 수 없는 약속이야.”
“대체 무슨 약속인데?”
그날은 현성의 부모님을 만나기로 한 날이었다. 그동안 많은 도움을 받았던 아영은 내키지 않았지만 간곡한 현성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이런 사실을 그가 알면 어떻게 나올지 몰라 아영은 말하지 않기로 했다.
“내가 그것까지 말해야 해?”
그녀가 선뜻 대답하지 않자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먼저 갈게.”
여기서 더 있다가는 그에게 잡혀 사실대로 털어놓게 될까 봐 아영은 도망치듯 룸을 빠져나왔다.
그녀의 뒷모습을 쳐다보던 태하의 눈빛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
현성이 약속을 잡은 한정식집은 3층 높이로 지은 한옥이었다.
넓은 주차장 주변에 담벼락 대신 감귤 나무를 심어 제주도의 정취가 물씬 풍겼다.
아영이 식당 입구로 들어서자 개량 한복을 입은 직원이 예약했는지 물었다. 아영이 이름을 대자 예약자 명단에서 현성의 이름을 찾은 직원은 그녀를 305호 문 앞으로 데려갔다.
격자무늬가 새겨진 문을 옆으로 밀자 현성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아영 씨, 왔어요?”
아영을 발견한 현성이 반색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영이 작게 묵례하며 안으로 들어가자 등 뒤로 문이 닫혔다.
“혼자 오셨어요?”
“네?”
당연히 부모님과 함께 있을 줄 알았던 현성이 혼자 있자 아영이 주위를 둘러보며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그러자 현성이 멍한 얼굴로 되물었다.
“부모님과 같이 오신다고…….”
“아, 그게 원래는 같이 오려고 했는데, 안개 때문에 비행기가 연착돼서 예정 시간보다 늦게 도착하셨어요. 30분 전에 공항에서 출발하셨다니까 15분 후면 도착하실 것 같아요.”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녀의 말에 뒤늦게 정신이 돌아온 현성은 재빨리 상황을 설명했다.
그제야 어떻게 된 상황인지 이해한 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배고프면 차라도 마시고 있을까요? 여기 대추차 좋은데.”
“아니요. 괜찮아요.”
그렇게 대답한 아영은 입고 온 재킷을 벗어 옆 의자에 얌전해 개켜 놓았다.
맞은편에 앉은 현성은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혹시, 이 옷 이상해요?”
“아, 아니요.”
현성의 시선이 제게서 떨어지지 않자 아영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넋 놓고 그녀를 쳐다보던 현성은 당황해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행이네요.”
“뭐가요?”
“계속 쳐다보시길래 이상한 줄 알고 내심 걱정했거든요.”
“이상하긴요. 너무 예뻐서…… 아니, 너무 잘 어울려서 쳐다본 겁니다.”
느닷없는 현성의 칭찬에 당황한 아영은 겸연쩍은 미소를 지었다.
얼떨결이 속마음이 나와 버린 현성은 목이 타는지 제 앞에 놓인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저 손 좀 씻고 올게요.”
아영은 두 사람 사이에 흐른 어색한 공기를 피해 밖으로 나왔다.
화장실로 향하던 아영은 맞은편 복도에서 걸어오는 태하와 눈이 마주치자 놀라 걸음을 우뚝 멈췄다.
그 역시 아영과 이곳에서 마주칠 줄 예상하지 못했는지 그녀를 쳐다보는 눈빛에 의아함이 서려 있었다.
아영은 그대로 몸을 돌려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이곳에서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다는 걸 떠올린 그녀는 그 충동을 꾹 억눌렀다.
“놀랍군.”
그가 그녀의 모습을 위아래로 느리게 훑은 뒤에야 툭 던지듯 말했다.
하필. 여기서 만날 줄이야.
난처해진 아영은 제 입 속 살을 지그시 짓씹었다.
“취소할 수 없는 약속을 한 곳이 여기였어?”
그때 그녀가 했던 말이 거슬렸는지 그가 그대로 비꼬며 물었다. 아영은 떨어지지 않는 입을 가까스로 열었다.
“여긴, 어쩐 일이야.”
“여기 음식 맛이 괜찮다고 해서. 그러는 넌?”
“나도. 그럼 잘 먹고 가.”
누구와 왔냐는 말인 줄 뻔히 알면서도 아영은 제 할 말만 내뱉고 돌아섰다.
그러자 태하가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녀의 몸이 휘청이며 그에게 돌려졌다.
“무, 무슨 짓이야?”
“누가 너 잡아먹어? 왜 도망가.”
당황한 아영은 재빨리 주위를 살피며 작은 목소리로 소리쳤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지만 언제 어디서 사람들이 튀어나올지 몰라 아영은 불안한 시선을 던졌다.
하지만 태하는 아랑곳하지 않고 사납게 물었다.
“도망가는 게 아니라, 화장실 가는 거야.”
아영이 그의 손에 잡힌 손목을 빼내기 위해 팔을 비틀었지만, 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되레 더 아프게 조일 뿐이었다.
“이 손 놔. 누가 보기라도 하면…….”
“왜, 누가 보면 안 되는데?”
아영이 또다시 입을 다물자 그의 입가가 차갑게 비틀렸다.
“끝나면 전화해. 기다릴 테니까.”
“언제 끝날지 몰라. 기다리지 마.”
순간 그의 눈빛이 매섭게 번뜩였다.
