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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러지 마.”
아영은 손을 빼내려 했지만, 그는 꼼작도 하지 않았다.
아영의 헛된 노력을 그가 가소롭다는 듯 쳐다보았다.
“아직 시작도 안 했어.”
“이러려고 온 거 아니야. 얘기 좀 해.”
“얘기는 나중에. 누구 때문에 한 시간이나 기다리는 바람에 내 인내심이 바닥났거든.”
그의 은밀한 손길이 닿자 밤새 예민해진 살갗이 파르르 떨렸다.
“나만 그런 게 아닌 것 같은데?”
더운 열기가 훅 끼치자 그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착각하지 마. 너 때문에 그런 거 아니야.”
“그래?”
아영이 창피함에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이를 악물며 말했다.
그러자 그의 눈빛이 위험하게 번뜩이더니 그대로 그녀의 몸을 돌려 양손을 문 위로 잡아 고정했다.
“뭐, 뭐 하는 거야!”
“뭐 하긴. 나 말고 다른 손 탔는지 확인해야지.”
스커트 자락이 허리 위로 걷히자 둥글게 솟은 그녀의 엉덩이가 나타났다.
태하는 여유롭게 그녀를 몸으로 누른 뒤 자신의 가운 끈을 찾아 풀었다.
벌어진 가운 사이로 군살 하나 없는 그의 전라가 드러났다.
등 뒤로 그의 단단한 몸이 느껴지자 그녀의 피부가 일제히 곤두섰다.
“권태하 안…… 헉!”
위험을 감지한 아영이 다급히 사실을 실토하려 했지만,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뜨거운 불길이 솟구쳤다.
델 듯 홧홧한 열기가 살결을 쓸자, 그녀는 다급히 숨을 들이켰다.
하지만 숨 돌릴 틈도 없이 거센 소용돌이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온몸을 태울 듯한 열기가 그녀 내부를 가득 채웠다. 그러나 그는 부족하다는 듯 더더욱 열기를 발산했다.
그의 폭발적인 움직임에 그녀의 가녀린 몸이 종잇장처럼 위태롭게 흔들렸다.
결국, 버티지 못한 그녀의 무릎이 풀썩 꺾였다.
바닥에 주저앉기 직전 재빨리 그녀를 낚아챈 태하는 아무래도 걷는 건 무리라고 생각했는지 번쩍 안아 올리고는 침실로 향했다.
아영은 그의 품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모든 기가 빨린 것처럼 그를 밀어낼 힘조차 없었다.
“나 하나 감당도 못 하면서 더는 자극하지 마. 다음번에는 절대 멈추지 않을 거니까.”
그녀를 눕힌 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태하가 차갑게 내뱉고는 그대로 몸을 돌려 욕실로 사라졌다. 문밖으로 물소리가 들렸다.
침실에 혼자 남은 아영은 창피해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괜한 치기로 그를 자극하는 바람에 결국 이 모양이 되고 말았다.
이대로 가 버릴까?
아영은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의 성격상 말없이 갔다는 걸 알면 가만히 있지 않을 거다. 그가 제주도를 떠날 때까지 그를 자극해선 안 된다.
태하가 욕실에서 나온 건 한참 뒤였다.
아까와 다른 가운으로 바꿔 입은 그는 모든 기력이 소진된 그녀와 달리 여전히 혈기 왕성해 보였다.
태하는 그녀를 지나쳐 냉장고에서 캔맥주를 꺼냈다. 그러고는 갈증이 나는지 단숨에 절반을 비웠다.
그러는 동안 침대 모서리에 앉아 말할 타이밍을 기다리던 아영이 막 입을 떼려는 순간 벨이 울렸다.
누구 올 사람이 있었던 걸까?
아영이 의아해하고 있을 때 그가 말없이 문 쪽으로 걸어갔다.
“시, 식사 가져왔습니다.”
가운 차림을 한 그가 문을 열자 호텔 여직원은 심장이라도 멎은 듯 얼어붙었다. 그러다 이내 정신을 차린 듯 목을 가다듬은 뒤 자신이 온 이유를 밝혔다.
“실례하겠습니다.”
“괜찮습니다. 제가 하죠.”
“아, 네. 알겠습니다.”
