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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가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대번에 그녀의 목소리가 평상시와 다르다는 걸 알아챈 태하는 걱정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아니야. 없어. 감기 기운이 있나 봐.”
[약은?]
“약 먹을 정돈 아니야.”
[기억 안 나? 너 기관지 약해서 학교 다닐 때도 감기 달고 살았잖아. 그러니까 미리 약 먹어. 괜히 참다가 고생하지 말고.]
그의 말처럼 엄마를 닮아 기관지가 약했던 아영은 겨울이면 감기를 달고 살았다.
그 탓에 약 먹는 데 질려 진짜 심하지 않으면 안 먹고 버티는 경우가 더 많았다.
그가 뜻밖의 사실을 기억하고 있자 아영은 당황스러우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놀랐다.
[나가기 힘들면 용준이한테 부탁할게.]
“아, 아니야. 내가 갈게. 그러니까 용준 씨한테는 연락하지 마.”
그가 그의 매니저인 용준까지 끌어들이자 아영은 서둘러 말했다.
[약속해.]
“알았어.”
[착하다. 이아영.]
기어코 그녀의 대답을 듣고 나서야 마음이 놓이는지 그의 목소리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아, 그리고 3일 뒤 공항 재개한대.]
그 말인즉슨 드디어 그가 한국에 돌아온다는 뜻이었고, 그의 스캔들을 알게 되는 날이 머지않았다는 얘기였다.
아영은 기뻐할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의 끝이 다가오는 것 같아서.
[돌아가면 너한테 줄 게 있어.]
“……뭔데?”
[뭔지 궁금하면 어디 가지 말고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집으로 바로 갈 테니까. 그리고…….]
그런데 그때, 그가 말하던 도중 갑자기 지지직 소리가 들리더니 그의 목소리가 끊어졌다.
“여보세요?”
[보고 ㅅ……다.]
간간이 그의 목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끊겨서 도통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권태하? 여보세요?”
[…….]
먹통이 된 핸드폰에 대고 몇 번이나 그를 불렀지만 이내 전화는 강제로 끊어졌다. 아마 태풍 때문에 연결이 끊어진 듯했다.
하아.
아영은 까맣게 변한 액정 화면을 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3일 뒤면 그가 온다. 그가 오면 자신은 그를 어떤 얼굴로 봐야 할까?
저 때문에 한국에서 쌓아 온 모든 걸 잃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라는 걸 알면 그는 뭐라고 할까?
당황하고 난처할 거다.
그뿐만 아니라 제가 아이까지 임신한 걸 알면 오만 정이 떨어질지도 모른다.
그리고 결국 이런 상황으로 내몬 저에게 화를 내겠지. 이 모든 사달이 저 때문에 벌어졌으니까.
자신이 그의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기자들에게 사진도 찍히지 않았을 테고, 그날 끝까지 그의 손길을 뿌리쳤다면 그가 원치 않는 아이를 임신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를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 아무리 불이 나 갈 곳이 없어도 다시 이 집에 오지 말았어야 했다.
그랬다면 어쩌면 그를 사랑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흐흐흐흑!”
후회의 눈물이 북받쳐 올라왔다.
밝았던 창밖이 어둠으로 바뀌고 다시 어스름하게 밝아 올 때가 되어서야 아영은 결심이 섰다.
***
“이게 뭐야?”
진혁이 뜨악한 눈으로 제 앞에 놓인 사직서와 그녀를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사직서입니다.”
그녀의 말에 사무실 직원들이 놀란 눈빛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마치 서로 알고 있었냐고 묻듯이.
하지만 그 누구도 이 사태에 대해서 알지 못한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누가 몰라서 물어? 갑자기 웬 사직서냐고 묻는 거잖아.”
“죄송합니다.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다닐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그 개인적인 사정이 뭔데?”
“…….”
아영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진혁이 미간을 찌푸리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잠깐 나와 봐.”
