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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형을 잃은 아영의 몸이 휘청하면서 단단한 가슴팍에 부딪혔다. 그러자 갈 곳을 잃고 허우적거리던 그녀의 손에서 떨어져 나간 우산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아영이 쏟아지는 비를 고스란히 맞으며 고개를 들자 저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는 그의 눈빛이 그녀를 옭아맸다.
“다시는 도망가지 말랬지?”
그 역시 우산을 쓰지 않아 흠뻑 젖은 얼굴로 매섭게 쏘아붙였다.
“도망간 거 아니야. 피해 준 거지.”
아영은 제가 가는 것도 모르고 통화할 때는 언제고, 뒤늦게 쫓아와서 무섭게 화를 내는 그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누가 피해 달래? 제멋대로 판단하지 마.”
“알았으니까 일단 놓고 말해.”
아영이 주위를 살피며 말했다. 다행히 비가 와서인지 지나가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태하는 불안해하는 그녀에게 다그치듯 말했다.
“내 말에 대답부터 해.”
“무슨 말?”
“너 카페 사장이랑 결혼해?”
“뭐?”
갑작스러운 뜬금없는 소리에 아영이 반문했다.
“그게 아니면 네가 그 남자 부모님을 찾아뵐 이유가 없잖아. 안 그래?”
“그건…….”
그제야 현성과 나눈 얘기를 그가 엿들었다는 걸 깨달은 아영의 눈동자가 당황해 흔들렸다.
그 모습을 본 그의 표정이 냉소적으로 돌변했다.
“뭐야, 내 앞에서 아무 사이 아닌 척하더니 둘이 결혼할 사이였던 거야?”
“그런 거 아니야.”
“아니면 뭔데?”
태하가 매서운 얼굴로 쏘아붙였다.
아영은 조금 전 상황을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듯한 그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 난감했다.
사실대로 말하자니 그에게 약점 잡히는 것 같아 싫었고, 그대로 놔두자니 그를 속이는 것 같아 마음에 걸렸다.
결론은 어느 쪽이든 그가 좋아할 상황이 아니라는 거다.
“따라와.”
침묵이 길어지자 제 예상이 맞았다고 생각했는지 순간 태하의 눈빛이 무섭게 돌변하더니 그녀의 팔목을 움켜잡고 걷기 시작했다.
“자, 잠깐. 어딜 가는 거야?”
“호텔.”
“뭐? 싫어. 안 가!”
빗길을 뚫고 앞장서 걷던 그가 나직하게 내뱉은 ‘호텔’이라는 말에 아영은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그럴수록 태하는 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조용히 따라올래? 아니면 업혀서 갈래?”
커다란 그의 손에 둘러싸인 손목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통증에도 아영이 멈추지 않자 걸음을 멈춘 그가 서늘한 얼굴로 경고했다.
“둘 다 싫어.”
“다시 한번 물을게. 네 발로 걸을래, 아니면 꼴사납게 나한테 업혀 갈래?”
그녀가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자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눈을 뜬 태하가 조금 전보다 더욱 험악해진 얼굴로 천천히 되물었다.
마치 그녀에게 제 말을 새기기라도 하듯이 잔뜩 힘이 들어간 목소리는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또 한 번 싫다고 하면 당장이라도 그녀를 둘러업을 기세라서 아영은 섣불리 대답하지 못했다.
“잘 생각했어.”
그녀의 입에서 싫다는 말이 나오지 않자 히죽 웃던 태하는 이내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에게 잡힌 팔목 때문에 아영은 따라 걸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차는 멀지 않은 곳에 주차되어 있었다.
그녀를 조수석으로 밀어 넣다시피 태운 태하는 빠른 걸음으로 보닛을 돌았다.
그가 차에 타기 전 아영은 잠시 도망갈까 생각했지만 이내 포기했다.
만에 하나 운이 좋아 그에게서 벗어난다 하더라도 지금 저에게 독이 잔뜩 오른 그가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는 예감 때문이었다.
그사이 운전석으로 돌아온 태하는 자리에 앉자마자 차에 시동을 걸었다.
