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8화 (38/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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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집에 등원하기 위해 밖으로 나온 서준은 길에 고인 물웅덩이를 발견하고 뛰어갔다. 그러더니 장화 신은 발을 첨벙첨벙 굴렀다.

아영이 쫓아다니며 우산을 씌워 주었지만, 사방팔방 뛰어다니는 서준을 따라잡기엔 역부족이었다.

“엄마, 내가 분수 만들어 줄까?”

“정말?”

“서준이 봐 봐.”

서준은 제일 크게 고인 웅덩이를 찾아 발을 쿵 담갔다. 그러자 고였던 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와, 정말 분수네? 신기하다.”

“그치! 그치!”

아영이 맞장구쳐 주자 신이 난 서준은 어린이집에 도착할 때까지 웅덩이에 발을 쿵 담그기를 계속했다.

그 탓에 바짓단이 홀딱 젖었지만 서준은 전혀 개의치 않아 했다.

서준을 어린이집에 데려다준 아영은 서둘러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물놀이로 인해 등원 시간이 다른 때보다 오래 걸렸기 때문이다.

다행히 버스가 제시간에 와 주는 바람에 아영은 늦지 않게 출근할 수 있었다.

유니폼으로 갈아입은 아영은 직원들과 청소를 시작했다.

하지만 신경이 온통 태하에게 쏠려 있었던 탓에 멍하니 유리컵을 닦다가 그만 컵을 놓치고 말았다.

쨍그랑!

바닥에 부딪힌 잔의 파편이 사방에 튀었다.

“매니저님 괜찮으세요?”

놀란 직원들이 청소하다 말고 우르르 달려왔다.

일하면서 한 번도 실수한 적 없던 아영이 그릇을 깨트리자 직원들은 놀란 눈치였다.

“괜찮아. 안 다쳤어.”

직원들을 총괄하는 매니저가 딴생각하느라 잔을 깨트렸다는 사실에 아영은 창피함이 밀려왔다.

행동이 빠른 진영이 어느새 빗자루를 들고 왔다.

“비키세요. 제가 치우겠습니다.”

“아니야. 내가 치울 테니 마저 청소들 해.”

아영이 진영의 손에서 빗자루를 뺏어 들고 말했다.

잠시 쭈뼛거리던 직원들이 이내 각자 자리로 돌아가자 아영은 한숨을 삼키며 깨진 조각들을 쓸어 담았다.

실수는 그걸로 끝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더까지 착오를 일으키자 잠시 한가해진 틈을 타 예원이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매니저님 오늘 무슨 일 있으세요?”

“……잠을 못 자서 그런가 봐.”

‘갑자기 나타난 첫사랑 때문에 정신이 나갔나 봐’라고 솔직하게 말할 수 없었기에, 아영은 생각나는 대로 둘러댔다.

사실 뜬눈으로 밤을 새웠으니 아예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다크서클 생기셨네요?”

화장으로 가린다고 가렸는데 완전히 가리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많이 티나?”

“조금요.”

예원의 표현은 ‘조금’이었지만 표정은 그보다 더한 듯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든 아영은 테이블 밑에 둔 파우치를 집어 들었다.

“나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

“네. 다녀오세요.”

아영은 세면대 거울에 비친 제 얼굴을 보고 놀랐다.

집에서 볼 때까지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환한 조명 아래 그녀의 얼굴은 창백해서 그런지 더 피곤해 보였다.

파우치에서 붉은빛이 도는 립스틱을 꺼낸 아영은 핑크빛 입술 위에 덧발랐다. 조금은 생기가 돌아 보였다.

어제는 그의 일방적인 약속 따윈 무시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마음과 다르게 태하는 밤새 그녀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괴롭혔다.

이렇게 안절부절못할 거였으면 차라리 찾아가는 게 나았을까?

아영은 이내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건 위험을 자초하는 일이었다.

아영이 고민의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그를 만나지 않는 거였다.