그러고는 먼저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아영이 작게 숨을 몰아쉰 뒤 조용히 진혁을 따라 나갔다.
두 사람이 나간 뒤 사무실 분위기는 어수선해졌다.
진혁은 로비에 있는 카페를 두고 회사 근처 카페로 향했다.
두 사람 앞에 커피가 놓였지만 누구도 마실 생각을 하지 않았다.
“갑자기 이러는 이유가 뭐야.”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다른 회사에서 스카우트 제의라도 받은 거야?”
“아니요.”
“아니면 어디 아파?”
“건강합니다.”
진혁은 자신이 짐작하고 있던 것들이 모두 아니라는 대답이 나오자 속이 답답해져 제 앞에 놓인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벌컥 들이켰다.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면 갑자기 잘 다니는 회사 사표 낼 이유가 없잖아. 안 그래?”
“……쉬고 싶어서요.”
“갑자기?”
“쉬고 싶을 때가 따로 있는 게 아니잖아요.”
진혁의 시선이 가늘어지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그만두는 거…… 나 때문이야?”
“아니요.”
“아니, 라고?”
단호한 그녀의 대답에 진혁은 되레 당황한 듯 눈동자가 흔들렸다.
“오랫동안 선배를 좋아한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내 모든 걸 줘도 아깝지 않은 남자를 만나고 나서야 깨달았어요. 선배를 좋아했던 게 아니라 동경했을 뿐이라는 것을.”
“그 남자 사랑해?”
“네.”
그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미어지듯이 아팠다.
진혁의 표정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
그날 태하의 집으로 돌아온 아영은 캐롤라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는 기다리고 있었는지 벨이 울리자마자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저예요. 이아영.”
[생각 좀 해 봤어요?]
캐롤라인은 인사도 건너뛰고 제가 궁금한 것부터 물었다.
이미 결정을 내렸는데도 아영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의 침묵이 길어지자 캐롤라인이 답답하다는 듯 긴 한숨을 내쉬더니 나직하게 덧붙였다.
[당신 손에 대니의 미래가 달려 있어요.]
“제가…… 떠날게요.”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와 제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 제가 떠나는 것밖에는.
[잘 생각했어요.]
캐롤라인은 그럴 줄 알았는지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대신 부탁이 있어요.”
[뭔데요?]
“태하 한국에 돌아오면, 그때 갈게요.”
[이봐요. 당신 좋자고 대니 오길 기다렸다간 지금 집 밖에서 눈에 불을 켜고 있는 기자들에게 들킨다고요!]
캐롤라인이 답답하다는 듯이 소리쳤다.
설마 하는 생각에 창가로 다가간 아영은 집 앞에 수십 명의 기자와 카메라가 있는 걸 보고 황급히 창가에서 떨어졌다.
두려움이 엄습하자 떨리는 손으로 제 배를 감쌌다.
아영의 떨리는 숨소리를 들은 캐롤라인이 냉정하게 덧붙였다.
[어차피 헤어질 거면 지금 떠나는 게 나아요. 대니를 위해서도.]
여자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제 욕심 때문에 그를 더 힘들게 할 수는 없었다.
“……그럴게요.”
[당분간 지낼 곳을 마련해 드리죠.]
“아니요. 그럴 필요 없어요. 여기서 나갈 수 있게만 도와주면 돼요.”
[그쪽 집 불타서 당장 들어갈 곳 없다는 거 알아요. 어쭙잖게 숨었다가 기자나 대니에게 들키면 무용지물 되는 거 몰라요? 그러니 제 말에 따르는 게 좋을 거예요.]
더는 거절할 수 없었던 아영은 알겠다고 대답한 뒤 전화를 끊었다.
한 시간 뒤 캐롤라인은 남자 가발과 그녀가 갈아입을 옷을 가지고 왔다.
완벽하게 남자로 꾸민 아영은 캐롤라인과 함께 기자들 사이를 유유히 빠져나가 차에 올라탔다.