직원이 트레이를 밀어 안으로 들어오려고 하자 태하가 저지했다. 그러자 여직원의 얼굴에 실망의 빛이 서렸다.
태하는 고맙다는 인사를 한 뒤 문을 닫았다.
“앉아.”
트레이를 밀고 들어온 그가 식탁에 음식을 세팅하며 말했다.
아영은 입맛이 전혀 없었지만, 그와 대화를 하기 위해 일단 식탁에 앉았다.
구운 아스파라거스와 단호박을 곁들인 안심 스테이크, 해산물을 곁들인 바닷가재 스파게티, 낙지 봉골레 파스타, 구운 연어와 다양한 채소가 들어가 있는 샐러드와 와인까지. 온갖 음식이 가득했다.
“이게 다 뭐야?”
“저녁 안 먹었을 거 아니야.”
그가 스테이크를 썰자 도톰한 스테이크에서 육즙이 흘러나왔다.
“먹어.”
먹기 좋게 썬 스테이크를 그녀 앞에 놓으며 말했다.
“생각 없어.”
“먹는 게 좋을 거야. 밤새 날 버티려면.”
아영이 경악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하지만 태하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스테이크 조각을 입 안에 넣고는 맛을 음미라도 하듯이 천천히 씹을 뿐이었다.
“언제까지 이럴 작정이야.”
“글쎄. 나도 생각 중이야.”
“이틀 뒤면 촬영 끝난다고 들었어.”
“그래서?”
그의 한쪽 눈썹이 삐딱하게 올라갔다.
“네가 원하는 게 내 몸이라면…… 줄게.”
스테이크를 씹던 그의 입이 멈췄다. 아영은 숨을 크게 몰아쉰 뒤 이내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대신, 이번이 마지막이었으면 해.”
그는 입맛이 떨어졌는지 들고 있던 포크를 내려놓고는 금박 로고가 새겨진 새하얀 냅킨을 들어 입을 닦았다.
“고작 이틀 가지고 지난 5년 동안 쌓여 있던 너에 대한 원망이 풀릴 거라고 생각해? 정말 뻔뻔하다.”
“무릎 꿇고 사과라도 하길 바란다면 할게. 그러니까 그만 날 놔줘.”
“누구보다 자존심 강한 네가 무릎을 꿇겠다고? 놀랍네.”
그가 비소를 날렸다. 아영은 할 말이 없었다. 그의 말처럼 자존심 하나로 지금껏 버텨 온 그녀였으니까.
“그렇게까지 하려는 이유가 뭐야?”
“이유 같은 거 없어. 단지 용서를 빌고 싶었을 뿐이야.”
그의 집요한 시선을 피해 제 앞에 놓인 와인을 들이켠 아영은 생각보다 독한 와인에 놀라 기침이 터졌다.
콜록. 콜록.
“여전하네. 거짓말 서툰 거.”
그 모습을 빤히 쳐다보던 그가 물을 들이켜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그녀 앞으로 다가가 기침하고 있는 그녀를 일으켜 세운 뒤 그대로 입술을 삼켰다.
갑작스러운 그의 키스에 놀란 그녀가 입술을 앙다문 채 버둥거렸다. 하지만 태하는 능숙하게 그녀의 턱을 당겨 입술을 벌리게 한 뒤 제가 머금고 있던 물을 밀어 넣었다.
갑자기 들이닥치는 물에 당황했지만, 아영은 이내 본능적으로 삼켰다.
꿀꺽. 꿀꺽.
그녀가 물을 다 삼키자 그의 입술이 떨어져 나갔다.
그제야 정신이 든 아영은 그의 가슴을 확 밀쳤다.
“이,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아영이 손으로 입을 가리며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소리쳤다.
“사레 걸렸을 땐 물이 최고지.”
그가 제 입가에 흘러내린 물을 엄지손가락으로 쓸며 태연하게 말했다. 그러고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앉아. 음식 식으면 맛없으니까.”
“이런 상황에서 음식이 넘어갈 것 같아?”
“내가 먹여 줘?”
“뭐?”
그녀가 기가 막힌 얼굴로 쏘아붙였다.
“그게 싫으면 앉아서 먹어.”
“말했잖아. 먹기 싫…….”
