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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 몰라. 기억 안 나.”
당황한 아영이 그를 피해 고개를 홱 돌렸다.
서로의 윤곽만 볼 수 있을 정도로 어두운 창고 안이었지만 아영은 붉어진 제 얼굴을 들킬까 봐 겁이 났다.
태하는 그런 그녀의 턱을 잡아 다시 저를 보게 했다.
아영이 힘을 주며 버텼지만 그를 이기기엔 역부족이었다. 저를 꿰뚫어 보는 듯한 그의 집요한 시선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었다.
“정말 기억 안 나?”
“안 난다고 했잖아.”
그가 재차 던진 질문에도 아영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걸 인정해 버리면 그에게 속수무책으로 끌려갈까 봐 겁이 났다.
그러자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럼 기억나도록 만드는 수밖에.”
태하가 작정한 듯 고개를 숙여 왔다. 그의 얼굴이 닿을 듯 다가오자 아영의 손이 본능적으로 제 입술을 가렸다.
태하가 숙였던 고개를 들더니 재밌다는 듯 피식 웃음을 흘렸다.
“기억났나 보네? 입술을 가리는 걸 보니.”
그제야 그의 짓궂은 장난에 놀아났다는 걸 깨달은 아영은 그를 있는 힘껏 쏘아보았다.
“놀리니까 재밌니?”
“전혀.”
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럼 왜 이러는 건데?”
“그러니까 자꾸 날 자극하지 마.”
“내가 언제?”
“날 피하지도 말고, 도망치지도 마. 그리고 날 잊은 것처럼 굴지도 마. 기분 엿 같으니까.”
그가 날 선 눈빛으로 씹어뱉듯 말했다.
아영은 며칠만 버티면 괜찮을 줄 알았다. 예전처럼 각자의 생활로 돌아가면 금방 잊힐 거라는 생각에 그를 피할 궁리만 했다.
하지만 그의 눈에 서린 집착을 보자 두려워 피하기만 급급했던 제 행동이 오히려 그를 자극하는 행동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차라리 도망치지 않고 제대로 끝냈다면 그가 지금처럼 집요하게 나오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제야 아영은 결심이 섰다.
“알았어. 네 말대로 피하지도 않고, 도망치지도 않을게.”
“이제야 나와 얘기할 마음이 생겼나 보지?”
그의 입가에 조소가 어렸다.
“대신 시간과 장소는 내가 정할 수 있게 해 줘.”
“좋아.”
그제야 영원히 떨어질 것 같지 않았던 그의 몸이 그녀를 놔주었다.
그의 몸이 떨어져 나가는 순간 안도감보다 허전함이 더 크게 다가오자 아영은 당혹스러웠다.
“나, 머, 먼저 가 볼게.”
“잠깐.”
아영은 자신의 혼란스러움을 그가 눈치챌까 봐 서둘러 창고 손잡이를 잡았다. 하지만 문을 열기도 전에 태하가 그녀의 팔목을 잡았다.
당황한 아영이 돌아보자 태하가 입을 열었다.
“내 연락처도 모르면서 어디로 연락할 건데?”
마음이 급한 나머지 정작 중요한 걸 깜박하고 있었다.
“여기에 적힌 번호로 연락해.”
태하가 은색 케이스에서 명함을 꺼내 내밀었다. 업무용이 아닌 개인적인 명함인지 그의 이름과 연락처만 적혀 있었다.
“내 핸드폰은?”
“그때 만나면 돌려줄게.”
“핸드폰도 없는데 어떻게 연락하라는 거야?”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하라는 말이 괜히 있겠어?”
태하는 괜한 핑계 대지 말라는 듯 딱 잘라 말했다.
“혹시 내 핸드폰 열어 본 거 아니지?”
아영은 내내 마음에 걸렸던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말했지만 초조한 마음에 입이 바짝 타들어 갔다.
잠금을 걸어 놓긴 했지만 쉬운 번호로 되어 있어 서준도 열었을 정도였다. 그래서 내내 조마조마했었다.
“어땠을 것 같아?”
“설마, 매너 없이 남의 핸드폰을 뒤지는 행동은 하지 않았을 거라 믿어.”