그 길로 공항으로 이동한 그녀는 여자가 준비한 청주행 비행기에 올라탔다.
그렇게 그녀는 도망치듯 그를 떠났다.
태하에게는 그동안 고마웠다는 편지 한 장만 달랑 남겨 놓은 채.
***
캐롤라인이 준비한 거처에서 숨어 지내는 동안 아영은 그가 어떻게 지냈는지 알지 못했다.
정확히는 일부러 귀를 막고 눈을 감아 스스로를 세상과 단절시켰다. 그를 보면 제 결심이 흔들릴까 봐 두려워서.
그녀가 쓰던 핸드폰을 버리고, 다시 개통을 한 건 서준을 낳기 일주일 전이었다.
분만할 때 보호자가 있어야 한다는 간호사의 말에 아영은 덤덤한 얼굴로 자신이 대신 사인하겠다고 했다.
그러자 나이가 지긋한 간호사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연 분만하면 다행이지만 아이가 안 내려와서 갑자기 응급 수술하는 경우도 있으니 보호자가 꼭 필요하다는 말을 덧붙였다.
아영은 친구 수인을 떠올렸다. 그리고 고민 끝에 아영은 수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수인은 한 시간 동안 어떻게 그럴 수 있냐며 못된 년이라며 욕을 했고, 또 한 시간은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그녀의 사정을 들은 수인은 다음 날 바로 월차를 쓰고 그녀가 있는 곳으로 내려왔다. 그러고는 심한 입덧으로 올챙이처럼 배만 나와 있는 그녀를 보고 또다시 눈물을 터트렸다.
그동안 홀로 외로움을 끌어안고 살았던 그녀 역시 수인의 따뜻한 온기에 기대어 참 많이도 울었었다.
그리고 수인에게서 듣고 싶지 않은 그의 소식까지 들어야 했다.
아영이 떠난 뒤 대한민국을 뒤흔들었던 태하의 스캔들은 에이전시에서 어떻게 힘을 썼는지 해프닝으로 마무리되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녀가 자신을 떠났다는 걸 인정하지 않았던 그는 예정되어 있던 모든 스케줄을 펑크 낸 채 미친 듯이 그녀를 찾아다녔다고 했다.
수인에게도 그녀의 행방을 물으러 찾아왔는데 저도 어디 있는지 모른다는 수인의 말에 태하는 ‘네가 모르면 누가 아느냐’며 사납게 다그쳤다고 했다.
지금까지 태하의 감정적인 모습을 본 적이 없었던 수인은 두려움이 일 정도로 그가 무서웠다고 했다.
“그 말뿐이었어? 혹시 나에 대해서 다른 말은…… 없었어?”
“응. 없었어.”
뭘 기대한 걸까.
아영은 치밀어 오르는 비참함을 눌러 삼켜야 했다.
나중에 석현을 통해 몇 날 며칠 폐인처럼 술만 마시던 그를 더는 두고 볼 수 없었던 에이전시 대표가 직접 한국까지 찾아와 사정사정해 미국으로 데리고 돌아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가 한국을 떠났다는 걸 알게 된 아영은 온종일 울었다.
그에게 붙잡힐 걱정이 사라졌으니 안도해야 마땅했지만 어쩐 일인지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이제 영영 그를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다는 생각을 하자 가슴을 도려낸 듯 아팠다.
더구나 임신 후 입덧을 심하게 한 데다 이후에도 밥을 제대로 챙겨 먹지 않은 바람에 그녀의 몸은 뼈밖에 남지 않은 상태였다.
이 이상 몸무게가 빠지면 아이가 위험해질 수도 있다는 의사에 말에 그제야 아영은 정신이 돌아왔다.
자신이 누구를 위해 이 선택을 했는지 깨달은 아영은 그때부터 오로지 아이만 생각하며 살았다.
혼자 몸으로 아이를 키우는 게 쉽진 않았지만, 다행히 잘 지내 왔다.
그가 다시 나타나기 전까지는.