“다 먹을 때까지 여기서 한 발자국도 못 나가. 그러니 나가고 싶으면 먹는 게 좋을 거야.”
“…….”
“뭐, 나랑 침대에서 밤새 뒹굴고 싶으면 안 먹어도 상관없어.”
태하의 반협박에 아영은 그를 있는 힘껏 노려보았지만, 그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달리 방법이 없었다. 이곳을 나가려면 그의 말을 따를 수밖에.
억지로 포크를 든 아영은 육즙이 새어 나온 스테이크 조각을 제 입으로 가져갔다.
몇 번 씹지도 않았는데 부드럽게 입 안으로 넘어가자 그녀의 눈썹이 위로 들렸다. 없던 식욕이 생길 만큼 맛이 좋았다.
그 뒤 아영은 그가 재촉하지 않아도 열심히 입으로 가져갔다.
그녀가 먹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그의 입가에 설핏 미소 같은 게 피었다가 빠르게 사라졌다.
잠시 후 식사가 끝나자 태하는 손수 내린 커피를 그녀 앞에 내려놓았다. 향긋한 커피 향이 후각을 자극했다.
제멋대로 굴 때는 언제고 또 한없이 다정하게 구는 그를 볼 때마다 아영은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몰라 혼란스러웠다.
“촬영 끝나면 당분간 여기서 머물 예정이야.”
그가 들고 있던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툭 던졌다.
예상치 못했던 그의 말에 그녀의 두 눈이 놀라 커졌다.
“얼마나?”
“글쎄. 생각 중이야. 한 달이 될지, 반년이 될지. 천천히 쉬면서 생각해 보려고.”
아영에게 지난 며칠은 1년 같았다. 하루하루가 줄타기하는 것처럼 아슬아슬해 심장이 쪼그라드는 것 같았다.
그런데 더 머물겠다니, 아영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지금껏 운이 좋아 서준의 존재를 들키지 않았지만, 좁은 제주도에서 언제까지 피할 수 있을까?
이미 제가 일하는 카페까지 알고 있는 마당에 그에게 들키는 건 시간문제였다.
“여기서 머무는 이유, 나 때문이야?”
“다는 아니지만, 절반은 너 때문인 거 맞아. 복수할 기회를 이대로 놓치긴 아쉽더라고.”
차가운 그의 눈동자가 그녀의 시선을 옭아맸다. 벗어날 수 없는 그의 시선에 아영은 숨을 쉬기가 갑갑했다.
“내가 어떡하면…… 떠나 줄래.”
그의 눈빛이 일순 사납게 번뜩이더니 입꼬리가 비릿하게 올라갔다.
“왜 그렇게 날 못 보내서 안달이지? 혹시 나한테 숨기는 거라도 있어? 그래서 하루라도 빨리 내가 사라져 주길 바라는 거야?”
심장이 덜컹했다. 순간 온몸의 피가 빠져나가는 것처럼 아찔해진 아영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다 동요하는 제 모습을 들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서둘러 눈을 떴지만 이미 그의 시선은 못 박힌 듯 그녀를 향해 있었다.
“없어. 그런 거.”
입술 끝이 떨려 오자 아영은 힘주어 말했다.
“없으면 내가 언제 가든 네가 신경 쓸 거 없잖아. 안 그래?”
“불편해.”
“불편해도 참아. 난 이보다 더한 것도 참았으니까.”
시리게 차가운 눈으로 내뱉은 그의 말에 할 말을 잃은 아영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이 견디기 힘들 때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핸드폰을 가져왔다.
그의 손에 들린 핸드폰을 발견한 아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르륵. 강제로 밀린 의자 다리가 대리석 바닥을 긁는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워, 진정해.”
거슬리는 소리에 그가 미간을 좁혔다.
핸드폰을 보자마자 마음이 다급해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행동이었다.
이런 제 행동이 그의 의심을 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아영은 조바심 나는 마음을 감추며 그를 마주 보았다. 할 말이 있으면 하라는 듯이.
그제야 좁혀졌던 미간을 편 그가 핸드폰을 내밀었다. 아영이 손을 뻗어 가져가려 하자 그가 핸드폰을 들어 올렸다.
“핸드폰 돌려주는 대신 조건이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