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9화 (39/82)

39

“6,500원 결제해 드리겠습니다.”

태하가 카드를 내밀었다. 아영은 카드보다 길게 뻗은 그의 손가락에 눈길이 갔다.

아영은 그의 손을 참 좋아했었다.

투박하지 않으면서 그렇다고 얇지도 않은 적당한 굵기의 손가락이 제 얼굴을 감쌀 때면 강아지처럼 그의 손바닥에 얼굴을 비비곤 했다.

그럴 때면 태하는 귀엽다는 듯 그녀의 얼굴을 끌어당겨 키스를 퍼부었다. 뜨겁고 진한 키스를.

“무슨 문제 있습니까?”

아영이 카드를 받을 생각도 하지 않고 멍하니 쳐다보기만 하자 태하가 물었다.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있던 아영은 퍼뜩 정신이 돌아왔다.

그가 저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는 걸 느낀 아영의 얼굴이 당혹스러움으로 물들었다.

“아, 아닙니다.”

서둘러 카드를 챙긴 아영은 금액을 입력했다.

“음료가 준비되면 진동벨로 알려드리겠습니다.”

아영은 카드와 진동벨을 건네며 빠르게 내뱉었다.

태하는 제게 시선도 주지 않는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진동벨을 잡을 때 일부러 그녀의 손 위로 겹쳐 잡았다.

순간 깜짝 놀라 본능적으로 손을 뺀 아영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그녀의 시선이 제게 향하자 태하의 입꼬리가 만족스럽다는 듯 올라갔다.

그제야 태하가 제 손을 잡은 게 실수가 아닌 고의였다는 걸 깨달은 아영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하지만 그녀가 반격하기도 전에 진동벨을 챙긴 태하는 빈자리를 찾아 유유히 걸어가 버렸다.

“저기 매니저님, 5시 넘었는데 퇴근 안 하세요?”

혼자 치밀어 오르는 화를 가까스로 삭이고 있을 때 음료를 준비하던 예원이 말했다.

“뭐? 벌써 그렇게 됐어?”

시간을 확인하니 5시 20분을 넘어서고 있었다. 태하에게 정신이 팔려 시간이 지난 것도 모르고 있었다.

아영은 두르고 있던 앞치마를 벗으며 슬쩍 태하의 동태를 살폈다.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를 알아본 몇몇 손님이 그에게 사인을 요청하고 있었다.

저를 보고 있으면 어쩌나 걱정하던 아영은 혼란스러운 틈을 타 카페를 빠져나가기로 했다.

“나 먼저 가 볼게. 수고해.”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예원에게 인사한 뒤 서둘러 스태프실로 향한 아영은 유니폼을 벗고 평상복으로 갈아입었다. 마지막으로 가방을 챙겨 나와서는 정문이 아닌 후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후문은 정문에서 꽤 떨어져 있었다.

카페를 설계할 당시 현성은 식자재 운반이나 음식물 처리기 등이 손님들 눈에 띄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 후문을 후미진 곳으로 정했다고 했다.

카페까지 물건을 나를 때마다 번거로울 때가 많았던 아영은 처음으로 현성의 설계에 박수를 쳐 주고 싶었다.

“누가 보면 도둑고양이인 줄 알겠군.”

발소리를 죽이며 막 후문 쪽으로 걸어가는데 등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아영의 걸음이 우뚝 멈춰졌다.

‘설마…….’

제 생각이 틀렸길 바라며 몸을 돌린 아영은 복도 중앙에 서 있는 권태하를 보자 저도 모르게 뒷걸음쳤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분명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제가 가는 걸 보지도 못했을 그가 어떻게 제 앞에 있는 건지 아영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네, 네가 왜 여기 있어?”

아영이 당황을 감추며 물었다. 하지만 경직된 표정은 전혀 자연스럽지 못했다.

“화장실 찾던 중이었어.”

화장실은 반대편에 있었다. 그것도 누구나 알 수 있게 확실하게 표시되어 있어 외국인들도 물어보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하물며 한번 가 본 길은 절대 잊어버린 적 없는 그가 화장실을 못 찾을 리가.

