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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트로 몸을 가린 채 침대에서 내려온 아영은 옷을 찾아 침실을 빠져나갔다.
그가 붙잡을까 봐 내심 걱정했던 아영은 안도했다.
거실로 나오자 그녀의 옷은 세탁된 상태로 테이블에 얌전히 개켜져 있었다.
그녀가 막 옷을 집어 올리려던 순간 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서 나가면 휴대폰은 영원히 못 받게 될 거야.”
그녀가 돌아보자 침실 문에 비스듬히 기댄 채 서 있는 태하가 보였다. 여유로운 모습과 달리 그녀를 향해 내뱉은 말은 살벌한 경고였다.
“대체 나한테 원하는 게 뭐야?”
“말했잖아. 다시 하자고.”
태하는 알면서 왜 묻냐는 뉘앙스로 답했다.
“나 괴롭히고 싶어서 일부러 이러는 거잖아, 너.”
“맞아. 네가 나 때문에 괴로웠으면 좋겠어. 내가 그랬던 것처럼.”
그가 순순히 인정하자 그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나도 편했던 것만은 아니야.”
“그랬겠지. 적어도 양심이란 게 있다면. 네가 딸랑 편지 한 장 남기고 떠났을 때 내 기분이 얼마나 엿 같았는지 알아?”
태하는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는지 주먹을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때 나한테 안 잡힌 걸 다행이라고 생각해. 만약 내 손에 붙잡혔다면 아마 넌 온전하지 못했을 테니까.”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그의 매서운 눈빛이 섬뜩하게 빛났다.
“이별의 방법이 잘못됐다는 거 인정해. 그 부분은 사과할게. 하지만 그럴 만한…….”
“변명 따윈 집어치워!”
그가 서슬 퍼런 눈빛으로 씹어뱉듯 말했다.
“넌 그냥 내 화가 풀릴 때까지 날 받아 내. 네 몸으로.”
그가 잔인하게 웃었다. 아영의 얼굴이 희게 질려 갔다.
***
“내일 저녁 7시까지 호텔로 와.”
“안 가.”
“아니면 내가 집으로 가?”
“오기만 해.”
“왜, 집에 금송아지라도 숨겨 놨어?”
“만약 내 허락 없이 집까지 찾아오면 그땐 뒤도 안 보고 도망가 버릴 거야.”
“훗. 어디 한번 가 봐. 대신 이번에 잡히면 그때는 네 다리를 분질러서라도 평생 내 옆에서 후회하게 해 줄 테니까.”
그와의 대화가 떠오르자 아영은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하지만 두통의 원인이 해결되지 않아서인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5년 전 그는 최소한 주위 사람들을 의식해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그러나 지금 그는 누가 쳐다보든 말든 전혀 상관하지 않고 거침없이 행동했다.
그래서 두려웠고, 위험했다.
어쩌지. 사는 곳을 알아내기 전에 다른 곳으로 이사라도 가야 할까?
그러지 않고서는 그의 손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이제 막 친구들과 노는 재미를 알게 된 서준에게 또다시 친구들과 헤어져야 한다는 말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하아.
답답한 마음에 자꾸만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이번에 내리실 곳은 광령리입니다.”
버스 안내 방송에 퍼뜩 정신이 든 아영은 서둘러 벨을 눌렀다.
곧이어 버스가 멈추고, 의자에서 일어난 아영은 다리 사이로 파고드는 아찔한 통각에 신음이 새어 나오려 하자 재빨리 입술을 깨물었다.
어젯밤부터 조금 전 호텔 방을 빠져나오기 직전까지 쉬지 않고 그녀를 몰아붙인 태하 때문이었다.
“안 내릴 겁니까?”
“내, 내려요.”
기사에 재촉에 의자 손잡이를 부여잡고 있던 아영은 서둘러 손을 떼고 문 쪽으로 향했다.
또다시 통증이 들쑤셨지만, 아영은 꾹 참고 다리를 움직였다.
그녀가 바닥에 신발을 내딛자마자 성질 급한 버스 기사는 먼지바람을 일으키며 출발했다.