자동으로 켜진 에어컨에서 찬 바람이 나오자 한기를 느낀 아영이 부르르 떨었다. 태하는 곧바로 에어컨을 꺼 버렸다.
“안전벨트 매.”
그녀가 앉은 자리에 히터를 켠 그가 툭 내뱉었다.
아영은 떨리는 손끝으로 안전벨트를 매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이리 줘.”
“괜찮아.”
자꾸 헛손질하는 아영이 답답했는지 그가 손을 뻗었다. 하지만 아영은 고집스럽게 안전벨트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암튼, 고집은.”
또다시 애먼 데다 안전벨트 고리를 끼우려는 그녀의 모습을 보다 못한 태하가 불쑥 그녀 앞으로 몸을 숙였다.
갑자기 그의 얼굴이 다가오자 흠칫 놀란 아영은 숨을 삼키는 것과 동시에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뺐다.
태하는 그녀의 반응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의 손에 쥐여 있던 안전벨트를 빼앗아 제자리에 꽂아 넣었다.
달칵, 잠기는 소리를 확인한 태하는 이내 미련 없이 제자리로 돌아와 안전벨트를 맸다.
순간 그가 키스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아영은 창피함에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뭘 기대했는지 모르지만 비에 젖어 생쥐 꼴인 여자를 덮칠 만큼 욕구 불만 상태는 아니야.”
그녀의 생각을 비웃듯이 차게 내뱉은 그는 차를 출발시켰다.
착각한 것도 모자라 그에게 제 생각까지 들켜 버린 아영은 할 수만 있다면 땅속으로 꺼지고 싶었다.
그가 묵는 호텔은 전 세계에 체인을 두고 있는 5성급 호텔이었다.
그는 최고층 프레지던트룸을 혼자 사용하고 있었는데, 다행히 전용 엘리베이터가 따로 있어 다른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들어올 수가 있었다.
“감기 걸리기 전에 씻어.”
“괜찮아.”
아영은 양팔을 감싼 채 잘게 떨면서도 그의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 모습으로 날 유혹할 게 아니라면 들어가서 씻는 게 좋을 거야.”
그녀의 얼굴로 향해 있던 그의 시선이 아래로 향하더니 이내 한곳에 머물렀다.
무심코 그의 시선을 따라가다 비에 젖은 티셔츠 위로 제 속옷이 비치는 걸 확인한 아영이 황급히 뒤돌아서 양팔로 가슴을 가렸다.
“수건 좀 빌려줘.”
아영이 등을 보인 채 말했다. 그녀의 날씬한 몸의 굴곡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고작 작은 수건으로 내 눈을 가릴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걸까?
“안 돼.”
“아니면 가운이라도…… 앗!”
그녀의 고집스러움에 참다못한 태하가 그녀를 잡아 돌려세웠다. 갑자기 몸이 돌려지자 당황한 그녀의 두 눈이 놀라 커졌다.
“이아영, 내가 고작 감기 때문에 이런다고 생각해?”
태하의 눈빛에 서린 열기를 느낀 건지 아니면 그의 무서운 표정 때문인지 아영은 고집스러움이 한풀 꺾인 얼굴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가운 차림으로 집에 돌아갈 수는 없…….”
“세탁 서비스 맡기면 금방이야. 네가 걱정하는 게 그거라면.”
“알았어.”
아영은 할 말이 더 있는 것처럼 머뭇거리더니 이내 저와 더 얘기해 봤자 달라질 게 없다고 생각했는지 마지못해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욕실은 오른쪽이야.”
그녀가 도망치듯 욕실로 사라지자 억지로 눈을 뗀 태하는 아까부터 불편하게 조이던 바지를 내려다보았다. 존재감을 과시하듯 바지 앞섶이 불룩 튀어나와 있었다.
“빌어먹을.”
태하는 이런 제 상태가 적응되지 않았다.
그녀의 안전벨트를 매 줄 때 코끝에 닿은 그녀의 살 냄새를 맡으면서 시작된 흥분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어떻게든 다른 생각으로 잠재워 보려 했지만 이번에는 시각이 문제였다.