아영은 그의 태연한 거짓말을 모른 척하기로 했다.

“화장실은 이쪽이 아니라 반대쪽이야.”

“그래? 어쩐지 안 보이더라.”

태하는 대수롭지 않은 투로 말했다. 그건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듯이.

“그런데 넌 어디 가나 봐?”

“어?”

태하가 지나가는 투로 물었다. 아영이 순간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 머뭇거리는 사이 태하가 다시 덧붙였다.

“설마, 나 피해서 도망가는 건 아니지?”

“내가 왜?”

그의 말에 정곡을 찔린 아영의 대답이 곧바로 튀어나왔다.

“그러게. 난 왜 그런 생각이 들까?”

긴 다리로 성큼 다가온 태하가 유니폼이 아닌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그녀의 모습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마치 왜 자신이 그렇게 생각하는지 알려 주려는 것처럼.

지레 찔린 아영이 서둘러 덧붙였다.

“잠깐 물건 가지러 가는 길이야.”

“그런 옷을 입고?”

태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녀의 말을 믿지 않는 눈치였다.

어떻게든 그를 이곳에서 내보내야 한다는 생각에 아영은 마음이 급했다.

“내가 무슨 옷을 입든 말든 신경 끄고 빨리 나가는 게 좋을 거야. 괜히 사람들 눈에 띄어서 좋을 거 없으니까.”

“그러기엔 늦은 것 같은데?”

“뭐?”

“이미 누군가 오고 있거든.”

태하가 제 뒤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영이 숨죽이며 귀를 기울이자 저벅저벅 복도를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의 얼굴에 낭패감이 스쳤다.

“왜 진작 말 안 했어?”

한껏 목소리를 낮춘 아영이 따지듯 물었다.

“나도 방금 들었어. 그리고 보면 어때? 우리가 이상한 짓 한 것도 아닌데.”

“내가 싫어.”

태하는 문제 될 게 없다는 듯 말했지만 아영은 아니었다.

또다시 그와 스캔들에 휘말렸다가 제 목숨보다 소중한 서준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움에 휩싸였다.

“뭐가 그렇게 싫은데?”

“암튼, 난 싫으니까 일단 숨어.”

“내가 왜?”

태하는 숨어야 한다는 말에 어이없다는 듯 쳐다보았다.

“여긴 관계자 외 출입 금지 구역이니까.”

그거면 들어갈 이유가 충분하다는 듯 말을 마친 아영은 그가 숨을 곳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때마침 잠겨 있지 않은 자재 창고를 발견한 아영은 서둘러 문을 열었다. 그러고는 그에게 빨리 들어가라는 듯 눈짓을 보냈다.

“NO.”

태하는 단호하게 거부 의사를 밝혔다.

“권태하, 꾸물거릴 시간 없어.”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난 절대 안 들어가.”

“대체 왜?”

“옷에 냄새 배는 거 질색이야.”

“지금 그게 중요해?”

“난 중요해.”

두 사람이 실랑이하는 동안 발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냥 좀, 내 말대로 따라 주면 안 돼?”

도통 그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자 마음이 조급해진 아영은 울기 직전이었다.

그런 그녀가 불쌍해 보였는지 태하는 마지못해 허락했다.

“좋아. 대신……너도 들어와.”

“뭐? 앗!”

하지만 아영의 얼굴에 안도감이 스치기도 전에 먼저 창고 안으로 발을 디딘 태하가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갑자기 끌어당기는 힘에 균형을 잃은 아영이 휘청하며 그의 품에 파묻혔다.

태하는 그녀가 나가지 못하게 벽과 제 몸 사이에 가두고는 재빨리 자재 창고 문을 닫아 버렸다.

“이게 무슨 짓…… 읍!”

“가만히 있어. 들키고 싶지 않으면.”