버스 정류장에서 집까지 채 10분도 되지 않는 거리였지만 아영에게는 아득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가야 했다. 제 목숨보다 소중한 서준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옆집에 도착한 건 그로부터 15분이 지난 뒤였다.
띵동. 띵동.
“누구세요?”
“저 서준이 엄마예요.”
초인종이 울리자 안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영의 말에 곧 분주한 발소리가 들렸다.
“벌써 왔어?”
곧이어 문이 열리고 진도 아주머니가 나왔다.
60대 중반인 아주머니는 진도에서 내려와 제주도에 사는 남편과 결혼했지만, 아이를 낳지 못해 쫓겨나다시피 이혼당한 뒤 지금까지 혼자 지내고 있었다.
동네에서 구조한 길고양이 3마리와 함께 지냈는데, 동물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서준은 옆집에 자주 놀러 가곤 했다. 그럴 때마다 아주머니는 서준을 친손주처럼 반겨 주었다.
아주머니가 들어오라는 듯이 문을 활짝 열자 신발을 벗은 아영이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냥 집으로 가라니까. 바로 출근 준비해야 할 거 아니야.”
아영은 대답 대신 옅게 웃어 보였다. 갑자기 서준을 부탁한 것도 죄송한데, 어린이집 등원까지 떠맡길 수는 없었다.
서준은 제집인 것처럼 아주머니 침대에서 곤히 잠들어 있었다.
아영은 서준이 깨지 않게 조심스럽게 제 품에 안았다. 잠깐 꼼지락거리던 서준은 이내 엄마 냄새를 맡은 건지 조용해졌다.
“간만에 서준이랑 자니까 적적하지 않고 좋더니만.”
서준을 품에 안은 아영을 보며 진도 아주머니는 서운한 기색으로 말했다.
“항상 서준이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자주 좀 와. 우리 고양이들도 서준이 기다려.”
“네. 그럴게요. 그리고 이거…….”
“이게 뭐야?”
아영은 미리 준비한 봉투를 아주머니에게 건넸다.
“매번 서준이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많지는 않지만 제 마음이니까 받아 주세요.”
“서준 엄마 이러면 나 화낸다.”
“아니, 그래도…….”
진도 아주머니가 돈 봉투를 밀어내자 아영은 어쩔 줄을 몰랐다.
“내가 돈 때문에 서준이 봐주는지 알아? 서준이가 좋아서 봐주는 거지. 그리고 솔직히 내가 봐주는 게 아니라 서준이가 날 봐주는 거야. 나 적적할까 봐 유치원에서 있었던 일 쫑알쫑알 얘기할 때마다 내가 얼마나 행복한데. 그러니까 이 돈 넣어 둬.”
“번번이 감사하고 죄송합니다.”
아영은 또 한 번 감사 인사를 드린 뒤 서준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서준이 깨지 않게 조심스럽게 침대에 눕힌 아영은 감기에 걸리지 않게 가슴까지 이불을 덮어 주었다.
작은 입을 벌린 채 쌕쌕거리며 잠든 서준을 보며 아영은 밀려오는 두려움을 삼켰다.
***
아영은 카페가 조금 한산해지자 2층 사무실로 향했다. 자작나무로 만든 문 앞에 서서 옷차림을 살핀 뒤 노크를 했다.
똑. 똑.
“들어오세요.”
안에서 현성의 목소리가 들리자 아영은 문을 열고 들어갔다.
“왔어요?”
그녀를 본 현성은 보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반가운 얼굴로 사무실 중앙에 있는 소파를 가리켰다.
“앉으세요.”
“네.”
그녀가 소파에 앉자 현성은 그녀 맞은편에 앉았다.
“초밥은 괜찮았어요?”
“덕분에 잘 먹었습니다.”
보통 바쁜 점심시간에는 간단하게 샌드위치나 빵으로 해결하는데, 오늘은 현성이 포장해 온 초밥 덕분에 그녀뿐만 아니라 다른 직원들도 맛있게 먹었다.
“다음에 같이 가요. 포장해서 먹는 것보다 거기 가서 먹는 게 훨씬 맛있거든요.”