“네가 있는 방으로 쳐들어가기 전에, 나오는 게 좋을 거야.”
아영은 현성의 부모님과 함께 있는 룸에 그가 쳐들어오는 장면이 상상되자 눈앞이 아찔했다.
그때 복도 끝에서 사람들 소리가 들려왔다.
당황한 아영은 그에게 잡힌 손목을 황급히 잡아 뺐다. 다행히 그는 그녀의 손목을 순순히 놓아주었다.
아영은 빠른 걸음으로 그를 지나쳐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잠그고 들어간 아영은 터질 듯 빠르게 뛰는 심장을 지그시 눌렀다. 등 뒤로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 뒤 어떻게 현성의 부모님을 맞이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녀의 모든 신경은 이 식당 어딘가에 있을 태하에게 쏠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기억나는 거라곤 현성의 어머님이 제 두 손을 마주 잡으며 했던 “우리 현성이 잘 부탁해요.”라는 말뿐이었다.
식사가 끝이 나자 현성의 부모님은 둘이서 좋은 시간 보내고 오라며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제야 그녀의 얼굴에서 긴장감이 사라졌다.
“고생 많았어요. 아영 씨.”
“아니에요.”
“솔직히 좀, 놀랐어요.”
아영이 의아한 시선으로 쳐다보자 현성이 덧붙였다.
“저희 부모님이 이렇게까지 아영 씨를 좋아하실 줄 몰랐거든요.”
아영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어색한 미소로 답했다.
“아, 오해하지 마세요. 당연히 좋아하실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더 많이 좋아하셨다는 말이었어요.”
“오해 안 해요.”
그녀의 말에 마음이 놓이는지 현성이 씩 웃었다. 사람을 편하게 하는 미소에 아영도 덩달아 미소가 지어졌다.
“아영 씨, 어디 가고 싶은 곳 있어요? 아영 씨와 데이트하라고 어머니가 용돈 주셨거든요.”
“용돈을요?”
돈이라면 펑펑 쓰고도 남을 만큼 많은 현성에게 용돈을 주었다는 말에 아영은 어리둥절했다.
“가끔 주세요. 명절이나 생일 때를 제외하고 주시는 건 오늘이 처음이지만.”
그때 들고 있던 그녀의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액정 화면을 들여다보던 그녀의 얼굴이 굳어졌다.
「적당히 하고 헤어져.」
태하였다.
어디서 저를 보고 있는 듯한 그의 문자에 고개를 든 아영은 빠르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익숙한 차가 보이자 시선이 멈춰졌다.
선팅이 짙게 되어 누가 있는지 보이진 않았지만, 그 차에 그가 있는 게 확실했다. 온몸의 신경이 곤두섰다.
“저, 오늘은 그만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왜요?”
“그게…….”
마땅한 핑계가 떠오르지 않아 아영이 머뭇거리자 현성이 덧붙였다.
“혹시 서준이 때문에 그래요?”
아영은 현성이 오해하도록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미안해요. 들떠서 잠시 서준이를 잊고 있었네요. 타요. 집까지 데려다줄게요.”
현성이 조수석 차 문을 열며 말했다.
“아니에요. 여기서 집까지 한 번에 가는 버스 있어요. 그거 타고 가면 돼요.”
“나 때문에 고생했는데 어떻게 그래요. 타요.”
“정말, 정말 괜찮아요.”
“그래요. 그럼. 내일 카페에서 봐요.”
그녀의 거듭된 거절에 현성은 잠시 서운한 기색을 비쳤지만 이내 웃으며 말했다.
“안녕히 가세요.”
현성이 손을 흔들며 주차장을 빠져나가자 그제야 아영은 긴장된 숨을 몰아쉬었다.
그때 그녀 옆으로 검은색 세단이 끽 소리를 내며 멈춰 섰다.
깜짝 놀란 아영이 흠칫 뒤로 물러나자 조수석 창문이 내려갔다. 운전석에 앉은 그와 눈이 마주쳤다.
“타.”
그의 살벌한 눈빛을 마주하자 거절의 말이 나오지 않았다.
주위를 살핀 아영이 조수석에 올라타자마자 그의 차는 거친 굉음을 내며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주차장 바닥에 짙은 스키드마크가 따라붙었다.
차가 도심을 빠져나오자 아영은 속도 좀 줄이라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얼마나 힘을 준 건지 핸들을 쥔 손 마디마디가 툭툭 불거져 있는 걸 보고 입을 다물었다.
호텔로 돌아온 그는 매고 있던 넥타이를 거칠게 풀어 헤쳤다.
“기분 진짜 엿 같네.”
뒤따라온 아영은 조용히 섰다.
“나한테 말 안 한 이유가 뭐야? 조현성 부모님 만나는 거 알면, 내가 깽판 칠까 봐 겁났어? 그래서 말 안 한 거야?”
“너와 상관없는 일이라서 말 안 했을 뿐이야.”
“뭐? 나와 상관없다고?”
코웃음을 치던 그의 눈빛이 이내 매섭게 돌변했다.
“이아영, 보기보다 영악하네. 몸은 나와 섞고 결혼은 다른 놈과 할 생각이었던 거야?”
그가 조금씩 거리를 좁혀 오자 아영은 뒤로 주춤 물러났다. 하지만 얼마 못 가 벽에 부딪혀 더는 물러날 곳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