당황한 아영이 버둥거리자 그녀의 입을 틀어막은 태하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아영은 캄캄한 어둠보다 단단한 그의 몸과 맞닿아 있는 이 상황이 더 두렵고 아찔했다.

그때 문 바로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아까 그 남자, 모델 대니얼 권 맞지?”

“어. 난 웬 조각상이 걸어오는 줄 알았다니까.”

목소리의 주인은 카페에서 일하는 진영과 소희였다.

“그러게. 같은 남자가 봐도 진짜 피지컬이 미쳤더라.”

“그런 남자는 어떤 여자랑 사귈까?”

그 순간 태하의 시선이 제게 향하는 게 느껴졌지만 아영은 시선을 내리깐 채 모른 척했다.

“말해 뭐 해. 당연히 끝내주는 여자랑 사귀겠지.”

“그렇겠지? 설마 평범한 여자랑 사귀지는 않겠지…….”

소희가 풀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야, 뭐가 걱정이야? 내가 있는데!”

“너랑 대니얼이랑 같아?”

“다를 건 뭔데? 똑같이 밥 먹고 똥 싸는 사람인데!”

소희가 어이없다는 듯 헛숨을 내쉬자 진영은 자존심이 상했는지 목소리를 높였다.

“됐다. 내가 말을 말아야지.”

“야, 한소희! 같이 가!”

티격태격하던 두 사람의 목소리가 멀어지고, 창고 안은 아영과 태하가 내는 숨소리만 가득했다.

그동안 어둠에 익숙해진 시야로 못 박힌 듯 저를 쳐다보고 있던 그가 들어오자 아영은 갑자기 숨이 턱 막혀 왔다.

그래서 제 입술을 짓누르고 있던 그의 손을 황급히 떼어 냈다. 그러자 그의 손에 가둬져 있던 습한 열기가 공기 중에 흩어졌다.

아영은 그가 숨 못 쉬게 막은 것도 아닌데 허겁지겁 공기를 들이켰다.

어느 정도 호흡이 정상적으로 돌아오자 그때까지 그의 품에 안겨 있다는 걸 깨달은 아영은 빠져나오기 위해 몸을 비틀었다.

하지만 순순히 떨어지던 그의 손과 달리 그의 몸은 단단한 바위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비켜 줘.”

“이제야 너와 단둘이 있게 됐는데 비켜 줄 리가 없잖아?”

아영의 요구에도 태하는 비켜 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아영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몸과 닿은 곳에서 열기가 번지자 당황했다. 그를 기억하고 있던 몸이 저도 모르게 반응한 것이다.

아영은 그런 제 상황을 그가 눈치챌까 봐 온몸에 힘을 주며 그를 밀어냈다. 하지만 태하는 쓸데없는 힘 낭비하지 말라는 듯 더욱 밀어붙였다.

그의 단단한 가슴이 압박하듯 제 몸을 누르자 아영은 헐떡였다.

“이, 이러지 마.”

“나 아직 너한테 아무 짓도 안 했어.”

그가 입매를 느슨하게 당겨 웃었다.

아영은 민망함에 제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그에게 휘둘리게 될까 봐 지레 겁먹고 도망치려 한다는 것을.

아영은 아직도 그에게 민감하게 반응하는 자신이 너무 싫었다.

“이러고 있으니까 옛날 생각 나지 않아?”

갑자기 툭 던진 그의 말에 아영이 무슨 얘기냐는 듯 쳐다보자 태하가 말을 이었다.

“고등학교 졸업식 때도 지금처럼 숨어 있었잖아. 커튼 뒤에서.”

그의 말에 잊고 있던 그 순간이 영화 필름처럼 펼쳐졌다.

추웠던 날씨, 펑펑 쏟아지던 눈, 삭막했던 교실, 우울했던 마음, 그리고 그가 준 팔찌, 도둑맞았던 첫 키스…….

생각이 거기서 멈췄다.

거칠게 비벼지던 입술 사이로 깊숙이 파고들어 와 제 안을 온통 휘저어 놓았던 그날의 키스가 마치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떠올랐다.

동시에 아영의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