“직원들이 좋아하겠네요.”
그녀의 대꾸에 현성의 표정이 어색하게 굳어지더니 이내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그런데 하실 말씀이 뭐예요?”
“저번에 말씀드렸던, 저희 부모님께 인사드리는 거 이번 주 토요일 어떤지 해서요?”
“이번 주요?”
“혹시 약속 있어요?”
난처한 그녀의 표정에 현성이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아니요. 없긴 한데…….”
“혹시 서준이가 신경 쓰이시면 같이 가도 돼요.”
그녀가 머뭇거리는 이유를 눈치챈 현성이 말했다.
“서준이도요?”
“어차피 저희 부모님 아영 씨한테 아이 있는 거 아시니까 아영 씨만 괜찮다면 같이 가도 상관없거든요.”
“그건 좀 힘들 것 같아요. 서준이가 낯을 가리는 편이라서요.”
“그럼, 아쉽지만 서준이와는 다음에 봐야겠네요.”
아영은 대답 대신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
금박 테두리가 멋들어지게 둘러진 문 앞에 선 아영은 깊게 심호흡을 한 뒤 벨을 꾹 눌렀다.
벨 소리가 들리고 곧이어 나직하게 슬리퍼 끄는 소리가 들렸다. 심장 소리가 빨라졌다.
달칵. 문이 열리고 가운 차림의 그가 눈에 들어왔다. 씻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머리카락뿐만 아니라 벌어진 가운 사이로 드러난 가슴에 물기가 맺혀 있었다.
그 모습을 보는데 저도 모르게 입 안이 말라 왔다.
“막 나가려던 참이었는데.”
그가 문고리를 잡고 선 채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며 삐딱하게 말했다.
“야, 약속 있으면 가 볼게.”
“가긴 어딜 가.”
“앗!”
아영은 당장이라도 떠날 것처럼 핸드백 끈을 고쳐 맸다. 그러자 그의 팔이 뻗어 와 그녀를 호텔 방 안으로 잡아당겼다.
그의 강한 힘에 아영은 속절없이 끌려들어 갔다.
쾅.
등 뒤로 문이 닫히자 순식간에 문과 그 사이에 갇힌 아영은 놀란 숨을 삼켰다.
“무, 무슨 짓이야?”
“카페에서 나간 지 한 시간도 넘었다는데 지금 온 이유가 뭐야?”
“그걸 어떻게 알았어?”
그녀의 두 눈이 놀라 휘둥그레졌다.
“올 시간이 됐는데 안 오길래 카페에 전화했지.”
순간 제게 사람이라도 붙인 건가 싶어 가슴이 철렁했던 아영은 안도했다.
하지만 두 시간 동안 연락이 닿지 않았던 그녀의 행적에 그는 의심의 눈빛을 보냈다.
“대체 누구랑 있다가 온 거야? 설마 카페 사장이랑 같이 있었던 거야?”
“그런 거 아니야.”
“아니면 어디 있다가 온 건데?”
“급히, 들를 데가 있었어.”
사실은 여길 와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이느라 늦어진 거였지만 사실대로 말하고 싶지 않았기에 아영은 거짓말했다.
“거기가 어딘데?”
“내가 그것까지 말해야 해?”
거짓말에 서툰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의 눈빛이 가늘어지더니 그녀의 턱을 들어 올렸다.
“말하고 싶지 않으면 안 해도 돼. 대신 날 한 시간이나 기다리게 한 대가를 받아야겠는데. 뭐로 받을까?”
그녀의 턱을 쥐고 있던 그의 엄지손가락이 그녀의 아랫입술을 짓뭉개자 붉은색 틴트가 새하얀 피부에 번졌다.
“이 입술로 받을까? 아니면…….”
그가 말을 길게 늘어트렸다.
“여기로 받을까?”
“헉!”
방심한 사이 그의 손이 스커트 안으로 파고들자 화들짝 놀란 아영이 다급히 다리에 힘을 주었다.
되레 그 동작이 그를 더 자극했는지 태하는 더 깊이 밀고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