“왜, 네 핸드폰에 혹시 내가 보면 안 되는 거라도 있어?”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하던 태하가 툭 내뱉었다.
예상치 못한 그의 질문에 아영은 순간 당황하고 말았다. 어서 아니라고 해야 하는데 뇌 회로가 고장이라도 난 듯 입만 벙긋할 뿐 소리가 되어 나오지 못했다.
“저, 전혀.”
“왜 그렇게 당황해?”
“당황한 적 없어.”
태하가 빤히 쳐다보자 아영은 방어적으로 턱을 치켜들었다.
저를 향한 시선이 깊어지자 아영은 마른침을 삼켰다.
한참을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던 태하가 입을 열었다.
“암튼 도망치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야. 다음에는 참지 않을 거니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그건 통보이자 협박이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더는 물러날 곳이 없다는 것을.
RRRRR. RRRRR. RRRRR.
그 순간 핸드폰이 울렸다. 갑작스러운 소리에 놀라 아영이 딸꾹질했다.
“괜찮아?”
다그칠 때는 언제고 다정하게 묻는 그의 말에 주책없이 아영은 가슴이 떨렸다.
“전화부터 받아.”
그런 제 마음이 어이가 없어 그에게 퉁명스럽게 말했다.
태하는 중요한 순간을 방해받은 게 짜증이 났는지 잘생긴 미간을 구겼다.
빌어먹을.
전화 건 사람이 누군지 몰라도 액정 화면을 응시하던 태하의 입에서 나지막한 욕설이 튀어나왔다. 그러더니 그녀에게서 멀찍이 떨어진 다음 전화를 받았다.
“무슨 일이야.”
[대니얼, 나 지금 어디게?]
조용한 창고 안에 밝고 쾌활한 여자 목소리가 울렸다. 볼륨이 커서 그도 놀랐는지 곧바로 통화 음량을 낮췄다.
아영은 그에게 전화를 건 사람이 여자라는 사실에 저도 모르게 긴장하는 자신을 느꼈다.
“급한 얘기 아니면 나중에 통화해.”
[전화 끊지 마. 나 방금 한국 도착했어!]
곧 전화를 끊으려는 태하를 붙잡은 여자가 다급히 외쳤다.
“뭐?”
핸드폰을 쥔 태하가 곤란한 눈빛으로 돌아보았다.
아영은 그의 통화에 관심 없는 척 고개를 돌렸지만 이내 가슴 한구석이 뭔가 걸린 것처럼 답답해졌다.
“갑자기 한국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제니퍼랑 일본 촬영 왔다가 너 한국에 있다길래 왔지.]
“돌아가. 너랑 놀아 줄 시간 없어.”
태하가 귀찮은 어조로 말했다.
[대니얼, 너무한 거 아냐? 방금 도착한 사람한테 돌아가라니. 내가 누구 때문에 왔는데. 너무해.]
여자가 칭얼거리자 태하는 난처한지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더는 두 사람의 통화 내용을 듣고 싶지 않았던 아영은 몰래 창고를 빠져나왔다.
후문을 나오자 낮에 주춤하던 비가 더 거세져 있었다. 우산을 편 아영은 빠른 걸음으로 도로로 나왔다.
마침 지나가는 택시가 보이자 손을 흔들었다. 하지만 손님이 타고 있는지 택시는 그냥 지나쳐 가 버렸다.
아영은 혹시 그가 뒤쫓아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뒤를 돌아보았지만 아직 통화 중인지 태하는 보이지 않았다.
아영은 안도가 되면서도 제가 가는 것도 모르고 여자와 통화하고 있을 그의 모습이 떠오르자 이유를 알 수 없는 화가 치밀었다.
태하는 저와 아무 상관 없는 남자다. 그러니 그가 누구와 통화를 하든 말든 제가 신경 쓸 이유도 자격도 없었다. 그런데도 왜 이렇게 짜증이 날까.
설마 나 질투하는 걸까?
말도 안 돼.
아영은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그는 저를 이용하고 버리려던 남자였다. 그런 그에게 아직도 감정이 남아 있을 리가 없었다. 바보가 아니고서야.
빠앙.
클랙슨 소리에 아영이 흠칫하며 우산을 들자 길가에 차를 세운 현성이 비상등을 켠 뒤 차에서 내렸다.