비에 젖은 티셔츠가 찰싹 달라붙는 바람에 그녀의 몸매가 고스란히 드러난 것이다.
지난 5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그녀의 몸매는 육감적으로 변해 있었다.
가는 팔 위로 봉긋 솟은 가슴은 확실히 커져 있었다. 전에도 작은 편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제 손에 차고 넘칠 만큼 커 보였다.
마치 고삐 풀린 망나니처럼 한 번 시작된 흥분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자 태하는 서둘러 침실에 딸린 욕실로 들어갔다.
잠시 후 그가 욕실에서 나왔을 때 먼저 나온 아영은 그녀의 핸드폰으로 누군가와 통화 중이었다.
“죄송해요. 그럼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생각보다 빨리 나온 저를 보고 당황했는지 황급히 전화를 끊는 그녀를 보자 태하의 눈빛에 푸르게 날이 섰다.
“뭐야? 나 몰래 카페 사장한테 도움이라도 요청한 거야?”
“그럴 거였으면 들킬 염려 없는 문자로 했겠지.”
당황하는 기색 없이 내뱉는 그녀의 말이 거짓은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왜 제가 나타나자 황급히 전화를 끊었는지 의문이 들었다.
“아니면 누군데?”
“내가 그것까지 말해야 해?”
아영이 방어적으로 나오자 잠시 가라앉았던 의심이 다시 표면 위로 올라왔다.
“알려 주기 싫다면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는 수밖에.”
태하는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핸드폰을 순식간에 낚아챈 뒤 통화 목록을 확인했다. 하지만 그녀가 통화한 목록은 이미 지워지고 없었다.
설마 그녀가 통화 목록까지 지울 줄 몰랐던 태하의 의심은 더욱 깊어졌다.
“대체 나한테 숨기는 게 뭐야?”
“그런 거 없어.”
말과는 다르게 그녀의 동공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렸다.
“없다면서 통화 목록은 왜 지웠어? 그리고 눈빛은 왜 흔들리는데? 사람 궁금해서 미치게.”
“그건…….”
제 표정을 고스란히 읽히자 아영은 당황했는지 마른침을 삼키며 뒤로 주춤 물러났다.
매번 중요한 순간마다 도망치는 그녀를 더는 참을 수 없어, 태하는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 그녀의 턱을 움켜쥐었다.
“읏!”
“말해. 나한테 숨기는 게 뭔지.”
“없다고 했잖아.”
“없는데 왜 이렇게 벌벌 떨어?”
아영이 겁에 질린 눈으로 숨을 헐떡였다. 태하는 그 모습이 마치 사자에게 잡아먹히기 직전 사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그건 네가 자꾸 날 괴롭히니까…….”
“이게 괴롭히는 거라고? 진짜 괴롭히는 게 뭔지 보여 줘야겠네.”
끝까지 숨기기에 급급한 그녀의 행동에 결국 폭발한 태하는 그대로 그녀를 둘러업고 침실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아, 안 돼! 내려 줘! 내려 달란 말이야!”
그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아영은 있는 힘껏 발버둥 쳤다. 하지만 태하는 너무나 쉽게 제 가슴을 내리치던 그녀의 두 손을 포박한 뒤 침대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풀썩.
매트리스에 튕긴 그녀의 몸이 흔들렸다.
태하는 그녀가 도망갈 사이 없이 그녀 위로 제 몸을 실은 뒤 그녀의 두 손을 머리 위로 그러쥐었다.
그에게 두 팔과 두 다리를 붙잡힌 아영은 마치 표본이 된 나비가 된 것처럼 꼼짝할 수가 없었다.
“비켜!”
“네가 숨기는 게 뭔지 알려 주면 비켜 줄게.”
“없다고 했잖아!”
“그럼, 네 스스로 말할 때까지 괴롭히는 수밖에.”
그의 얼굴이 내려오자 아영은 황급히 얼굴을 돌렸다.
그녀의 입술이 아닌 볼에 제 입술이 닿자 피식 웃던 태하는 굳이 입술이 아니어도 상관없다는 듯 그녀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