어차피 촬영만 끝나면 다시 자신이 살던 세계로 돌아갈 사람이었다. 그때까지만 그의 눈에 띄지 않는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서준과의 추억이 담긴 사진 때문에 끝까지 고민했지만 아영은 눈물을 머금고 포기하기로 했다. 그걸 욕심냈다가는 더 큰 걸 잃을 수도 있었으니까.

아영은 고객 센터에 연락해 태하에게 있는 핸드폰을 정지한 다음 새 핸드폰을 개통하기로 마음먹었다.

새로운 것에 적응이 느린 편이라 핸드폰이든, 가전제품이든 고장이 나지 않는 한 절대 바꾸지 않는 편이었다.

그러다 보니 거의 5년째 같은 핸드폰을 쓰고 있어 자동으로 꺼지는 경우가 많았기에 이참에 바꾸기로 했다.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은 아영은 심호흡한 뒤 파우치를 챙겨 화장실을 나왔다.

오전에는 출근하는 직장인 때문에 바빴고, 점심시간에는 더위를 피해 들어오는 관광객들을 맞이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런 와중에도 태하가 불쑥 찾아오지 않을까 하는 불안 때문에 아영은 카페 문이 열릴 때마다 저도 모르게 흠칫 흠칫했다. 제가 여기서 일한다는 걸 태하가 알 리도 없는데.

퇴근 시간이 가까워질 때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아영은 단지 제 기우였다는 생각에 안도했다.

그래. 이렇게 끝나야 맞는 거다.

이미 5년이나 지난 일에 태하가 매달릴 이유는 전혀 없었다. 단지 잠깐 즐기던 사이였을 뿐인 저에게.

그때 당시 그에게 자신이 어떤 존재였는지 떠올린 아영은 애써 씁쓸함을 삼켰다.

4시 25분.

퇴근 시간을 얼마 앞두고 분주히 들어오는 주문을 소화하고 있을 때 카페 전화벨이 울렸다.

“네. 카페 더 우드입니다.”

[바쁜가 보네?]

다짜고짜 들리는 반말에 바쁘게 움직이던 아영의 손이 일순 멈췄다.

굳이 누구냐고 묻지 않아도 전화 건 사람이 태하라는 걸 단박에 알아챈 그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내가 여기서 일하는 거 어떻게 알았어?”

[당신 사장이 친절하게 알려 주더라고.]

그제야 현성이 태하에게 건넸던 명함이 떠올랐다. 아마 그 명함에 적힌 번호로 전화해서 물어본 모양이었다.

아영은 예원에게 손님을 넘기고 전화기를 든 채 구석으로 갔다.

“전화 건 용건이 뭐야?”

[퇴근 몇 시에 해?]

“그건 왜?”

[어제 못 한 얘기, 오늘은 해야 하지 않겠어?]

“난 너랑 할 얘기 없어.”

[넌 없어도 난 있어.]

집요한 그의 태도에 아영은 숨이 조여 오는 것 같은 답답함을 느꼈다.

[참고로 오늘은 도망갈 생각 하지 마. 지금 카페 앞이거든.]

“뭐?”

깜짝 놀란 아영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카페 건너편에 검은색 세단이 서 있는 게 보였다.

그때 그녀의 시선을 느꼈는지 비상등이 깜박였다. 마치 그 차가 제 차라는 걸 확인이라도 시켜 주듯이.

아영의 얼굴에 난처함이 스쳤다.

“너 왜 이래?”

[뭐가?]

“너 이렇게 집착하는 성격 아니었잖아.”

[이제 집착 좀 해 보려고.]

뜸을 들이던 태하가 툭 던진 말에 아영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그게 무슨 뜻이야?”

[네가 자꾸 밀어내니까 오기가 생기기 시작했거든.]

피하면 포기할 줄 알았다. 뭐든 제가 가지고 싶은 것은 다 가지고, 이루고 싶은 것은 모두 이룬, 아쉬울 것 하나 없는 그였기에.