“아영 씨 무슨 일 있어요?”
“네?”
“제가 몇 번을 불러도 모르길래요.”
“아, 그랬어요? 빗소리 때문에 못 들었나 봐요.”
차마 권태하 생각하느라 못 들었다고 할 수 없어 아영은 어색한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평소와 다른 분위기를 읽었는지 현성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혹시 카페에 무슨 일 있었어요?”
“아니요. 오늘 클라이언트 만나러 가신다더니 잘됐어요?”
그녀의 표정이 평소와 다르다는 걸 간파한 현성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쳐다보자 아영은 말을 돌렸다.
“물론이죠. 제가 누굽니까.”
그녀가 대답을 피하자 현성은 더는 캐묻지 않고 그녀의 말에 맞장구쳐 주었다.
아영은 현성의 배려가 오늘따라 고마웠다.
카페와 게스트하우스만 운영하려던 현성은 원래의 계획을 변경하고 얼마 전에 건축 사무소를 열었다. 그가 지은 독특한 건물이 입소문이 나면서 여기저기에서 건축 의뢰가 들어온 것이다.
서울에서 건축 일을 하다 염증을 느껴 제주도로 내려온 그였기에 처음에는 거절했다.
그런데 제주도 생활 5년 차가 되자 내심 무료함을 느끼던 현성은 그때까지 러브콜을 하던 지인의 부탁을 들어주면서 다시 건축 일을 시작했다.
“아, 맞다. 저번에 우리 부모님 찾아뵙기로 한 거 언제가 좋을까요?”
현성은 얼마 전, 결혼을 재촉하는 부모님 때문에 힘들다며, 상황을 모면하려면 아영의 도움이 필요하다며 부모님을 함께 찾아뵈어 주기를 부탁했었다.
아영은 잘 모르는 분들께 거짓말을 하는 것도 그렇고, 여러모로 내키지 않았지만 현성의 간곡한 부탁에 어쩔 수 없이 수락했었다.
“글쎄요. 제 휴무가 평일이라서…….”
“아영 씨의 소중한 휴무를 쓸 수는 없죠. 전 다음 주 주말이 괜찮을 것 같은데 아영 씨는 어때요?”
“주말은 카페가 제일 바쁠 때라 자리 비우기 힘들 것 같아요.”
평일보다 평균 3배 이상 손님이 많은 주말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네 명도 버거운 일을 세 명이 하는 건 그녀의 양심상 허락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날 카페 문 닫으려고요.”
“네?”
“그래야 아영 씨가 부담 없이 갈 수 있을 거 같아서요.”
“굳이 그렇게까지…….”
주말 매출이 어느 정도인지 알기에 아무렇지 않게 문을 닫겠다는 현성을 아영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저라면 절대 내리지 못할 결단이었다.
“그만큼 이번 일이 저한텐 중요하거든요.”
“알았어요. 그럴게요.”
현성이 진지하게 나오자 아영은 더는 반대하지 못했다.
“고마워요. 아영 씨.”
“고맙긴요. 그동안 사장님께 도움받은 걸 조금이라도 갚을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아영은 현성의 부담을 덜어 주려고 일부러 가벼운 어조로 답했다.
빵빵!
그때 버스가 시끄럽게 클랙슨을 눌렀다.
1차선 도로라 도로 폭이 좁아 갓길에 세워 둔 현성의 차 때문에 버스가 지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어서 가세요.”
“아영 씨도 타세요. 집까지 데려다줄게요.”
“아니요. 버스 타고 갈게요.”
“알았어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단호한 그녀의 거절에 현성은 아쉬운 얼굴을 뒤로하고 몸을 돌렸다.
차가 있는 곳으로 뛰어간 현성은 버스 운전기사를 향해 죄송하다는 인사를 한 뒤 재빨리 차에 올라탔다.
현성에게 한마디 하려던 버스 운전기사는 예의 바른 그의 행동에 화도 내지 못하고 참는 듯했다.
현성의 차가 떠나자 멈췄던 버스가 움직였다. 아영은 다시 택시를 잡기 위해 도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순간 팔목이 잡힌 것과 동시에 그녀의 몸이 반대편으로 홱 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