그런데 그게 오히려 독이 될 줄 몰랐다.

“권태하,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난 너랑 할 얘기 없어. 또다시 찾아오면 더 깊은 곳으로 숨어 버릴 거야. 그러니까 다신 전화하지 마.”

아영은 자신의 예상과 다르게 상황이 돌아가자 덜컥 겁이 났다. 그래서 태하가 대답할 기회도 주지 않고 서둘러 전화를 끊어 버렸다.

전화기를 쥔 손이 잘게 떨렸다.

‘어쩌지…….’

불안감이 엄습했다.

“매니저님!”

그때 주문이 밀려드는지 예원이 다급한 목소리로 그녀를 찾았다.

그제야 자신이 일하는 중이었다는 걸 깨달은 아영은 서둘러 데스크로 향했다.

패키지로 여행 왔는지 외국인 손님들이 줄지어 서 있었었다.

유독 영어가 약한 예원이 쩔쩔매며 주문을 받고 있었다.

“내가 주문받을게.”

아영이 다가가자 예원은 마치 구세주 보듯 쳐다보았다.

“Please order here.”

능숙한 아영의 말에 예원 앞에 서 있던 사람들이 옆으로 옮겨 갔다. 그제야 식은땀 흘리던 예원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퇴근하기 전 마지막 주문을 받고 있는데 카페 입구가 소란스러웠다.

외국인 손님 중 카페가 마치 제집 안방인 것처럼 큰 소리로 떠드는 손님이 가끔 있었기에 아영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때 카페 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섰다. 갑자기 카페 안에 있던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주문을 받는 중에도 평범하지 않은 오라를 느낀 아영의 시선이 이끌리듯 입구로 향했다.

그러다 카페 입구에 서서 제 쪽을 쳐다보고 있는 남자를 본 순간 아영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짙은 선글라스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일반인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키에 핏이 딱 떨어지는 슈트 차림을 한 그가 누구인지 아영은 한눈에 알아챘다.

‘미쳤어. 대체 촬영은 어떻게 하고 여길 온 거야?’

사색이 된 그녀의 표정을 선글라스 너머로 지켜보던 태하가 한쪽 입꼬리를 당겨 씩 웃더니 특유의 자신만만한 걸음걸이로 걸어왔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아영의 눈동자는 바람 앞의 촛불처럼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가 앞에 멈춰 섰을 땐 숨 쉬는 것도 잊어버렸다.

태하는 아무 말 없이 그녀 위에 있는 메뉴판을 올려다보았다.

날렵한 턱선이 당겨지면서 그의 남자다운 목젖이 드러나자 그를 훔쳐보고 있던 여자들의 입에서 탄식 어린 한숨이 새어 나왔다.

하지만 아영은 그의 시선이 메뉴판이 아닌 저를 향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의 시선을 느낀 모든 감각이 그를 향해 곤두서 있었으니까.

“여긴 뭐가 맛있습니까?”

아영은 대답 대신 그를 말없이 노려보았다.

“제주도엔 오랜만이라서 그런데 추천 좀 부탁드립니다.”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태하는 다시 정중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손님, 저희 카페는 다 맛있습니다.”

더는 그를 무시할 수 없었던 아영은 일부러 손님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며 말했다.

“그럼 매니저님이 좋아하시는 거로 부탁합니다.”

자신의 반격에도 태연하게 받아치는 그를 보자 아영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그럼, 금귤 에이드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정말 기대되는군요.”

그녀의 대꾸에 태하의 입 모양이 일자로 당겨졌다.

그도 그럴 게, 태하는 새콤하거나 신 걸 질색했다. 그래서 레몬이나 자몽 같은 과일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이내 재밌다는 듯 태하의 입술이 피식 기울어졌다. 아영은 제 소심한 복수가 통하지 않자 낙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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